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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마음 통하기 (마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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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7장의 내용은 천국 시민의 규범입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가져오신 것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맨 처음 선포하신 메시지가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의 서두에서 예수님은 누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천국 시민의 규범을 가르치시는 동안 그 산에는 마치 천국이 임한 듯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놀라운 말씀들에 완전히 몰입했을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까지 돌려대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을 경이로운 세계로 빨려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은 천국을 살고 있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고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은 곧 간음이라는 말씀에 그들은 놀라면서도 한편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겠다고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거룩한 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산 위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던 것과 현실 세계에서 온갖 사건들에 부딪치며 사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산 위에서는 용서하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산에서 내려와 막상 그 사람을 만나면 산 위에서의 다짐이 어디로 갔는지 분노와 증오가 다시 솟아오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욕심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냉엄한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면 다시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원에 들어가서 성경 읽고 기도만 하며 산다면 쉽게 천국 시민의 규범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의 규범은 산에서 말씀을 들으며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와 현실과 부딪치면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시 내려와야 했습니다. 산 위에서 듣고 배운 말씀이 산 아래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삶 속에 녹아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큰 고민 가운데 하나가 이중적인 삶의 구조입니다. 산 위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을 때는 모두 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산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아닌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보면, 햄릿이 숙부를 죽이려고 그 방에 숨어 들어갑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햄릿은 숙부를 죽이지 않고 그냥 나옵니다. 왜냐하면 숙부가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악행을 회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에 원수가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죽이지 않고 그냥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죽는다고 천국에 가고 거짓말하다가 죽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좋은 프레임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순간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누구나 아벨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 나가서 사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가 예배가 아니라 날마다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고 안전한 산 위에서 살도록 부르시지 않고, 냄새나고 더럽고 온갖 유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천국 시민으로서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마치 군중들이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각오와 믿음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갔던 것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더 말씀에 붙잡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실천될 때 우리 신자의 삶이 산 위의 믿음과 산 아래의 삶이라는 이중구조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마치고 내려오셨는데, 내려오셔서 맨 처음 하신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왕으로 오셔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천국 시민의 규범을 가르치신 예수께서 이제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왕의 권능을 행사하시는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여기서 문둥병을 고치시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문둥병은 천형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시로 간주되었는데, 예수께서 문둥병을 고치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즉 그것은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인간에게 가져오시는 왕의 행보였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성읍에서 쫓겨나 성 밖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려고 그 많은 군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문둥병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러 온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거기까지 오는 도중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아무런 제약이나 어려움 없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주목을 끈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러 나오는 것이 많은 난관을 뚫고 애를 써야 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가족의 반대가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나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장애물 속에서 예수님 앞에 나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둥병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는 길에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 이 사람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기 쉽지 않은 환경을 극복하고 이곳에 오셨다면 예수님의 맨 앞에 서 있다고 믿으십시오.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여러분을 만나주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찾아온 문둥병자의 입에서 나온 말 역시 예사롭지 않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물론 이 말은 “주님, 나 좀 낫게 해 주십시오.”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이 문둥병자는 모든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이 사람도 얼마나 “나 좀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보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을 감추고 예수님을 높여드립니다. 이것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감람산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에 대해서 우리 주님의 대답을 한번 보세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 이 문둥병자의 믿음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문둥병자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고 싶으신 말로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하시도록 하는 기도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기 싫어하시는 말씀을 억지로 해달라고 졸라댑니까? 만약 우리가 늘 하나님이 하기 싫어하시는 말씀을 억지로 해달라고 하면, 하나님의 문제아 명단에 올라갈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를 만지시면서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병이 나아 깨끗해졌습니다. 어쩌다가 몹쓸 문둥병에 걸려 성읍 밖으로 쫓겨나 사람들의 멸시와 끝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이 사람에게 이 병이 나았다는 것은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동네방네 다니면서 광고를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알려도 부족할 판인데,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고쳐주신 것을 비밀에 부치겠다는 것입니까?

사실 이 일은 비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병 나은 사람이 말 안 해도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는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고 문둥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증 받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을 진단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입니다. 또 병이 나았는지 낫지 않았는지를 판정하는 것도 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사회에서 문둥병은 의학적인 이슈가 아니라 종교적인 이슈였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병을 고쳐주시고 가서 의사한테 확인 받으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은 제사장에게 가서 나은 것을 확인 받아야 하는 것이 율법이요 제도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고 혼자서 독단적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라 율법을 존중하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책임 맡은 사람들의 역할을 존중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케 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을 치료받은 이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가장 실수하기 쉬울 때는 바로 큰 은혜를 체험했을 때입니다. 마음이 들떠가지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만 포커스를 맞추게 됩니다. 거기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버립니다. 자기가 유명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은 흥분해서 떠들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감사드리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모실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십시오.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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