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 (마 08:5-13)

첨부 1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 (마 8:5-13)

산에서 내려오신 후 문둥병자를 고치심으로 왕적 권능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께서 이번에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사시던 동네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었지만, 거기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 후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그 후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팔레스타인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장교입니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그러니까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권세와 횡포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 로마 군대의 장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고, 그래서 예수께서 왕적 권능으로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 그 왕적 권위가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이 백부장은 매우 특이한 사람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한 군단이 6000명인데, 이것이 다시 60개의 소부대로 나뉩니다. 그 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실제적인 전투나 작전은 백부장의 지휘와 책임 하에 수행됩니다. 요즘 군대로 치면 중대장에 해당되겠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 같은 시골 동네에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면 그 위세가 보통 당당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피지배민의 군중 지도자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부터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군대는 명령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입니다. 말하자면, 그 조직 속에서는 상관의 의도가 중시되는 반면 부하의 의견은 주목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군대조직의 문화가 아닙니다.

특히 점령군에게 있어서 피지배민의 존재는 멸시와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백부장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 보면 이 사람이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또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유대 장로들이 말합니다. 점령군이라는 우위에 있으면서도 피정복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유대교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본래 성품이 온유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인격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을 하는 것은 자기 하인을 위해서입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말 속에 그 하인을 위한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묻어나오지 않습니까? 명령체계와 상하조직 속의 사람이 자기 하인을 위해 이처럼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주목할 만하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유대교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아랫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했던 훌륭한 인격자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훌륭한 인격을 가졌고 마음이 착하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그 착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구원을 이룰 만큼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질은 좀 못됐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예수는 안 믿는 인간성 좋은 사람과 친구 할래, 아니면 인간성을 더럽지만 예수 믿는 사람과 친구 할래 하면, 저는 예수는 안 믿지만 인간성 좋은 사람과 친구 하고 싶습니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인간성 좋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지 오래 되고 믿음이 좋다 해도 그 본래의 인간성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험담하기 좋아하고 분쟁 일으키던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도 교회 안에서 험담하고 분쟁 일으킵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려도 땅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백부장의 요청에 예수님은 흔쾌히 가서 하인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그 백부장의 성품에 감동이 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습니다. 가서 하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시니까 백부장이 그렇게 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 부분에서 이 백부장과 의견이 다릅니다. 물론 백부장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제의에 춤을 추며 기뻐하고 잔치를 벌였던 삭개오의 반응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저는 삭개오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듭니다.

삭개오 역시 모든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고 사는 세리였습니다. 돈은 많았지만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괴로움을 가슴에 안고 있었습니다. 아마 나쁜 짓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습니다. 그런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겠다고 했을 때 삭개오는 기쁨과 감격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러한 삭개오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비록 자기가 그런 자격이 없는 줄은 알지만 예수님의 초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이 너무나 황송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하셨을 때 요한이 기겁을 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당신이 저에게 세례를 베푸셔야지 어떻게 제가 당신께 세례를 베푼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의 신발끈 묶을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너에게 세례를 베푸마.” 그러셨습니까? “잔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라. 우리가 이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요한은 아마도 벌벌 떨면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이 백부장처럼 황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배를 잠깐 빌린 대가로 시몬에게 고기를 엄청 많이 잡게 해 주셨을 때, 시몬 역시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시몬을 떠나셨습니까?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타시고 그를 부르신 것은 그가 죄인인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허물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로 삼으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이 백부장처럼 하나님을 어렵고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기보다 삭개오처럼 같이 모시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제가 깨지고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죄가 들어오고 난 후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사랑하고 친밀하게 대하는 아들의 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집에 찾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고 오시지 말라고, 그냥 멀리 계시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우해 주시는구나.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이렇게 우쭐하고 교만했다가는 어렵게 얻은 하나님의 초대장을 다시 뺏겨버릴 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매우 놀랐다는 것입니다. 비록 백부장이 예수님을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분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분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나도 내 상급자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고, 내 부하는 내 권위에 복종해서 내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하오니 당신이 가지신 권위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도 놀란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복종하고 권위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예수께서 누구보다도 큰 권세를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중풍병조차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백부장의 증언은 예수께서 온 우주의 왕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왕으로서 왕의 권능을 나타내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와 가장 잘 부합하는 믿음을 예수께서 만나게 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그렇게 오신 왕을 몰라보고 배척하는데, 이 이방인 백부장의 입에서 예수의 왕 되심이 증거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마음이 통했던 문둥병자, 예수께서 손을 대시며 만지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을 가진 이 백부장에게는 그 소원대로, 또 그의 믿음대로 리모트 컨트롤 방식으로 그 하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의사가 진찰을 하고 무슨 약을 처방하거나 다른 치료행위를 할 때 신뢰가 되고 안심을 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눈 앞에서 뭐가 일어나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는데, 이스라엘에 가면 선지자가 있어 자기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종을 보내서 하는 말이 요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을 하면 나을 것이로 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아만은 몹시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지가 나한테 와서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내 몸에 손을 얹어 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뭣이 어째? 나와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면서 가서 목욕이나 하라고?” 마찬가지로 백부장도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하인을 만져주셔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라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놀래킬 수 있을까요? 고집 센 것으로 하나님 놀래키지 말고, 말 안 듣는 것으로 놀래키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놀래켜 드릴 수 없을까요? 하나님을 놀래켜 드린다고 무슨 큰 사건을 터뜨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 백부장이 무슨 사건 터뜨려서 예수님 놀라신 게 아닙니다. 거짓말 하던 사람이 거짓말 안 하게 바뀌면 하나님 놀라실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늘 지각하던 사람은 조금만 열심 내면 하나님 놀래켜 드릴 수 있겠습니다. 성경책만 펴면 졸음이 쏟아지던 사람이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질 때, 하나님은 놀라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믿음의 열매가 맺힐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놀래켜 드리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