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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구자의 증언 (요 01: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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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높은 이상과 꿈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연상하게 됩니다. 일제시대 작곡된 조두남 씨의 선구자라는 가곡이 있는데 그 곡을 들을 때 마다 독립투사들의 의지, 기지, 나라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오해

신약에 보면 이런 선구자가 한 사람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구자로 이 세상에 온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선택되고 난 이후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선택됩니다. 그는 사람이 살기 싫어하는 광야에 거처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결국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고독하고 외롭고 인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리워합니다. ‘이런 사람처럼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그가 ‘위대한 설교자’라는 오해입니다. 그 시대에 세례 요한의 설교가 얼마나 충격적이고 영향력이 있었던지 그가 하는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이 살기 힘들어 하던 그 광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였고 ‘구약시대에 하늘의 불을 내리던 엘리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선지자일 것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충격과 깊은 영향력을 주는 설교를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는 당연합니다.

두 번째,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다’ 라는 오해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선지자였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까지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별명이 ‘세례 요한’이라는 것도 ‘그는 분명히 세례를 주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람이다’ 라고 하는 오해를 받을 만 합니다.

세 번째, 세례 요한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그는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개혁가였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그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헤롯왕의 부도덕과 비리에 대항하여 생명을 내걸고 정직하게 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틀린 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용감히 외치다가 목이 칼에 잘리어 은쟁반에 놓이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어느 시대의 인물보다 정의감에 불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합니다.
세례 요한의 삶을 우리가 이야기 할 때 그가 정말 위대한 설교자였고 세례를 주는 분이었고 사회 개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그렇게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설교를 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세례를 주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사회를 개혁하고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세상을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

그러면 세례 요한의 삶의 목적과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의 인생의 사명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자기 생애 전체를 던져서 증언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그의 목이 잘려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사회 정의나 설교가 아닌 ‘예수’ 였습니다.
설교준비를 위해 이 말씀을 묵상하던 중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직자이고 온누리교회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 입니다. 제가 온누리교회 목사라는 것도, 설교자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런데 ‘내 삶에 예수만 있는가?’ 라고 제 자신에게 물어보니 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제 주변에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 잘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의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교육가도 있습니다. 그가 교육가이고, 의사이고, 사업가라는 것은 좋은 크리스천 중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에 미친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지 예수에 미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에 미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지혜롭게 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고, 모든 사람이 볼 때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도 잘 믿는다’ 그저 이 정도 수준에서 자기 삶을 정리하고 삽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차이입니다.
제가 오늘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제 자신이 은혜받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 이 부분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에 미친 사람입니까? 잠을 자도, 밥을 먹어도, 꿈을 꿔도, 길을 걸어도, 누워도, 병들어도, 내가 건강해도, 실패해도, 성공해도, 살아도, 죽어도 내 몸안에는 오로지 예수만 있습니까?
일주일에 몇 번 정도 교회에 올 뿐이지 내 안에 예수가 정말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살이에 시달리고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두려움도, 포기도 없는 삶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단순한 사람입니다. 예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균형이 깨지거나 편협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영향력 없는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제 입을 통해 이 사람 이야기를 또 하고 있을 만큼 너무나 위대하고 값진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하게 산 사람이 없습니다.
선교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그 한 분을 위해서 문둥병자 사이에 들어가고, 남이 가지 않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 가서 자기 인생 전체를 투자합니다. 그 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자기 생애 전체와 가족까지도 포기합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에게서 발견한 것은 ‘예수’ 뿐이었습니다.
한때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던 이영도 목사의 글을 읽고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교단도, 교파도, 총회도, 노회도 인간관계도 없이 오직 예수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단이 있고 교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꾸 가려집니다.
하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엔 사랑에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미칩니다. 새벽에 눈 뜰때 부터 잠잘 때 까지 오직 돈 버는 데만 집중합니다. 예술이나 학문, 정치에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마약이나 폭력, 섹스에 미친 사람도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무엇에 미쳤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미친 사람은 겁이 없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하다가 그만 두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의 특징은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순교하는 사람이 제정신 입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목숨을 건지지 왜 순교합니까? 한 가지에 미쳐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직업, 재산, 지위, 자기가 계획한 미래, 이런 것을 가차없이 버립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평생 쌓아온 명예도 순식간에 버립니다. 이런 용기, 결단, 순수성, 믿음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사는 사람을 부러워 하고 존경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이 사람이 예수에 미친, 예수의 증인이 된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첫째 특징이 19절에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사람들은 “네가 누구냐?” 하고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 명함은 무엇입니까? 당신 직업은 무었입니까? 당신은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다가 앞으로 죽으면 어디로 갈 겁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삶에 대한 대답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있어야 가는 겁니다. 목적이 없이 가는 것을 가리켜 ‘방황’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가도 목적이 없는 사람은 열심히 방황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세례 요한에게서 발견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당신이 누구요’ 라고 말할 때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 말은 거짓되고 과장된, 사람들이 기대하는 자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이기를 바랬습니다. 그가 예수이기를 바라는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세례 요한에게 다가와 질문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첫 대답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위기는 ‘아니오’ 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적당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와 생각에 적당히 타협하고 ‘나는 이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혼돈이 옵니다. 갈등이 오고 섭섭함이 옵니다.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에게서 배울 것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라고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요즘 출판사가 베스트 셀러를 만들기 위해 책을 책방에 뿌린 후 다시 그 책을 집중적으로 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속아서 진짜 베스트 셀러인 줄 알고 사 봅니다. 그렇게 베스트 셀러는 만들어 집니다. 그렇게 스타가 만들어 집니다. 정치와 여론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그렇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자기가 아닌 것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용기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기득권, 명예, 조작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십시오.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요한은 대답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엘리야냐? 선지자냐?’라고 계속 질문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남들이 착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아니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세례 요한에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엘리야도 아니오, 선지자도 아니오.’

‘성경에 의하면...’

두 번째, 세례요한에게서 배우는 것은 23절에 나타납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러면 너는 누구냐? 너는 네 자신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느냐?’라는 질문에 세례 요한은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런 칭호를 붙여 주더군요’ 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런 외무고시를 패스했습니다. 나는 사법고시를 패스했습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자격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교수인데 ‘나는 교수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요한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라는 뜻으로 이사야의 이야기를 인용해서 말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두 번째 메시지는 당신을 정의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정의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당신에게 부여해준, 하나님이 부여해준 사명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만 주는 사람도 아니오,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오, 사회 개혁가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그에게 부여해준 별명대로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만나볼 수 있도록 높아진 것을 낮게 만들고 낮은 것을 높게 만들고 그의 길을 곧게 만드는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역할,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이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를 위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하던, 어디에 있던 건강하던, 병들던, 가난하던, 부유하던, 유명하던, 무명하던 예수를 보여주는 삶이길 축원합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 성경에 말하는 대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요한 복음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례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을 보자마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만 바라보는 삶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겁니다.
“제 직업은 하나입니다. 목사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제 삶은 선교사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제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라는 겁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분이 세례 요한입니다.
30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그 분은 나보다 앞선 분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예수는 누구입니까? 32절에 보면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분이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성령 세례를 베푸는 분이시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이것이 요한이 본 예수입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었다. 그분에게 성령이 임하신 분이었다. 그 분이야 말로 불로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이 분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을 통하여 이런 놀라운 삶의 원리와 철학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던, 무슨 직장을 갖던, ‘그 분은 예수를 위한 사람이었다. 예수만 있었던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듣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 사람은 위대한 교육가였다. 이 사람은 위대한 사업가였다.’ 그렇게 말을 듣는 것 하고 ‘이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었다.’하는 것과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 두 말을 동시에 다 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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