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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지 못하는 은혜 (마 06:2-4, 고전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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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은혜(마 6:2-4; 고전 14:20)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다 알아야만 잘나고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인 줄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도적질만 배우지 말고 다 배워라'는 속담까지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유익하고 은혜로울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알지 못하는 은혜라'는 제목을 가지고서 피차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알지 못하는 은혜에는 무엇 무엇이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셌습니다.
먼저 읽어드린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며 영광과 칭찬만을 받으려고 하는 가증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분하게 여기시고 책망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교훈은 곧 내가 남을 구제하거나 어떤 선을 행하였을 때에 너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선을 행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아는 것보다 모르고 지나는 것이 휠씬 나에게도 유익이요, 은혜와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생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내가 행한 선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기억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선행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은 어떤 때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평이나 공치사를 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위선자가 되어서 남이 보는 데서만 착한 체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남에게 자기의 선행을 보이기 위해서 생활하는 사람은 마치 흙이 얕은 돌작밭에 떨어진 씨가 쉽게 싹은 났지만 햇빛이 비치면 곧 시들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튼튼한 식물은 보이는 잎사귀도 무성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더 튼튼하고 많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비결과 원리를 모르고서 자신의 뿌리까지 드러내어서 보이려고 하면 그 식물은 끝장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 3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려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 그는 누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그의 생명이 15년이나 더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감사하기도 하였지만 기분이 좋고 신이 났습니다. 그 때에 이웃 바벨론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사절단들이 축하 예물을 가지고 문안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히스기야 왕은 너무 너무 기분이 좋고 의기양양해서 그 사절단들에게 보여서는 아니될 금고와 무기창고까지 다 보여 주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보물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고 하셨는데 그 후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체험이 많을수록 또 자기의 선행이 많아도 자중하고 조심하면서 아는 듯 모르는 듯 지나야 하는데 이 히스기야 왕은 너무나 자기 도취에 빠져서 이방인에게까지 다 드러내 놓은 '노출죄'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행이나 장점을 너무 의식하거나 기억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은혜받은 것은 물에 새기고 남에게 은혜를 끼친 것은 돌에 새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생활 자세는 남의 은혜와 선행은 깊이 새겨두고 알아주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나 자신의 선행은 알지 않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들은 극히 적은 선행을 행하고도 보다 크고 풍성한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할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2. 자기의 가치를 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가치 평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소 평가를 해도 해로울 때가 있지만 지나치게 과대 평가를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어떤 가치라던가 미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너무 과대 평가하거나 과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두번째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모세의 훌륭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두번째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하며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듣다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오는데 너무나도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반사되어 비치므로 광채가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도 감히 모세의 얼굴을 쳐다 보지도 못할 정도까지 되었지만 모세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자신이 받은 많은 은혜는 모르고 자신이 행한 적은 선행이 있기만 하면 굉장한 것처럼 과시할 적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도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 귀한 그릇이 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가치를 부인하고 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나 보배를 담은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야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더욱 귀한 그릇으로 들어 쓰신다는 진리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독교가 바울의 종교가 아니냐? 할 정도로 위대한 사도요 또 갖가지 신비한 체험과 능력을 소유한 그였지만 그는 언제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도 했고 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히 자기의 가치를 부인하고 조금도 자기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 하며 영광을 돌린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과시는 실패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가치와 인격의 광채를 너무 의식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고 교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생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던지, 누구에게 선을 행하던지, 자기를 부인하고 언제나 '나는 깨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이요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지 못한 자'라는 의식 속에 살면서 혹시 칭찬을 받던지 영광을 받게 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돌리는 귀한 신앙 생활의 자세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살런지 몰라도 주님을 떠난 이 생명은 도저히 살 수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중심의 울부짖음이 있어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같이 하시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잠언 11장 2절에도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어떤 훌륭한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욕을 듣게 되고 멸시와 수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것 같아도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임택진 목사님 '멀고도 어려운 길'이라는 수상집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어떤 교양있는 신사 한 분이 젊은 목사님댁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은 안 계시고 젊은 사모님이 전화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사는 사모님에게 부탁을 하면서 '혹시 전화 받으시는 분이 목사님 부인이시면 이 말씀을 전해 주십시요'라고 했더니 대뜸 앙칼진 음성으로 '예? 목사님 부인이냐구요? 부인이 뭐예요? 말씀을 좀 바로 하세요!'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부인이라고 했다고 불쾌해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신사는 계속해서 '여보세요! 목사님 부인을 부인이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하고 되물으니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그것도 모르세요?'하는 말에 이 신사는 너무 어이 없어서 전화를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사모님은 부인이라는 말이 아주 낮춤말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혹 그 이하의 어떤 낮춤말로 '당신이 목사 여편네요?' 하더라도 '예! 제가 목사 여편네입니다'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실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홀던 나다니엘(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작품에 보면 어느 시골 한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뒷산에는 멀리서 보면 산 봉우리와 바위들이 모여서 있는 모습이 꼭 인자하고 위대한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보여지곤 해서 그 마을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분명히 언제인가는 이 골짜기에 저 큰 바위 얼굴 같이 인자하고도 위엄이 있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해서 많은 세월을 두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어네스트(Ernest)라는 소년이 있었는 데 그는 어릴적부터 매일같이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물끄러미 그 큰 바위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이 마을에 언제나 저런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까 기다리곤 했는데 하루는 게더골드라는 백만장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 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를 환영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인색하고 못된 사나이임을 알게 되자 모두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으나 다 똑같이 실망을 던져 주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소년 어네스트도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도자가 되어 그 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네스트가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어네스트야말로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지 않느냐?'고 외치자 수많은 사람들은 석양 노을에 비낀 큰 바위 얼굴의 모습과 어네스트의 그 인자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비교할 때에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그제서야 그 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전설이 이루어졌다고 환호성을 치면서 이 어네스트를 존경하며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네스트는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인자하고 착한 사람이 저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쉬 나타나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남이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을 생각하려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의 생애를 한번 보십시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동등된 것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며 낮아지셨습니다. 또 주와, 선생이 되었어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러한 주님을 믿노라고 하는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 혹은 과대 평가하려고 할 적이 많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 고린도후서 3장 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앞으로 생활 자세는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거나 과시하지 마시고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죄는 지을 줄 모르는 것이 은혜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괜히 예수를 일찍 믿었다고 후회하면서 하는 말이 세상에서 온갖 죄를 다 지어 보고 방탕도 해보고 믿었더라면 후회도 없고 더 멋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지어 본 사람은 또 지을 가능성이 많고 아무리 철저히 회개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나 그 죄의 흠자리는 남는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과나 배같은 과일도 흠이 생긴 것이 더 달기는 달고 맛은 있으나 상품의 가치는 떨어지고 또 귀한 손님 상에는 놓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알고 지은 죄는 용서받지만 반드시 징계는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서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해 오신 분 계십니까? 죄는 아예 지을 줄 모르는 편이 더 은혜롭고 축복임을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도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편 l편 1절에도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죄를 지을 줄 모르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과 생활 자세가 복된 삶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때때로 밀려 오는 어떤 죄악의 세력도 끊고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늘 말씀드린 대로 알지 못하는 은혜의 생활이 계속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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