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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받은 사람들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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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사람들(마 22:1-14)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어떻게 우리를 맞이하실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도어맨이 되어 맞이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주문을 열어 주시면서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렸습니다’하고 반겨주실 것 같습니다. 환영받는 자리에 가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환영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반면에 환영받지 못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요즘 사회는 핵가족 문화가 발달하면서 많은 가정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가족 붕괴 현상은 어른들이 있을 자리, 환영받을 자리를 점점 줄어들게 합니다.
최근 IT산업 발달로 40, 50대에 편중되었던 부가 20, 30대로 옮겨가면서 기성세대들은 더 크게 소외감과 허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모이기만 하면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의논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해도 어른들의 자리를 지켜 드리는 것은 젊은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적자생존의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뺏어야 성공하고 출세하는 게 사회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천국을 완성하시고 즐기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일구신 천국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천국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십니다. 초대받지 못한 자리, 합당치 못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어렵지만, 정성껏 준비하고 초대했는데 거절 받는 심정은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천국을 준비하고 사람들로 초대했지만 거절당해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이 말씀에서 천국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천국은 왕국입니다.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왕국’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건설 중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완성하시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둘째, 천국은 마치 혼인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매 처음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아직 주님은 사역의 때가 되지 않았지만,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는 마리아의 부탁을 듣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베푸셔서 즐거운 잔치를 계속 이어 가게 하셨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배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천국 축제는 아름답고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습니다. 천국은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영역에 있지 않고 통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심령에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초청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혼인잔치에 손님을 두 번 초청합니다. 먼저 잔치를 준비하기 전에 초청장을 보냅니다. 처음 초청장을 받았을 때 여러 가지 개인 사정을 고려해 응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은 잔치에 오겠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수에 맞춰 음식, 예복, 침실을 마련하고 잔치를 준비합니다.
혼인잔치가 시작되면 두 번째 초청장을 보냅니다. 사람을 보내어 ‘잔치가 준비되었으니 오십시오’하고 전합니다. 만일 두 번째 초청에서 참석하기로 이미 약속했던 사람이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면 마치 주인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주인의 체면과 사회적 지위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차선은 최선의 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국의 초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어, 때가 되면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를 탄생케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준비된 천국으로 두 번째 초청장을 보내신 것입니다. 두 번째 초청장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자기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고, 천국에 합당치 않으며, 자신의 자리를 잘 못 찾은 백성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차선을 선택함으로써 최선을 잃어버린 민족’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그들이 돌아 보지 않은 것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쁜 의미로 돌아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들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도덕적 인격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재미있고 그 일에 빠져서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바빠서 잔치에 가지 않는 사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
서점에서 이만재 집사님이 쓴 책 <교회에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를 샀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입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많이 힘듭니다. 휴일에 늦잠도 자고 비디오도 보며, 친구들도 만나고 싶습니다. 친척들을 찾아 인사도 드려야 하고 산으로 들로 나가 레저 생활도 즐기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열심히 생활하면서 자투리 시간이나 휴일을 이용해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하는 게 나쁜 일이 아니라 한가롭게 교회에 갈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180도로 뒤집어 보면 우리는 한가해서 교회에 와 있는 것이 됩니다. 시간이나 정신적 여유가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가야 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사는 사람일 수록 시간을 잘 활용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는 사람은 성공을 위한 야망을 갖고 있을지라도, 인생이 끝난 뒤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잔치에 응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양보다 질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뭔가를 놓칠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사는 방식과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어느 농부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만일 소가 웅덩이에 빠졌다면 건지시겠습니까 교회에 가시겠습니까?” 그레함 목사님은 ”물론 소를 건져야지죠. 그러나 그 소가 매주 웅덩이에 빠진다면 당장 팔아치워야 합니다.”
서양 속담에 ‘차선은 최고의 적이다’는 게 있습니다. 장사, 비즈니스, 볼일 등은 당연히 해야 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 때문에 최고의 일, 영원의 일을 놓쳐 버린다면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상으로 중요한 일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일로 보이지 않는 중요한 일을 망각한다면 비극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완악한 마음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대항하기까지 합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천국잔치 초대에 거절하고 대항하는 이들이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을 예언적으로 선포하십니다. 23장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율법의 자리입니다. 곧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착취하여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챙깁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결코 복음을 영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 예수의 초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초청에 응하기 위해 나의 스케줄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나의 생각과 주장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나의 것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주님의 것을 대적하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숨긴 것을 드러내는 예수님에 대해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군대를 보내어 살인한 자를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열방 향해 열린 전도의 문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습니다. 참는 것은 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래 참음의 끝은 심판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모든 열방과 만방을 향해 열어 놓고 계십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길 거리로 나가서 아무 사람이나 데려 오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곧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종들이 길거리로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사람마다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기 어려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착하고 선해서 법 없이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전도하면 ‘너나 똑바로 하고 살아라’고 합니다. 천국은 행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면 베드로가 하루에 3천명을 회개시킨 것처럼 어떤 사람이든 전도할 수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합니다.
또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은 원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켰다면 나의 원수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정말 험악한 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존 뉴톤이라는 목사님입니다. 그 분은 노예 상인이었다가 40대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모든 죄인을 다 용서했다고 하시지만 자신과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가끔 포악하게 굴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온 몸을 떨면서 긴장했습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이사야서 43장 4절 말씀을 벽에 붙여놓고 읽었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을 구원한 것은 오직 은혜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미친 것도 오직 십자가의 공로라는 것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뉴톤 목사님이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시며 유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세 번 놀랄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보이는 것이요, 다음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보리라 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존 뉴톤이라는 잔악한 노예 상인이 천국에 있다는 것 때문이다.”

옛사람 벗고 ‘새사람 입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거룩한 옷을 입혀 주시며 천국에서 아름답고 복된 삶을 누리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는 천국의 삶을 영원까지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국에 합당치 않은 영혼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곧 임금이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오면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 예복을 입혀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잔치 중에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옛 습성대로, 익숙한 대로, 고집대로 잔치를 누리겠다는 내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런 사람을 지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천국의 소유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옛 생활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와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내어쫓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공짜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야 가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그 은혜, 사랑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주님께 보답할 것은 주의 말씀과 믿음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날마다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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