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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감히 결단하고 행동하십시오 (마 0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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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학 1년 후배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한 여자 집사님과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분 마음속에 있었던 과거에 상처받은 얘기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분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기독교 동아리를 통해서 알게 된 같은 학년의 한 남학생과 5년간 연인 사이로 지내면서 학교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다정한 사이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자매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절교편지가 왔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고 '왜 그러느냐?'고 이유도 묻지 않고 자신도 절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때 '남자가 그 사람뿐인가?'하는 생각으로 자존심이 상해 자기도 절교 편지를 보냈지만 그 편지를 보내고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헤어져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헤어진지 16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때 헤어져야 했던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헤어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 둘의 헤어짐은 더욱 그렇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둘은 5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공원 벤치에서, 기숙사 앞에서, 학교의 조용한 곳에서 밤늦게까지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지만 그들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 자매였기 때문에
서로의 선을 지키느라고 5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한번도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그 둘이 결혼했다면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어색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정신적인 교감의 강도가 너무 강하면 육체적인 교감은 죄스럽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부간의 성격 차이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정신적인 교감의 둑이 무너지면 그 둘 사이를 받쳐주던 정신적 관계가 깨지면서 오히려 더 쉽게 불행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불행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서 더 좋은 지금 남편을 주신 것으로 알라고 했습니다.
가끔 보면 신앙이 깊다는 분들 중에 부부생활을 경건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은 무조건 선하고 육신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라 이단들이 좋아하는 플라톤 사상에 근거한 이원론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후 그 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4-25)
건전한 정신적 생활과 건전한 육신적 생활을 다 중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입니다. 육신이 나쁜 것이 아님을 알려준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예수님의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이라는 진리를 기독교에서 그토록 중요한 진리로 생각하는 이유는 이원론으로 인해 기독교의 진리가 훼손되고 공동체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박한 영성과 진실한 영성 >
가끔 영성을 주장하면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을 지나치게 나누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대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다 어디에 가든지 사람을 나눕니다.
그런 분들은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잘 나눠야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을 나눕니다. 가정을 망가지게 해야 십자가를 잘 지는 것인 줄 압니다.
그렇게 나눔을 통해 나의 영성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천박한 영성에서 생기는 태도입니다. 진짜 깊은 영성은 창녀 마리아에게도 손을 내밀었던 예수님의 영성을 따르는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은 무조건 깨끗하고 육신은 무조건 더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육신적인 삶은 영혼의 건강을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천박한 영성을 분별하여 그런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박한 영성이 무엇입니까?
'믿습니다'고 하는 믿음이 지나쳐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키우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교회생활은 재밌게 하면서 가정에서는 남편과 자녀를 쫄쫄 굶기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항상 산에 들어가 기도해야 기도발이 먹히고 기도하는 것 같다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주일에 '운전기사 일하게 하는 죄'를 짓지 않게 버스를 안타겠다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추석에 전혀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내 신앙을 증명하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가족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을 외면하고 교회 생활 잘하지 말고 남편도 챙기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피곤해도 남편이 요구하면 응해주고, 아내가 요구하면 응해주라고 말합니다(고전 7:4).
요새 우리 교인들 중에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며 여러 작전을 세우는 분들이 있는데 그처럼 귀찮고 힘들어도 같이 천국 가자고 하며 끊임없이 세속에 구원을 줄을 던지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라 사는 길이고,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은 '세상과 단절하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껴안고 세상을 환한 세상으로 만드는 존재가 되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어떤 마음으로 따라야 할지를 잘 교훈하고 있습니다.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주님은 어떤 결정을 내리십니까?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군중으로부터 영광 받기보다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군중에게서 떨어져야 비로소 내 안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도 진리로 활활 타오를 수 있어야 그것이 진짜 진리를 가진 자의 자세입니다.
어떤 청년은 큰 공동체에서는 신앙이 있는 것 같은데 조그만 공동체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그것은 사실 보면 주님을 쫓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서 쫓아다닌 것입니다.
때로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봉사도 조용히 하고, 헌신도 조용히 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낼 때 한 서기관이 나와 말합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말이 예수님에게 진정한 말로 들렸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처음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 즉 주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호칭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아는 것'과 '나의 주님으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지 않고 선생님으로 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형통한 때는 제자인 척 하다가 어려운 때는 훌쩍 떠나가 버릴 사람들입니다. 그런 신앙은 주님 중심적인 신앙, 교회 중심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그런 모습이 있음을 보시고 주님이 서기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는 길은 화려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후퇴하겠지만 제자는 그때 주님을 더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서기관의 진정한 마음을 확인하고자 영광의 길보다 십자가의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도 가끔 설교에서 희생과 헌신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에서 희생과 헌신이 빠지면 그 신앙은 기복주의요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위로와 평강과 축복의 말씀도 있지만 십자가에 관한 말씀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전하면 '아! 나를 위한 말씀이구나! 더 헌신해야지'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런 말씀을 하면 '아! 부담되네!' 하고 부담 없는 교회로 가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떤 분은 '부담되는 말씀을 하네'하고 수군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때로는 부담되는 말씀도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불행을 막는 길인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부담이 없으면 좋은 것 같지만 십자가의 부담이 없으면 부활의 축복도 없습니다. 진정 축복을 원하면 십자가의 부담도 지려고 해야 그 신앙이 진짜 천국 신앙이 될 것입니다.
친구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버릴 때에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참된 친구입니다. 제자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떠날 때에 주님의 길로 가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마십시오 >
사실 믿음생활에서 희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 희생의 순간에 후퇴하면 안됩니다. 믿음은 반드시 이기기에 어떤 손해가 와도 믿음을 지킬 때 승리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앞으로 있게 될 더 큰 불행과 더 큰 손해를 막는 길입니다. 땅에서 손해를 봐도 하나님만 굳게 붙잡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어렸을 때 남미로 이민 갔다가 다시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간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뉴욕에서 한 유대인 회사에 취직했는데 사장님이 처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내가 결정해서 내가 시키고, 내가 평가하고, 내가 검토해서 하니까 일절 '노'라는 말은 하지 말고 너는 언제나 '예스'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열심히 순종해서 사장에게 사랑 받고 쓰임 받고 승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장이 주일을 범해야 되는 일을 시켰습니다. 십여 년 동안 사장 말대로 순종하다가 이분이 처음으로 그 일에 대해 '노'를 했습니다.
'사장님! 이 일만은 안됩니다. 저는 오늘 교회 가야됩니다.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분이 원자탄을 맞은 듯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고 이제까지 감히 이런 말은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장 말에 불순종하는 것은 자기 생명과 신변과 가정과 운명이 다 달린 일인데 그 높은 곳까지 승진해서 '노' 하는 것을 보고 사장님이 어이없어서 말했습니다.
'야! 나도 하나님 믿고 너도 하나님 믿는데 뭘 그러냐, 내 말대로 해도 괜찮다.'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주일을 지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분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분의 목을 자르지 않고 오히려 자기 회사 전체를 물려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더 아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처럼 돈보다 믿음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진짜 보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항상 잘 열리는 것이 아니고 때로 믿음을 가로막는 바위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전진하면 반드시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조금 어렵다고 그때 뒤로 물러서고 변명하면 그런 사람은 별 볼 일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은 제자로 삼을 수 없기에 주님은 서기관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묻어버리십시오 >
그런데 서기관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주님을 따르는 제자 중 하나가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에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그가 말합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 말을 듣고 주님은 죽은 자를 죽은 자끼리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오해해서 주님은 가정과 가족을 중시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장사하는 것을 외면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십자가 얘기를 듣고 제자라고 따르던 사람 중 한 사람도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서 '주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겠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읽고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십자가를 피하려고 여기에서 후퇴하면 너도 결국 죽은 자가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말씀이 전해주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과거의 상처가 있어도 다 잊어버리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 가장 큰 상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내 곁을 떠나는 상처입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살 얘기가 가끔 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순식간에 건물에 깔려 고통 중에 죽었다니 그 아픔은 너무 클 것입니다.
어떤 변호사는 세 딸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픔이 크겠습니까? 씨랜드 사건에서 아이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생각하면 부모들의 가슴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은 이제는 잊어야 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잠잘 때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잠자듯이 죽을 때에도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죽음에 이릅니다.
그처럼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기에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믿지 않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슬픈 상처가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 믿지 않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처가 없도록 우리는 빨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님 믿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초월해야 합니다. 지옥에 가지 않을 준비만 하면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상처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처도 극복할 수 있다면 살아서 받는 상처 정도야 충분히 극복해야 합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더 이상 그 과거가 우리에게 아픔을 주도록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겉은 멀쩡한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친구로부터 받은 상처, 환경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처와 환경들은 나를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도구이지 원망의 수단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고,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 못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 환경이 어떠냐'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우리 반응이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내한한 복음성가 가수 레나 마리아는 두 팔이 없었고, 다리 한쪽도 반밖에 없었지만 장애인 올림픽 수영에서 금메달을 둘이나 땄고 천상의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 환경을 유익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의 형편을 잊어버리십시오 >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자기'입니다. 자기 형편을 잊어야 합니다. 특히 자기 기분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가지고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군대에서 그날 모든 상벌을 좌우하는 가장 큰 기준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참의 기분입니다. 군대에서 아침 점호를 하면 중대원들이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은 중대장의 얼굴입니다.
중대장 얼굴을 보니까 어제 애인하고 싸운 얼굴입니다. 그러면 죽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가정에서 그날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가장 큰 기준은 아버지의 감정입니다.
집에 들어오시는데 아버지가 기분 나쁜 표정인 것 같으면 얼른 독서실로 도망가야 합니다.
그러나 내게 기분 나쁜 일이 있다고 해도 내 주위의 사람들이 관련이 없으면 내 주위의 그들에게 기분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믿음의 능력이란 나쁜 것을 끊을 줄 아는 능력도 있어야 하고, 남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줄 아는 능력도 있어야 참된 믿음의 능력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나쁜 것에 물들지 않고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태도가 많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면 로맨스라고 하고, 남이 사랑하면 불륜이라고 합니다.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와 신앙생활의 틀이 비슷하면 동지로 삼고, 신앙생활의 틀이 다르면 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교단끼리 미워하고, 교회끼리 미워하고, 성도끼리 미워하면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여러분! 다른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해해주십시오. 담배 핀다고 엉터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담배 피는 것과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담배 피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담배 핀다고 해서 큰 죄를 저지르는 것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은 아주 심한 골초였다고 합니다. 사실 담배 피는 것이 안좋다는 인식 때문에 담배 피는 사람이 교회생활을 더 못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담배가 마약과 같은 해로운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보기에 담배를 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지 담배를 가지고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담배 안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담배 피는 사람보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을 더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면 항상 주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판단하는 모습이 있지 않나 주의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자세가 은혜 받는 자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을 내가 못 받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겠습니까? 천국에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성결교인, 순복음교인, 침례교인이 다 모여 살 것입니다. 그러한 천국 삶을 이 땅에서 연습하기 위해서 산다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기준, 자기 감정대로 살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살려면 역시 겸손해야 합니다. 시편 10편 17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겸손하지 못해 사납게 여기 저기 싸우는 사람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짐승도 사나운 짐승은 모든 동물들이 피하니까 혼자 산악지대에서 외롭게 다니다 죽습니다. 그러나 온순한 짐승은 주인과 함께 집에서 편하게 주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삽니다.
한국 사람들은 서열을 따지기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과감히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십시오 >
그처럼 겸손히 자기를 잊고 정리할 것은 과감히 정리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을 바꾸고, 생활 습관을 바꾸고, 필요하다면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도 바꾸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과감히 결단하고 말하고 행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행동의 모범을 보여주면 저절로 전도가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좋은 행동을 보면 '훌륭하다!' 하고 거기에서 끝나고 주님 앞으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말로 적극적으로 권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감히 그의 팔을 붙들고 교회로 와야 합니다. '내가 완벽할 때까지 수양했다가 그 다음에 남편을 감동시켜 나오게 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좋아 보이면 얼마나 좋아 보이겠습니까?
내 행동이 부족해도 말로 전도하고 과감히 남편의 손을 붙들고 교회로 이끌고 나와야 합니다. 혼자만 잘 믿는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가족들이 잘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들이 다 믿을 수 있도록 지혜를 짜내고, 노력하고, 가족 이벤트를 만들고 애써야 합니다.
주님은 가정을 소중히 여기셨기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가정도 소중히 여길 것이고 그렇게 진심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반드시 가정도 회복되고 모든 상처가 아물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가장 첫 번째 순위로 두어야 할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버릴 것은 버리고 과감히 주님을 좇을 때 그 버린 것의 몇 배를 보상하실 것입니다.
사랑도 주님과의 관계를 제일 우선 순위에 두고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항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좇으심으로 주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얻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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