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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에 대한 경고 (마 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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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에 대한 경고(마 10:16-23)

‘예수님의 길’ 택한 제자에게 다가오는 핍박
‘핍박’에서 자유하십시오. 의의 핍박은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끕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당하는 핍박은 새 생명을 얻기 위한 산고이며 삶을 거룩하게 하는 ‘사랑의 채찍’이기도 합니다.

12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고통 당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 속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정도 내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인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어지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히 순종할 때 주님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의 영적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가 가득한 곳이지만,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에서 믿음의 앞날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 땅은 장밋빛이 아니었습니다. 가난과 편견, 억압과 투쟁, 분파와 분리로 가득한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왜 많은 선교사들은 이 땅에서 어둠, 가난, 두려움을 보고서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이 땅에 보내셨기에 온 것입니다.
핍박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대가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환난과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핍박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16-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넓은 길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좁은 길입니다. 주님께서 믿는 사람을 ‘양’으로, 세상 사람을 ‘이리’로 비유하셨습니다. 양과 이리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양은 이리의 먹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양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리다. 고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같이, 주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싸울 것이 아니라, 영혼을 얻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문제는 누가 원수이고 친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에게나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전도합니다. 전도란 잃어버린 생각, 상실된 기억을 되찾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사고나 충격으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봅니다. 아버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아들을 데리고 기억을 회복하도록 태어난 곳에도 데려가고 함께 놀던 놀이터에도 찾아갑니다. 이와 같이 전도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되찾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데려가 주님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 그러나 그 영혼을 찾는 데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누군가 대신 값을 치러야 합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핍박’입니다. 핍박은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의로운 삶을 선택했기에 짊어져야 하는 짐과 같은 것입니다.

핍박을 수용하신 예수님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아갔을 때 그로 인해 갈등하고 좌절하며 고난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처럼 반응하면 안됩니다. 나와 함께 고난의 자리에 오신 주님의 방법대로 핍박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기지 않으셨습니다. 핍박을 받아들임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핍박하는 자들과 갈라서지 않았습니다. 모든 핍박을 받으심으로써 핍박하는 자의 편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편이 아닌 사람의 편에 섰습니다. 의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죄인의 편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핍박의 무게는 곧 죄의 무게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의 죄 값을 감당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모든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사야서 53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기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모든 고난의 무게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듣는 사람들은 자기 죄의 무게만큼 우리를 핍박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냥 세워지지 않고 핍박 가운데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자라는 것은 쉽지만, 처음에 탄생시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기 존재를 소멸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과 관리 능력
우리는 고난의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구원하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강준민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 ‘비전과 존재 혁명’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쳐오면 즐거이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보다 중요한 것이 고난에 대한 해석과 반응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고난을 관리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고난을 통해 얻은 성경의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성도를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고난은 결코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는 것이 믿음이요, 삶의 지혜입니다.

둘째, 고난을 스승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고 교훈을 줍니다.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비밀이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때 힘을 발휘하듯이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깨달아질 때, 고난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을 변화와 성숙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사람은 고난을 변화의 도구로 삼을 때 성숙해집니다. 조지 폭스는 ‘마귀도 병에 걸리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고난은 마귀도 변화시키는 강한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넷째, 고난은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영혼에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맡기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내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고난은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중에 이뤄 갑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피할 수 없는 핍박이라면 차라리 끌어안고 사랑으로 정복하십시오. 핍박은 우리를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룩과 순결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루마니아의 가장 큰 침례 교회에서 시무했던 조셉 톤 목사님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 공산 정권은 톤 목사님을 잡아다 처형하고 싶었지만, 세계의 여론이 무서워 어쩌지 못하고 국외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톤 목사님은 미국에 오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 분은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신학은 무엇입니까?”그때마다 목사님은 항상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 없습니다. ‘순교 신학’입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 없습니다. ‘순교 신앙’입니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의 조짐을 보일 때, 미국의 한 기자가 톤 목사님을 찾아와 “동구권이 개방되는 소감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톤 목사님은 “참 두렵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동구권이 개방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 데요.”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지만 그럴수록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길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산 정권이 해체된 후 고국에 돌아갔을 때 핍박을 은혜로 모르는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가득 찰 게 두렵습니다.”
의의 핍박은 우리를 강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끕니다. 성도가 복음을 위해 당하는 핍박은 새생명을 전도하는 산고이며, 우리 삶을 거룩과 순결로 이끄는 사랑의 채찍이기도 합니다. 혹시 핍박을 당한다면 핍박에서 자유 하십시오.

불필요한 핍박에 대응하는 지혜
권투 경기에서 KO 패는 계속 날아오는 잽을 맞고 누적된 상태에서 결정타를 맞았을 때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유익한 것이라 해도, 계속 이어지면 사람은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계속되는 핍박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무작정 핍박을 당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불필요한 핍박은 무익한 것이기에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싸워서 얻어야 할 승리가 있다면, 피해서 얻어야 할 승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핍박에 대처하는 다섯 가지 지침을 주십니다.

하나,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분별해서 피할 것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둘, 사람을 삼가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만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욕망에 차있는 사람들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셋, “핍박받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변호할 말을 주십니다. 넷째, 핍박에 지지말고 인내하여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지침은 23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주님께서 “이 동네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3절 말씀은 오랫동안 핍박으로 살아가야 하는 특수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류사에서 유대인들만큼 박해를 많이 받은 민족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어떤 박해도 받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늘 순교할 것을 교육하는 민족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초대 교회가 탄생하고 제자들이 세상으로 흩어짐을 당합니다. 그들 중에는 복음 전파가 아니라 순교가 목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분별 없이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23절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한 유대인이 로마 군인에게 붙잡혔습니다. 로마 군인은 유대인에게 돼지고기를 던져주고 욕하며 먹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럴 때 유대 랍비 교훈집은 “하나님의 법은 생명을 위해 주어졌지 죽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치라면 먹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사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역사에서, 신앙에서 메시아를 경험했고 메시아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까지 던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해라. 복음을 위해 고통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만, 불필요한 고통을 받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때로 우리는 위험에 직면하고 도전하는 것보다 위험을 피해하는 것이 더 바른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직면해야 할 고난과 피해야 할 고난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왕새우의 새 갑옷 입기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 참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은 영국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때 윈스턴 처칠은 “여러분, 왕새우(영국군 애칭)를 아십니까? 왕새우는 바다의 왕자입니다. 그는 강한 갑옷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왕새우는 갑옷을 벗습니다. 바위틈으로 가서 갑옷을 벗고 새 갑옷이 몸을 감싸 단단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갑옷이 갖춰지면 밖으로 나가 투쟁해 다시 왕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잘못된 정치가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바위틈에서 새 갑옷을 갖추는 때입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때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보다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후퇴하는 것이 공격하는 것보다 용감한 때가 있습니다. 핍박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한 영혼, 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때로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물러서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일어날 때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환난, 두려움, 핍박, 곤고, 아픔이 닥쳐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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