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다 (마 06:9-13)

첨부 1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때, 나를 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나를포기하면 형제와 자매가 보입니다.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하나님의 선한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 모든 필요 채우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성도의 삶 아름답게 하실 하나님 신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해야

오래 전에 미국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전도 집회가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어떤 성도에게 대표 기도를 시킬까 고민하다가 지역 사회에서 저명한 학자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흔쾌히 허락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동원해 아름답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기도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
다음날 아침 보스턴 모 일간지에 그의 기도에 관해 대서특필했습니다. “보스턴이 생긴 이래 이처럼 존엄하고 귀중한 기도문은 없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보스턴 청중에게 바쳐진 것이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의 기도를 합니다. 진정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기도문도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내용이 없는 죽은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요, 살아있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애독한 <야베스의 기도>란 책에서 야베스는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을 면케 하여 주소서.”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엄청난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종점형, 부적형, 냉수 사발형의 죽은 기도
기도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죽은 기도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종점형 기도’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음부터 주님과 의논하고 기도하면서 풀어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습니다. 돈, 권력, 학연, 지연을 동원하고 아는 사람을 중간에 놓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모두 거친 후에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종점에 도착한 버스는 더 이상 출발하지 않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란 나의 일,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시간과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기도는 종점형 기도입니다.
둘째, ‘부적형 기도’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벌입니다. 그런 다음에 혹시 나쁜 일이 생길까봐 염려되어 장시간 기도 포장을 해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안 될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겉모습이 아닌 동기를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처럼 만사 형통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기도의 진정한 효능은 겉모양에 있는 게 아니라 동기의 순수함에 있습니다.
셋째, ‘냉수 사발형 기도’입니다. 이것은 주문 외우듯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에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복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이 반복해도 마음을 담으면 진실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에 대해 세 번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음이 담긴 언어가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기도는 말, 마음에 손과 발이 함께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는 노동이다. 노동은 기도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역사 하는 기도, 활동하는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을 담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생각하면서 주기도문을 보겠습니다. 9-1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은 짧지만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세 개의 간구에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현재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과거의 문제에 대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않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다가올 미래에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인도자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문제는 성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과거의 문제는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를 구하며, 미래의 일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할 뿐 아니라 간절하게 임재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배우지만 충분히 뜻을 알려면 평생이 걸리며 응답 받으려면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이 복음의 전부요, 주님 교훈의 전부요, 그분의 생활 법칙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중심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대단히 유익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개념에는 두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아버지는 양육하고 보호하며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살아 계신 분이요, 우리를 인격으로 대하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치료하시고 외로워할 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악한 일을 했을 때 채찍을 드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설명할 때 불행한 소녀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한 소녀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아 착하고 신실한 후견인에게 맡겨집니다. 소녀는 성장해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서기관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소녀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하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후견인이 다가가 소녀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말해야지”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이제까지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낳기만 했다고 아버지인가요? 나는 지금까지 아플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따뜻하게 나를 돕고 인도하신 당신을 내 아버지로 믿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을 때 당신의 이름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랍비들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아니다. 애굽에서, 죄악된 곳에서, 외로움에서 구원하시고 신실하게 이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언젠가 우리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아버지는 한계를 가졌고 무력하며 자신의 존재조차 지킬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를 아들로 삼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십자가에서 버리시고, 해산의 고통과 수고와 양자됨의 대가를 치르신 하나님이 바로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함을 나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부르시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라 말씀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고백에는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나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나를 포기하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나의 필요가 아닌 우리의 필요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모든 필요를 아시기에 모든 것을 도우시고 공급하시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구하기 전에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내가 필요한 것을 먼저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나를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아들로 삼으시고 그분의 완전하심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 들 때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나를 포기하면 형제와 자매가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자아 정체감, 자존감이 회복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자아 정체감, 자존감에 대한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양이만 보면 덜덜 떨게 됩니다. 증세가 심해 가족들이 정신병원에 보냈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쥐입니다.” 일정한 기간 치료 기간을 거친 후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 저는 사람입니다.” 이젠 됐다고 생각했지만, 문 쪽으로 가는 환자를 다시 불러 세웠습니다. “여보세요!” “아, 저요? 사람인데요.” 결국 그는 퇴원이 결정되었습니다. 퇴원하는 날, 환자는 개선장군처럼 의사와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도 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환자는 떨기 시작합니다. 실망한 의사가 귀에 대고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사람인데요.” 의사가 놀라며 “당신은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고양이를 무서워합니까?” “제가 사람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 고양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우시고, 내가 그분의 아들이기에 모든 것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죽은 기도의 대표적인 모형인 나의 중심 기도만을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나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에게 나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나를 위해서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분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다 중요한 것을 경험하면 나를 포기하게 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나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자신보다 중요한 것 앞에서는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더 잘 살아 보려고 셋째 아이를 가졌습니다. 4월에 낳게 됩니다. 저는 허리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침대 옆에 있는 온열 치료기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구르면 곧바로 침대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온열 치료기가 침대와 1m 정도 떨어져 벽에 붙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너무 늦게 들어가 피곤한 상태에서 아내에게 온열 치료기를 침대에 붙여 놓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4월에 아기가 태어나는데, 우리 집에 개미가 있어서 태어날 아기가 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바닥에서 자라고 했습니다. 명색이 가장이 아내도 침대도 모두 빼앗기고 온열 치료기에서 돌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생! 기분이 나쁠 텐데 오히려 아내의 얘기를 들으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중요한 아이라는 존재 앞에서 자신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내가 포기됩니다. 그분의 신실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먼지와 같고 공허한 존재이지만, 생명이시고 영원이시며 충만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진리를 알고 나는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깐의 세월을 살고 나면 천국에서 다시 만날 형제, 자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거룩하게 구별된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하늘에 계시고 구별되며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거룩의 조화를 이루십니다. 개인적으로 나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이지만, 공적인 관계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이기에 방종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알고 경험할수록 더욱 겸허하고 겸손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께 가까이 하게 됩니다.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두 번째 의미는 이 땅과 구별돼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전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전능하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무력하고 환경에 갇혀 있습니다. 사랑을 좇다가 망한 것만큼 서글픈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 전능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지지하고 뒷받침하며 결국은 사랑의 목표를 일궈 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부족한 모든 것을 채우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행합니다. 이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 말고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신실하고 아름답게 완성시킬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