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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옵시고 (마 0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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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옵시고(마 6:9-13)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날마다 행복의 양식을 취하고 내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행복 양식 먹고 용서하는 천국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간구하는 성도되어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파스칼의 ‘팡세’에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한 사람은 내일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내일 결혼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내일 결혼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며 오늘을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내일입니다. 내일에 대한 전망이 오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구주로 모신 사람은 이미 천국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완성하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을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뤄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일용 양식을 주시고
본문 말씀을 보면 내일 천국에 들어갈 우리가 오늘 간구해야 할 세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에 세 끼 먹을 양식을 뜻하지만, 이런 식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여기서 ‘양식’이란 여러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식을 주님의 만찬으로 해석합니다. 육체가 양식을 취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은 매일 영적 양식을 취해야 합니다. 매일 큐티로 말씀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이영적 양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양식을 주님 그 자체로 해석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참된 음료요 내가 참된 양식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구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용할 양식이라고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마태는 아주 특별한 단어 하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 구약 성경을 통틀어 단 한 번밖에 쓰이지 않은 이 단어를 통해 양식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 줍니다.
‘일용할’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에피시오스’입니다. 이것은 주부가 그 날의 식사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주부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합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서 보냅니다. 아침을 바쁘게 보낸 주부는 가족들이 떠난 빈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저녁엔 무엇을 준비해 가족들에게 먹일까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정하고 메모도 합니다. 그러나 주부가 기록한 것은 단순히 먹는 끼니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느끼는 행복의 양식들을 적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꼭 필요한 양식으로 배만 채울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그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먹고 마시는 행복의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누가복음 11장 3절에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해석하면서 ‘날마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날마다 행복의 양식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은 비타민과 같은 것입니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이지만, 인체에 저장되지는 않습니다. 비타민은 그때마다 필요한 양만큼 흡수하게 되어있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저장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그때마다 흡수해야만 하는 비타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의 양식은 ‘만나’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시고, 양식을 구하는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그 날에 필요한 양만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거두면 썩게 되고, 덜 거두면 사라집니다. 만나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날의 양식을 취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일 천국에 들어갈 우리가 오늘 간구할 두 번째 기도 제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어느 날 존 웨슬리 목사님은 용서에 관해 열심히 설교한 후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거칠고 험상궂게 생긴 장군이 웨슬리 목사님 앞에 나타나 “목사님이 아무리 용서에 대해 설교해도 나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눈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나 장군님께서 용서하지 않으려면, 죽는 날까지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누군가 당신처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웨슬리 목사님이 만난 장군처럼, 결코 용서해 주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분노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머리로 용서가 되지만 가슴으로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용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신약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면, 쉽게 용서가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죄 용서에 대한 단어가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말티아’입니다. 이것은 활이나 총을 쏘았을 때, 과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정확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둘째, ‘선을 넘어 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규칙 안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어 서는 무례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죄입니다.
셋째, ‘아노미아’라는 단어입니다. 옳은 것을 알면서도 계속 나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십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어기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어기고 싶은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고도 불의의 충동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죄인입니다.
넷째, ‘미끌어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죄를 짓고 싶지 않지만, 바나나 껍질을 밟은 사람처럼 자신도 모르게 죄의 구렁텅이로 들어가 버린 경우입니다. 아무리 선한 동기와 의지가 있다 해도, 결과가 악하다면 선한 동기와 상관없이 죄 중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본문에 나오는 ‘오페일레마’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 앞에서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어둠의 자식들이요, 죄의 자식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
또 우리가 가장 많이 죄를 짓는 대상은 바로 자신입니다. 나만큼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화장하고, 멋진 옷을 입고 다니지만, 가슴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까?
나를 미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볼 수 있다면, 남을 용서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아니지만, 자신을 돌아보시고 주저하지 않고 상대방을 용서하셨습니다. 재범의 우려가 있는 사람도 거침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예수님께서 먼저 실천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사람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사람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이신 하나님께서 먼저 실천하신 것입니다.
용서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수준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수준에서 하는 것입니다. 또 용서는 상대방이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뜨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시면서, 성령님의 능력을 부인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용서입니다. 이 사실을 본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십니다. 한 임금이 때가 되어 종들과 회계하러 왔습니다. 먼저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 당시, 일 년에 한 차례 로마에 세금을 냈는데, 이스라엘 전체가 낸 세액이 8백 달란트 입니다. 1만 달란트라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 종은 결코 갚을 수 없는 거액이었습니다.
주인은 “너의 처를 팔고 너의 자식을 팔고 네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1만 달란트를 갚아라”고 했습니다. 그때 종은 “네, 제가 갚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힘들게 일해 벌기보다, 아내나 자식을 팔기보다 주인의 마음이 바뀌는 방법입니다. 주인은 많은 빚을 갚겠다는 종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이란 용서해 준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빚을 탕감해 주자, 종은 너무 기뻐서 길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길에서 자신에게 1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의 1만 분에 1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그 종은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빨리 갚으라며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를 본 친구들이 임금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임금은 “악한 종아, 네가 빚진 것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그 중심대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내일 천국에 가는 우리가 오늘 간구할 세 번째 기도 제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시험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누가 시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면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시험 당하는 사람은 시련과 고통 가운데 있지만, 이런 시험은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결코 사람을 죄의 길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시험받는 사람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를 죄로 이끌지 않습니다. 도가니에서 순금을 찾는 도장공처럼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우리를 순수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인간이기에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사람일수록 혹독한 시험 가운데 던져 놓으십니다. 요셉은 13년 동안 시험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승리했을 때, 70명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40년 간 혹독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가 40년의 시험을 이기고 나서, 장정만 60만 명이 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역사를 이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2절 말씀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시험은 하나님께로만 오는 게 아닙니다.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에서 ‘악’이란 어떤 인격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존재로부터 오는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는 뜻입니다. 사단은 시험의 명수입니다. 사단은 유혹하는 자요, 속이는 자입니다. 사단의 속임은 절대적인 명성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사단에게 걸리기만 하면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이 주는 유혹, 시험에 걸리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사단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아예 시험에 걸리지 않고 이기는 방법입니다.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사단이 아무리 시험의 명수라 해도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두보는 육신의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교두보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가장 방해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사랑하는 사람을 조종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합니다. 사단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면 뭐든지 사용합니다. 사단이 가장 선호하는 도구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통해 공격합니다.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은 왕이 될 사람인데 왕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옵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분별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로 사단의 교두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사단의 교두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깨어있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교훈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교훈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은 지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훈이나 지침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기도로 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 용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같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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