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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시간만 기도했다면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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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구원 사역 공식 일정에 끝을 맺는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이 기도 시간을 끝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시고, 이어서 법정에 서시고 재판 결과에 따라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노력에 정보를 얻은 행동 대원들이 가장 소란스럽지 아니하게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밤 시간을 이용했습니다. 예수의 측근자들이 최소한으로 없을 때를 틈타서 기도를 드리는 현장을 급습하는 작전으로 일을 성공합니다. 이제는 꼼짝 못하고 골고다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33세의 건강한 청년의 몸은 이제 못을 박혀서 인류 역사에 가장 잔인한 사형 제도인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 아주 긴박한 고통이 왔을 때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오늘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모습 중
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발표하고 계십니다. 38절에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발표하셨습니다. 사람
은 어떤 고통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그때는 심리적으로 체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불안감은 아주 죽을 지경의 심리적 불안이 조성되므로 견디기가 매우 힘든 시간입니다. 주님은 그 고통의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라고 판단을 하셨기 때문에 오늘 기록이 남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평소 기도생활을 성경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신 것이 마가복음 1장 35절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 ∼ 2절에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지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또,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 '예수께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산 기도를 하러 다니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산 기도를 다니셨습니다. 또, 기도하는 모습도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1절에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 기도 모습이 나타나고, 오늘 말씀에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 성경에 나타난 매우 중요한 몇 가지의 진리성을 밝혀보는 것이 사순절 고난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는 기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에 나타난 표현들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확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예수의 고민은 무엇이며 예수의 슬픔은 어떤 것인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그랬습니다. 죽을 만큼 고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엎드려 기도를 해도 얼굴을 땅에 대지는 않습니다. 예수는 얼굴이 땅바닥에 닿았다고 그랬습니다. 누가복음에 이 대목 기록은 더욱 진하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그렇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는 간절히 하지만 땀방울이 맺히기까지는 안합니다. 또, 그 땀방울이 피 방울같이 되는 기도는 우리가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액이 마를 만큼 기도 드리는 그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드리고 있는 기도문은 간단합니다.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게 기도문입니다. 한 문장 밖에 안 되는, 시간적으로 10초∼15초 밖에 안 걸리는 기도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가? 그 어려움은 우리가 항상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기도문을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깨달음이 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나를 고통에서 멀리해 주시옵소서.' 평안의 세계와 풍성한 소유적 성취가 우리의 기도 제목이고, 건강케 하시며 성공적 삶을 환영하며 전쟁이 나면 빨리 그치게 해주시고 비가 오지 아니할 때는 넉넉한 비를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자녀들의 훌륭한 번영과 목표에의 충분한 도달, 투표에 당선되고 사업의 성취가 있으며 진취적 발전의 약속 …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도 훌륭한 기도이며 주님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우리가 드릴 때는 땀이 피 방울 같이 되어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흙바닥에다 대고 기도 드리지도 않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님과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도 똑같이 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가 무엇인가? 내 뜻을 버려야 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제일 힘이 듭니다.
지금 예수님의 뜻이 있다면 예수님의 기도에 나타났습니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길이 반드시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방법 밖에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해서 얼마든지 영광스러운 인간 구원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금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정반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정 반대의 길에 섰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의 뜻을 버려야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십자가에
서 고통의 죽음을 겪어야 합니다. 이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소시민적 삶에서도 경험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힘든 결정이 뭔가?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부부가 둘이 앉아서도 어떤 한 subject를 놓고 의논을 할 때 뜻이 맞지 않아서 결정적 위기가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두 사람 다 안 맞습니다. 교회도 사회기관도 국회도 정부도 날마다 갈등과 싸움의 원인은 내 뜻을 세우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내 뜻대로 만약 된다면 내가 매우 영광스러워지고 고통도 멀리 가고 성취감도 행복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
상이 될 수도 있으며 어디를 가나 우대 받는 대상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내 뜻을 세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대로 말씀을 드리면, 저는 미국 사람들하고도 많이 만나는 경험을 가졌는데 회의를 할 때 이 회의에 대한 훈련이 우리 동양인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보다는 서구인들이 훨씬 훈련이 잘 되었다는 느낌을 많이 가진 경험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서구인들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사고에 기초한 합리적 방법을 삶의 기초로 삼고 있어서 합리적 생각을 말하고 그 자신의 뜻이 다른 사람에게 즐겁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자기 의견을 편안하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뜻이 다른 사람에게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할 때는 뭐, 그렇게 큰 자존심 상하지 아니하고 자기 의견을 철수합니다. 그런데 저부터도 우리 동양인들, 한국 사람들은 감정이 합리적인 것보다 앞서가기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회의를 할 때 의견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내
놓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면 끝까지 우겨야 되니까 싸움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싸움의 원인은 내 뜻 버리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 내 뜻대로 되는데 무슨 싸움을 합니까?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 회복의 자리, 골고다 십자가라는 두 갈림길에
서 어떻게 내 뜻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지금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면 '내 뜻을 내가 버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내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 뜻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셔서 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핏방울 같은 땀을 떨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밝혀졌어요. 내 뜻에의 성취? 그게 아니고,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잠을 자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노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려면 너무나도 힘들고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힘을 얻어내려는 노력, 그것이 기도라는 것을 이 말씀이 오늘 가르쳐 줍니다. 사실상 기도는 힘이 듭니다. 진액이 마릅니다. 여러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여러분이 하루에 8시간 노동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8시간 교회에서 기도하시겠습니까? 기도는 노동보다 훨씬 힘이 듭니다.
그 다음에, 오늘 말씀에 나타난 기도를 보면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합심(合心)하자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똑같은 요청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측은하게 보일 만큼 사정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한시간만이라도 같이 기도하자고 예수님조차도 기도에는 동지가 필요하였음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신앙 생활 가운데서 어떤 고난스러운 일을 만난 형제를 보고 흔히 하는 말이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의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가장 힘든 일을 함께 나누자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훈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방법론까지 가르치셨어요.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시작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는 혼자 기도하지 않고 120명의 합심기도가 기독교를 탄생시켰어요. 기도하는 무리를 보면 그 공동
체의 장래는 이미 계산이 나왔습니다.
Charls Allen 박사가 미국 교회 교인상대로 연구 설문조사에 나타난 반응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다니겠다고 등록한 교인 가운데 20%는 교회 출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35%의 신자들은 가정에서 한번도 성경을 읽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25% 신자들은 기도생활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40% 신자들은 성경에 약속한 헌금 생활을 하지 않으며, 75%의 교인들은 한 명도 전도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런데 100%의 교인들은 천국에 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왔습니다.
주님이 가장 신임하고 있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또 그토록 한 시간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는데도 그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이유가 예수님이 인정하신 합리적 이유로 나타납니다. 여기 뭐라고 했냐면,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한계성을 초월할 수 없는 육신의 약함 때문에 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구나! 지탱할 수 없는 육신적 피곤이 안식의 시간인 밤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해하겠다는 말입니다.
저같이 이렇게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목사끼리 만나면 목회 경험의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사실 이 설교를 맡은 목사는 육신이 아무리 약하고 피곤해도 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틀림없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떨 때 너무 피곤 할 때는 그 시계 알람 소리가 안 들립니다. 뻔히 내가 새벽 기도 설교자인데도 안나갑니다. '아이, 시끄러워! 이거 왜이래?' 그리고 또 잡니다. 저는 제 머리맡에 평소에 알람시계 세 개를 두고 잡니다. 그런데 하나가 또 고장날 때가 있어요. 전기가 나갔던지, 밧데리가 나갔던지.. 여
러분에게 발표를 하면 다 기억할 만한 아주 대한민국의 큰 목사님,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그런 어른이 저한테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그렇게 새벽기도를 너무 피곤하게 곤하게 자는데 새벽기도 나갈 시간이 벌써 지났대요. 하도 급하게 옷을 입고 나가서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 아랫도리가 서늘해서 보니까 바지를 안입고 나왔더래요. 잠옷바람으로… 위에는 제대로 하고 나왔는데… 아마 그래서 이렇게 강대상이 있는 모양이에요. 또,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신학생들을 위한 새벽기도회가 있었는데 그 담당 교무과장 목사님께서 나와서 새벽기도를 인도하시는데 아래 앉아있는데 성경책을 펴보니까 국어사전을 가지고 나오셨대요. 그런 적도 있었고, 제가 서울에서 전도사 일을 볼 때는 전도사가 보통 나가서 새벽 예배를 준비를 다 해놓지 않습니까? 불 켜고 문 열어놓고… 목사님이 나오셔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시는
데, 보통 새벽기도회 인도는 이 아래 강대상에서 많이 인도를 했어요. 그런데 겨울에 추우니까 따뜻하게 하기 위해 전기장판을 해놨어요. 목사님이 나오셔서 어느 집사님을 기도시키셨어요. 그리고 거기에 앉으셨어요. 집사님은 열심히 기도하시는데 목사님은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면서 깊은 잠에 빠지신 거예요. 그래서 전도사가 나와서 '각자 기도하고 가세요! 목사님 깨워봤자 저렇게 깊은 잠에 드셨는데...'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육신의 약함!
그거 인정합니다. 육신의 약함은 기도시간도 방해한다는 것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화의 특징, 만성피로! 그런데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도를 안하면 시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약함을 인정하시면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입니다. 어떻게 이 약한 육신을 이기고 기도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자고 마음을 결정하면 성령님이 나를 그 길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저희 교회도 몇 백 명의 새벽 기도 식구들이 매일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도 나옵니다. 그분들이 새벽기도 안하시는 분들보다 건강조건이나 생활조건이 우월
하고 좋은 것이냐? 아니잖아요. 똑같잖아요. 같은 환경에서 같은 건강 조건에 있지만 하려는 사람과 그 결심을 안하는 사람의 차이란 말입니다. 육신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던 세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한 시간 합심 기도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그만 자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고 있는 시간에 무슨 사건이 터졌느냐? 가룟 유다를 앞세운 군병들의 예수님 체포대 행동 대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기도 좀 하자고 해도 못 일어나던 제자들은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군인들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난 것입니다. 잠이 뭡니까? 죽을지도 모르는데...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자기 방어의 순발력 있는 행동을 하는데 칼을 빼서 다가오는 군인의 귀를 깎아버리는 칼 솜씨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예수님의 요청도 못 들어드렸던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돌발적으로 일어나서 행동하게 되는가? 마음의 결정이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조차도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찾고자 할 때는 한 시간의 기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26장에서 베드로가 어떤 시험에 빠집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비자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소녀는 노예적 신분의 계집종이라고 성경에 해석합니다. '너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때 베드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맞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다.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왜 그렇게 비겁한 대답을 하였는가?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시험에 들었나? 그날 저녁 예수님과 함께 기도 동참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첫 번째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건 뭡니까? 한번 시험에 빠진 사람은 끝없는 비겁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그 당이라. 한패거리지?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너는 북쪽 갈릴리 사투리 액센트를 쓰면서 왜 갈릴리 사람을 부인하느냐?' 마지막에 베드로는 큰일났어요. 예수를 저주하여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큰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날 밤 8시간 수면의 기회를 한 시간만 기도를 드렸다면 그 기도의 영력을 통해 베드로는 그렇게 큰 시험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에 베드로는 이 때를 생각하면서 새벽이 울 때마다 일어나서 기도했다는 초대 교회의 전설이 있으며, 아시아에 흩어진 초대 교회 박해받는 성도들을 향하
여 기도 권면을 할 때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 기도 요청에 동참하지 못했던 후회감이 반영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온 가장 괴로운 시간에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주시는 십자가 사명을 훌륭하게 마감하셨다는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가장 버리기 힘든 이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는 피 방울이 떨어지는 기도의 영력을 우리는 나의 삶 속에 실천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일기를 점검해 보면 40일 금식 기도를 시작해서 겟세마네 철야 기도로 끝났습니다. '왜 내가 그토록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도 나는 내가 소원하고 있는 길의 정반대로 가고 있는가?' 내 뜻의 성취가 없는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정착시키려는 이기심의 시녀가 아니라 나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고 참된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정면으로 만나 피 방울이 떨어지는 갈등의 순간을 거쳤습니다. 우리도 거쳐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온 기도 능력의 힘 때문에 내 마음이 충분히 시험에 들지 않고, '아! 이것은 주께서 내게 허락하신 십자가의 사명이다!'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청을 하십니다. '네가 나와 함께 한 시간만 기도하자.' 계속 반복하여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약하지만 마귀의 군대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해야 그것이 왔을 때 '이것은 주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 사명이다!' 크리스천다운, 위대한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사순절의 교훈으로 삶 가운데 빛이 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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