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를 건져 살리시는 주님 (마 14:22-33)

첨부 1



우리를 건져 살리시는 주님(마14:22-33)

오늘 본문은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지난주의 본문이 전하는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 필적할만한 또 하나의 기적같은 일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좇아 나아온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진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수만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일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식량이 떨어지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셔서 먹이신 일과 비견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방에 큰 바람과 파도에 휩싸여 공포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일은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의 추격군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포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홍해를 갈라지게 하신 일에 필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22-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과 무리들로부터 떨어져 반대편으로 가게 하시고, 당신 또한 무리들과 떨어져 홀로 산에 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요6:15)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제자들에게 당신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야 했습니다. 더더군다나 당신을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과 그것을 폭동이나 민족봉기로 비화시키려는 일부의 기도에 열두 제자들이 연루되지 않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을 것입니다. 또 혹 그런 움직임이 본격화될 때에 제자들이 당신과도 함께 있지 않았고 무리들과도 떨어져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확보해 두심으로써 만일의 경우에라도 제자들의 무혐의를 증명하고 안전을 지키실 필요성을 느끼셨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무리들로부터 급히 제자들을 떨어지게 하시고 정반대편으로 가게 하신 후 당신은 홀로 산으로 가시게 만든 중요한 동기일 것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가지려고 했으나 사방에서 몰려온 무리로 인해서 갖지 못하셨던 '혼자 계시며 기도하실 시간'을 갖기 위한 뜻도 크게 작용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배를 타고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되돌아가던 제자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요6:18). 본문 24절에는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전하고 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났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돌아가기는 늦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합니다.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큰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난 것은 해가 저물기 전, 즉 오후 6시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그 다음날 동이 트기 전 밤 4경이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오후6시부터 다음날 오전6시까지의 밤 열두 시간을 세 시간씩 사등분해서 1경, 2경 3경, 4경으로 때를 표시했습니다. 따라서 밤 4경이면 새벽3시부터 6시 사이를 말합니다. 웬만하면 벌써 호수를 건너가 잠을 자고 오히려 깰만한 시간에 그들은 아직도 호수 한 복판에서 열 시간 넘게 힘들게 노를 젓고 있었던 것입니다(막6:48). 그들은 매우 지친 상태였을 것입니다. 물에 젖고 거센 바람을 맞았을 것이니 크게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신체적인 피로뿐 아니라 한밤중에 겪는 바람과 파도로 인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다가 다 물에 빠져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절망상태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께서 호수 한 복판에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밤 사경이라고 했으니 아직 어둡거나 희미하게 동이 트려고 하는 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6절에 따르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반가워하기보다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부른 것은 우리에게는 사뭇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으로 바다는 악령들의 고향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의 형체가 물위에 나타난 것은 제자들에게는 지극히 공포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고 어떤 물귀신같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제자들은 자기들을 데려갈 저승사자가 나타났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른 것'(26절)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즉시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절) 하시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고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진정시키셔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유령인 줄 알았던 형체가 뜻밖에 예수님이심을 알게 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그다운 돌출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 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라' 하셨고, 그러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29절). 그런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물 위로 걸어갔는지는 모르나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던 눈길을 바람에게로 향하자 그는 다시 무서워하며 물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소리 질렀으며(30절), 그 때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절) 배에 함께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는 것입니다(32절). 그리고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예수님께 절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먼저는 제자들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한 마디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했다는 말씀입니까? '왜 의심하였느냐?' 하는 물음은 '왜 마음이 갈렸느냐?' 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만 바라보아야지 왜 다른 것을 보느냐?' 하시는 주님의 질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밤 4경에 홀연히 나타난 이가 예수님이심을 안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에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있었지만, 바람을 보고는 다시 무서워한 사실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눈에 띄어도 우리의 마음과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 어떤 상황이나 역경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할 수 있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보다 주변상황에 더욱 민감하고 그 상황에 의해 더 강하게 영향을 받아 불안해한 것이 베드로의 믿음의 작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작은 믿음과 의심은 비단 베드로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께서 시키셔서 하는 일 속에서는 어떤 어려움과 위기의 상황이 닥쳐도 염려할 것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곧바로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불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있기 직전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 수만 명을 먹이심으로써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가 모든 문제의 놀라운 해결자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예수님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6:52에서는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한 마디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 말고도 당신께서 바람과 파도도 다스리시고 온갖 병과 귀신들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행하시는 그 많은 놀라운 일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하신 뜻에 대해 마음이 둔하여져 있는 것, 그래서 작은 일에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 그것이 작은 믿음입니다. 모든 일 속에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람과 파도와 호수에 대해서도 주권과 권능을 행사하시는 주님입니다. 악령들이 사는 곳이라는 물에서도 참된 주권자이신 주님입니다. 물 위를 걸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자연질서조차도 넘어서 계시고 그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주권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피조물의 세계에 속하신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자들이 밤새도록 격랑에 시달리며 두려움 가운데 있을 동안 예수님께서는 역시 밤을 새시며 내내 기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힘주시고, 우리를 건져 살리시는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중 22절, 27절, 31절에서 세 번이나 '예수께서 즉시 ...'라는 말이 나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위험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즉시 손을 뻗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주님 없이는 우리는 그저 풍랑에 시달리다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바다와 같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멀리 따로 계신 것 같지만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 고난을 당하고 심령과 믿음이 연약하여져 의심과 두려움 가운데 이 세상 속에 빠져갈 때에는 즉시 오셔서 우리를 건져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큰 바람과 격랑에 시달리고 절망하던 제자들처럼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언제든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건져주실 것입니다. 이 불안과 격동의 시대에 잠시 부는 바람을 보며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잠재우기도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람을 보며 두려워하면 우리는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면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도 우리를 건져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지금의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새문안 교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