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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통곡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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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회개의 날인 성회수요일 (금년은 2월 28일)부터 시작되어 부활절 전날 해질 때까지의 40일 동안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는 기간이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다져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베드로' 하면 상당히 훌륭한 제자로 생각이 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런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다던가, 한번 설교해서 오 천명을 회개시킨 사건이라든가,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나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달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던가 하는, 매우 훌륭한 제자로 기억됩니다. 그런 오늘 본문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베드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베드로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그 약속을 다 잊어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습니다. 본문 54절은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하였습니다. 멀리서 몸을 숨겨가며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아주 멀리 도망가지 않고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사실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멀찍이 따라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멀찍이 따라갔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 옆으로 갈 수도 있고, 또 멀리 도망칠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관망하기에 좋은 위치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살아 온 인생이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한번 같으면 꿈인 줄 알았다고 변명을 하겠지만 두 번이나 만나서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까지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베드로가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고는 어부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면 돌아다니면서 '예수 다시 사셨다. 할렐루야!' 하고 다니던가, 아니면 하다 못해 지하철에서 전도지라도 돌리고 있을 일이지 왜 어부의 생활로 돌아갑니까? 이쯤 되면 베드로는 약간 어디가 어떻게 된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더 기가 막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어부의 생활로 돌아 간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는데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바닷가에 서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 본 베드로는 그 즉시로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배를 타고 오는데 베드로는 급한 마음에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주님께로 왔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리고 어부의 생활로 돌아갔던 사람이 새삼스럽게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즘에 이런 행동을 했다가는 청량리 쪽에 가 계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왔더니 어떤 사람이 한 주일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 한 주일은 인상을 쓰면서 외면을 하고, 그 다음 주일은 또 반갑게 인사하고, 그 다음 주일은 또 인상 쓰고,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감격을 누리고도 금방 어부의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 발로 주님 곁을 떠났다가도 바닷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보고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마중을 나오는 사람입니다. 도무지 그 생각과 태도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는 사람입니다.

또한 본문 55절을 보면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느니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은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쬐더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베드로가 춥다고 불쬐고 있을 때입니까? 지금 예수님은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춥다고 불을 쬐고 앉아 있습니다. 숯불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숯불을 피워놓고 거기에다가 떡과 생선을 구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 베드로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눈앞에는 숯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번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실 때 자기는 춥다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 쬐던 숯불, 그 숯불이 지금도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아마 이때 베드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숯불만 보면 깜짝 깜짝 놀라는 숯불 노이로제에 걸렸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자기 몸이 춥다고 불쬐고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눈앞에 두시고 마지막으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같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러 가시면서도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 너희도 여기서 나를 위해 기도하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내려와 보니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섭섭하셔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책망하시고 다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내려와 보니 이번에도 또 자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세 번째 기도하고 내려왔더니 이번에는 아예 코를 골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입니다. 생각은 있지만 그 생각대로 실천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만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고 큰 소리를 치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절망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상황판단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종들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불을 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베드로가 앉아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왔다면 어디 숨어서 상황을 살펴볼 일이지 마당 한 가운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앉아있는데 그 사이에 끼어 앉아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다가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삽시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삽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여섯인데 초막을 셋만 지으면 베드로 자신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어디서 살겠다는 것입니까? 전혀 대책이 안서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일단 흥분했다하면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사람입니다.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펄펄 뛰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칭찬에 흥분한 베드로는 그 다음에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자 '그렇게는 안됩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칭찬 좀 받았다고 흥분해서 잘난 척 하다가 졸지에 사단이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돈키호테 같은 성격의 사람입니다.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57절 이하에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오자 그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고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실 때면 다른 제자들을 다 제쳐놓고 베드로만은 꼭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고 하셨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를 선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맹세하고 주저하며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위대한 사명을 베드로에게 맡겨주시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 같은 것에게 이런 중책을 맡기시니 감사합니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충성!' 이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입니까?
그런데 이 순간에 베드로는 무엇을 했습니까? 옆에 있는 요한을 돌아보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중요한 순간에 하는 말이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왜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했는지도 저도 정확한 해석을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게 되면 그때 왜 그랬는지 꼭 물어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베드로가 답답하셨는지 '요한이 어떻게 되든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잘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이 위대한 사명을 받는 순간에도 그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남의 일에나 참견하는 사람입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약속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맡은 사명에 책임을 안 지는 사람, 자기가 받은 사랑에 책임을 안 지는 사람,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큰 소리 치다가도 위기가 다가오면 도망쳐 버리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옛 생활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성질은 얼마나 급한지 배에서 그냥 바다로 뛰어내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춥다고 불쬐고 앉아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쿨쿨 자는 사람입니다. 정찰하러 나가서는 적들이 모여 앉아있는 한 복판에 끼어 앉는 사람입니다. 초막 셋을 짓고 여섯 명이 같이 살자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칭찬 받았다고 흥분해서 펄펄 뛰다가 금방 욕 얻어먹는 사람입니다. 위험이 다가오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하고 위대한 사명을 부여받는 순간에도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베드로,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는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앞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외쳤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대 제사장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의 종들을 무서워하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대제사장을 항해 외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충성과 인내를 갖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겸손함이 넘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불같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생각을 고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고치십니다. 여러분의 생활습관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의 모습에 베드로와 같은 부분이 있습니까? 때로는 열심을 내다가 때로는 차갑게 식어버리는 믿음이 있습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면서도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지혜가 부족하여 늘 실패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나의 부족함을 통곡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게도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내 마음속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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