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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어있는 무덤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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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전 세계 인구 중에 1년에 6천만 명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한 시간에도 7천명이 숨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들도 그 숫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죽음은 순식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무참하게 파괴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내가 누리던 모든 것들, 나의 꿈과 행복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만약 우리가 건강을 잃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권력이 있고 지식이 있고, 또 재물이 많다 해도, 강한 의지가 있다 해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을 이기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굳게 닫혀진 무덤의 문을 여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는 약속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이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고는 부활하셨다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겁이 나서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무덤 곁에 올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무덤 입구는 육중한 돌문으로 막아 놓았으며, 이 돌을 아무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로마황제의 봉인이 찍혀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무덤의 문을 열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최근에 와서는 아주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본래 쌍둥이였는데 한 사람이 죽자 또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빚어진 소동이라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움직일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증거는 성경 안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후 사흘 째 되던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그 길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그 다른 제자'라고 한 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입니다. 둘이서 달려갔는데 요한이 달리기를 더 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해서 무덤 입구를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달려온 베드로가 평소의 급한 성격 그대로 무덤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그대로 놓여진 채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비어있는 무덤을 발견할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달려와 보고를 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같이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요한이 먼저 도착하고, 먼저 도착해서는 머뭇거리는데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무덤에 먼저 들어가고, 그래서 비어있는 무덤을 발견하고 그 다음에 요한도 뒤따라 들어가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냥 '베드로와 요한이 가보니 무덤이 비어있었다.' 그러면 될 것을 이렇게 시간대 별로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있었던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임을 상세한 기록을 통해서 증거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무덤 안에 묻고 다시 사신 것을 보다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 12절에 '흰 옷 입은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하는 구절입니다. 그냥 '무덤 안에 천사가 둘이 앉아있었다.' 그러면 될 것을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있었다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귀중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을 보면 속죄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과, 만나를 넣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 위에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 양쪽에는 천사 둘을 조각해서 날개를 펴서 서로 맞닿게 세워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물을 가져와 이 두 천사 사이의 제단에서 제물의 피를 흘려 죄사함을 받습니다. 속죄소는 죄를 사하는 곳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속죄소의 제단 양쪽 끝에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서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안에도 역시 두 천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속죄소와 똑같은 형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죄를 대속하는 어린양 제물로 무덤에 누워 계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한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본문 6-7절의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더라.'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몸을 두르고 있던 세마포를 벗으시고, 또 머리를 싸고 있던 수건도 풀어내셔서 차곡차곡 개켜서 옆에 두고 나오셨구나.'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딘지 이상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분이 세마포를 벗어서 정돈해 놓고 머리를 쌌던 수건을 얌전하게 개켜둔다는 것은 어딘지 구차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본문의 정확한 뜻은 이렇습니다. 세마포는 죽은 사람의 몸을 감싸는 삼베로 만든 천입니다. 그런데 '세마포가 놓여져 있었다.'는 말은 시신을 감쌌던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신을 감싸고 있던 세마포는 처음에 쌌던 모습 그대로 있고 그 안에 있던 몸만 빠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건이 개켜져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접어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머리를 쌌던 그 형태대로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머리는 수건으로 싸고 몸은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뉘었는데 몸만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수건과 세마포는 시신을 쌌던 형태 그대로 주저앉은 채 놓여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누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세마포에 싼 채로 그대로 들고 가지 일부러 세마포를 벗기고 머리를 싼 수건을 풀어두고 갈 리가 없습니다. 또 누가 풀었다 해도 어떻게 시신이 들어있던 모습 그대로 세마포가 놓여져 있고, 머리에 둘렀던 형태 그대로 둘둘 말린 채로 수건이 놓여져 있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본문의 증언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만약 우리 나라같이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다면 누운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풍속은 굴을 파고 굴 속에 뉘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누운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한 것은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그 자리에 누워 계셨던 주님의 몸은 없어지고 그 분을 싸고 있던 세마포와 수건은 그 모양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우셨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비어있는 무덤, 시신을 쌌던 그대로 남아있는 세마포와 수건, 그리고 누우셨던 자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음을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변화된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가롯유다 대신에 한 제자를 뽑을 때에 새로운 제자의 자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 다른 자격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제자의 자격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재판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앞으로는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할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했습니다. 이들이 보고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심문을 받노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사망의 권세가 승리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진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 속에 갇혀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죽음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무덤은 터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생명이 승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여러분도 반드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부활은 인간의 미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거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침 뱉고 조롱하며 저주하였습니다. 어제까지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던 군중들이 오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피의 대가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릴지어다.' 하였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수만 있다면 나와 내 후손이 저주를 받아 다 망해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서운 증오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미움과 증오심의 세력을 산산이 깨뜨려 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미움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도 처음에는 다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분의 사랑이 우리의 악하고 굳은 마음을 녹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비어있는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동시에 비어있는 무덤은 우리들 역시 사망의 권세에 갇혀있는 자들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임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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