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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안식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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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안식(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구절은 여러분들이 자주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 말씀만큼 설교하기 어려운 구절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설교자도 이 말씀에 대해 설교를 하고 만족하면서 강단을 내려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간결한 이 문장 속에 엄청난 분량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서정주 시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지은 시가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비는 종이었다.'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그의 모든 삶의 정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더 이상 풀어서 설명할 수 없는 구절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은 간결하면서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함축되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풀어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 몹시 주저되는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은혜를 주시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즘에 '만성피로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는데 이상하게 늘 피곤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침에 눈을 뜨고 '아 상쾌한 아침이구나.' 이러면서 일어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람 때문에 피곤합니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피곤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불협화음 때문에 피곤해집니다.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할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낙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날이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모릅니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옛날에는 '다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고 했는데 그야 말로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은 더 열심히 하는데 사는 것은 늘 불안합니다. 먹고사는 것 때문에 피곤한 세상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사는 환경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여기가 내 뼈를 묻을 곳이다.' 하는 생각이 있어야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오늘날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잦은 이동성에서 생긴다고 진단합니다.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이 사람의 정서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홍콩에 사는 많은 분들이 한국에 살 때보다 이상하게 더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흔들거리듯이 언제나 불안정한 삶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도 늘 피곤합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가진 것이 많아도 피곤하고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아도 피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권세를 많이 누리고, 가장 호화롭게 살았던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깜짝 놀라는 지혜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또 많은 지식을 가지고 3천 개의 잠언과 천 다섯 곡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위대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눈에 드는 것은 다 가졌고 마음에 원하는 일은 다 했습니다.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쌓여있고 천명이나 되는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은 스물 한 살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보았고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것이 솔로몬이 내린 결론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그것이 마음에 안식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사는 환경도 어려움이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문제는 그 마음의 안식을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아도 거기에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필연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우리들에게 더 힘을 내라고 합니다. 매일 매일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이 세상은 더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피곤함을 극복하고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게로 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안식은 주님 앞으로 나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어떤 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하루종일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 부모 형제들이 살고 있는 고향에 가면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영혼의 고향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분께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문 29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나의 멍에를 메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그 분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짐을 벗겨주신다는 분이 왜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밭을 갈 때에 두 마리 소를 사용합니다. 두 마리 소에 하나의 멍에를 메게 해서 밭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송아지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어미 소와 한 멍에를 메고 함께 밭을 갈게 합니다. 두 마리 소가 한 멍에를 메고 있지만 사실은 어미 소가 힘을 쓰고 송아지는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0절은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안식을 얻기 원한다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는 한 여러분의 인생에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는 주님께서 능력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지쳐서 쓰러질 때에는 주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갈 때는 주님께서 그 길을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한 우리 인생에 실패가 없습니다. 내가 실패한다면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가시는 주님도 실패하셔야 합니다. 내가 넘어진다면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계시는 주님도 넘어지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내게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요약해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하시는가?'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말을 합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TV 강연으로 인기를 끌었던 김용옥씨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난폭하고 잔인한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주장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들려온 음성이 무엇입니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 배우라.' 하시면서 가장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선설은 인간은 본래부터 선하게 태어났는데 환경을 통해서 오염이 되어 악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성악설은 본래부터 인간은 악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20)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본래 악한 것이 들어 있다가 그것이 밖으로 나오면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본래부터 악한 죄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할 때에 '거듭나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악한 존재인 인간은 행위를 고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 배우라.' 하시면서 이렇게 인간은 악한 죄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 인생에 놓여진 결론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우리 인생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말씀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지은 죄들, 자기자신도 잊고 살았던 모든 죄들이 낱낱이 밝혀지고 그 죄 값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결론입니다. 더러운 죄인인 우리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결국에는 지옥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결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 배우라.' 하시면서 이렇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심판을 받고 지옥에 던져져야 마땅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다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내 죄의 값을 대신 치러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을 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더 이상 심판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 배우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섯 번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 온유와 겸손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참된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한번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갔다가 점치는 여종을 만났는데 이 여자는 자기 몸 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통해서 점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종의 주인은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 줍니다. 한 영혼을 살려주는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주인이 바울을 고소하는 바람에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매를 많이 맞아 옷이 다 찢겨 나가고 온 몸에 채찍 자국이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깊고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은 매를 맞으면서도 감격했습니다. '나 같은 것이 예수의 이름 때문에 매를 맞을 수 있다니' '나 같은 죄인이 예수의 이름 때문에 감옥에 갇힐 수 있다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해 주시는 것에 너무나 감격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는 지금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 는 확신이 그의 온 몸을 말할 수 없는 평안으로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이 피곤하고 지칠 때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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