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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허물고... (눅 22: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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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기도하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나가셨습니다. 본문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습관 중에 하나가 기도하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41절에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감람산을 둘러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내려오면 기드론 골짜기가 나오고 다시 언덕을 올라가면 감람산이 시작이 됩니다. 그곳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고 한적하여 기도하기 좋은 장소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곳을 자주 찾으셨습니다.

1. 사람의 습관
사람의 습관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좋은 습관은 좋은 인생을 만들어 가며, 나쁜 습관은 좋지 않은 인생을 만들게 됩니다. 프레즈 파스칼(Pascal)은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 1의 천성(본성)을 파괴한다.'고 했습니다. 습관은 반복되는 행동입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결국 사람의 운명은 좋은 습관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습관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1부 예배를 고등부가 주관하는 예배로 드렸습니다. 요즈음은 봄방학이라 학생들이 밤늦게 잠을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일어나지를 못해서 12시쯤 되어야 겨우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습니다. 미국에도 아침 겸 점심을 뜻하는 Brench라는 말을 쓰는 식당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침에 몇 시에 눈을 뜨든지 눈만 뜨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엉덩이로 자리에 몇 시간이든지 붙어 앉아있는 습관이 생겨야 합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것도 습관입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성경 읽는 것이 습관이 되고, 전도하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습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를 허물고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허무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42절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을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의 고통이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십자가를 안 지는 것이 자신의 뜻(내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로마시대에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흉악범들을 처형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 있었는데 그중에 화형법이 있었습니다. 흉악범들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기름을 뿌려 불로 화형 시키는 방법입니다. 다음으로는 산 사람을 죽은 사람과 함께 묶어 죽은 사람의 살이 썩어 들어가 산사람의 살까지도 썩어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흉악범들을 물속에 집어넣으면 물이 얼면서 온몸이 조여지고 결국은 얼어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한 가지의 고통스러운 방법이 십자가의 처형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약 여섯 시간동안 피를 흘리게 되면 결국 숨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방법으로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도 아픈 것을 알았던 주님은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은 십자가를 안지는 것이 좋겠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허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허물고 주님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3. 나를 허물지 못하는 이유는 육신에 속한 자이기에
성경에는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들은 자신의 뜻을 허물고 주님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며 자신의 뜻을 언제나 관철하려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5-6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경우는 ① 영적 유아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6개월이 되면 그만큼 성장합니다. 이것은 부모에게 기쁨이요 자랑거리입니다. 또 아이가 3년이 되면 3년 된 만큼 아이가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근심이요 눈물이며 한숨이 됩니다. 영적 유아기가 오래 지속되면 어린아이는 혼자 자립할 수 없습니다. 또 남을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② 죄와 실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3절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하였습니다. 육신에 속하였기에 사람들 따라 행했다는 것입니다. ③ 신령한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무능력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밥을 먹이지 못한 것은 아직도 영적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엄마의 젖이 좋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만큼 딱딱한 음식도 먹여야 합니다. 힘들고 소화시키기가 어려워도 언젠가는 딱딱한 음식도 씹어서 소화를 시킬 수 있어야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 유아기가 너무 길어서 바울이 밥으로 양육하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화하기 힘든 일들도 믿음으로 잘 받아 드리고 딱딱한 음식일지라고 씹을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쓴 음식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4. 신령한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삶의 특징은 ① 온유함과 ② 능력과 ③ 사랑입니다.
분명히 신령한 삶이 있습니다. 신령한 삶을 살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Self)를 부인하는 것이며, 자기부정은 곧 자기 본위(self-will)를 버리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과신(self-confidence)을 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부인은 자기 노력(self-effort)이나, 자기의존(self-dependence)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육에 속한 나의 모습을 허물고, 주님 안에서 신령한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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