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 02:1-13)

첨부 1


여러분들 유대인들은 어떤 중요한 절기를 지키는지 혹시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많은 전통적인 절기 가운데 그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 23장에 근거해서 매년 유대인들은 3차례에 걸쳐서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을 지키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흔히들 우리가 말하는 유월절의 또는 무교절이라 절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을 해방시킨 것에 대한 해방 감사절이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절기가 되면 유대인들은 누룩없는 빵을 먹으면서 이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또한 오순절 절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맥추절이라해서 유대인들이 밭에 뿌린 것에 첫 열매를 드리는 첫 추수 감사절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절기는 장막절 수장절이라해서 그들은 그들이 일년동안 수고하여 파종한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고 저장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광야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은 이 장막절이 되면 광야에 나가서 한 주간을 장막을 치고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절기를 지킨다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키는 몇 가지 중요한 절기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아주 중요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 특별히 구라파의 기독교에서는 추수감사절을 그렇게 중요시 여기지 않고 성탄절 부활절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키는 이 성령 강림절을 사실 가장 중요하게 지킵니다. 왜냐하면 이 성령 강림절은 교회가 이 성령 강림절을 통해서 탄생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은 어떻게 보면 다 감사의 절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미국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아주 강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한국 교회도 교회 절기 가운데 추수감사절을 아주 중요시 합니다만 유럽의 기독교에서는 추수감사절보다 이 성령 강림절을 더 중요시 여기고 그래서 성탄절 부활절 성령 강림절 이 3대 절기를 중요히 여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 성령강림절을 많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 강립절을 흔히들 오순절이라 이렇게 사용을 하는데 이 오순절을 사실 유대인들이 지키는 맥추절 절기와 같습니다. 이 오순절이라는 말은 50번째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난 뒤 유월절에서부터 계산해서 50번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합니다. 그래서 이 날을 흔히들 팬타코스트라고 불어기도 합니다만 우리 기독교에서 이 성령 강림절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오순절날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유대인들은 유월절에서부터 50번째 되는 날을 소위 말해서 오순절이라 지키지만 기독교의 성령 강림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지상에 머무셨고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열흘만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50번째 되는 날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유월절부터 이 오순절까지는 50일째가 되는 또 유대인들이 지키는 오순절절기에 바로 성령님께서 임했기 때문에 흔히들 우리 기독교에서 오순절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이것은 우리 기독교적인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성령 강림절이라고 불러야합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계산을 하면 이 날은 주일날이 아니고 내일이 됩니다. 그래서 유럽 교회들은 성령강림주일이 지난 월요일을 전 국가적으로 공휴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 50번째 되는 날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랬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이렇게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는데 천하 각국에서 왔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인 사도들이 하는 그 말을 다 알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한번 7절,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다 놀라 기이히 여겨 가로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쩜이뇨”예수님의 제자들 특별히 갈릴리 사람들 베드로를 위시한 그 무식한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거하는 부활의 증언이 듣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난 곳 방언으로 그 말을 알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이 세계가 넓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모여들었던 사람들을 9절부터 보면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유럽지역에서 모여들었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 유월절이나 오순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유대교에 입교한 외국인 들이나 또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려 이백만 정도가 예루살렘에 운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그때 사도들에게 성령 충만케하시고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 방언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로 말미암아서 교회가 소란하고 질서가 허물어지고 유익을 얻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방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이 방언과 소위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나는 방언과는 좀 성격이 다릅니다. 많은 학자들이 사도행전 2장에 이 방언 사건은 단 1회적인 사건으로 본다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나는 방언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으로 이해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이상한 소리로서의 방언이라고 본다면 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으로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 갈릴리 촌사람들 무식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그 말을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말로 다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장에 이 사건은 그 당시에는 동시 통역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지만 갈릴리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그 말을 5절에 보면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들의 말을 자기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허물어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의 장벽을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고계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의사소통은 언어라는 매체가 아니라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 이심 전심으로 의사 소통도 가능할 것이고 손짓 발짓으로도 의사 소통이 사실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단절의 역사가 생겼고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화해의 역사, 즉 서로 소통의 역사가 이제 전개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방언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기도를 하라고 방언을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방언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방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나 다른 무식한 제자들이 기껏 사용하는 언어라 해봐야 히브리어 밖에는 없었습니다. 사투리 아랍어를 섞어서 썼습니다. 그런데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하는 무식한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정도 되면 그 당대에 최고 엘리트였고 학자였기 때문에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헬라어도 히브리어도 라틴어도 여러개의 외국어를 구사할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식했기 때문에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구원의 그 복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방언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방언이 내가 하는 방언이 복음 전도에 유익한가? 그리고 내가 하는 이 방언이 교회에 유익한가? 그리고 내가 하는 방언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하는 방언을 방언의 통역 은사를 받은 자가 통역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을 가지고 우리는 방언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일어난 또 다른 한 사건은 아주 비겁하고 겁이 많았던 사람들이 아주 담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 비겁하던 자들이 담대하게 되었고 하나되었습니다.
12절 13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을 하고 성령 충만한 모습을 보면서 새술에 취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평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도행전 2장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체포되는 그 체포 현장에서 가장 비겁한 태도를 취했던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제판받는 그 제판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런 겁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끌려가 재판받는 과정에서 다 도망가서 자신들이 호언 장담했던 그 말을 지키지 못했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겁한 사람들이 이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하고 난 뒤에 하나같이 담대해졌습니다. 겁이 없어졌습니다. 담력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하나같이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렇게 겁 많던 겁쟁이가 그렇게 담대하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가졌고 믿음을 회복했고 용기를 가졌고 담대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우리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우리의 행동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그리고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것이다하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권능을 받았고 그들은 땅끝까지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하는 그런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체포되고 난 뒤에 또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비겁하게 문을 잠궈놓고 숨어서 지냈습니다. 혹시 자기들 신변에 어떤 위협이 닥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그들은 담대해졌습니다. 그들은 용감해졌습니다. 그들은 겁이 없어졌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술에 취하면 사람이 겁이 없어집니다. 뭐 새앙쥐가 술독에 빠져서 술을 가득 마시고 나와서 고양이 나와 이렇게 호통을 쳤다는 우스게 소리가 있는것처럼 평소에 겁많은 사람 기를 잘 펴지 못하는 사람이 술 먹고 난뒤에 술기운을 빌려가지고 담대해지는 그런 모습을 보는데 정말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이렇게 담대해졌고 사실 자신 만만하게 나가서 복음을 증거했던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가 가끔 교회에서 전도를 하러 나갈 때 전도하러 나가는 것을 너무너무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나.. 창피스러워서 어쩌나.. 우리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어쩌나..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 낙담과 낙심 가운데 빠져있던 사람이 용기를 얻습니다. 힘을 얻습니다. 어떤 문제속에 전전긍긍하던 사람이 그 문제에 해답을 찾아서 담대하게 나서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는 보게됩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정말 세상 삶에 찌들리면서 힘들고 어려운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낙담하고 절망하고 좌절감에 빠져있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성령 강림 주일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성령 충만함을 받고 담대함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방이 꽁꽁 막혀있어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나는 다 걸렸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절망감에 빠져있는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 사방을 돌아보지 마시고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방은 꽁꽁 막혀있지만 하늘은 항상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열린 하늘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문제 속에 얽혀서 주저 않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어떤 문제도 그 문제속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세상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닥치는 문제는 믿음의 열쇠로 풀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밭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또 극동 방송을 청취하시는 우리 청취자님들께서는 정말 성령 충만함 가운데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처럼 새로운 믿음을 회복하시고 새로운 힘을 회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되었다-유뮤상통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나와 너를 갈라 놓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나와 너를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서로 갈라져서 분열하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를 하나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사회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가만히 보면 소유에 너무나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게됩니다. 부모와 형제가 다투고 형제와 형제가 다투는 모습을 보면 소유에 너무 집착할 때 그리고 이기심의 노예가 될 때 거기에는 많은 분열이 생겨납니다. 우리 한국에 돈 많은 사람들, 제벌의 이세들이 형제들간에 법정투쟁을 벌이고 싸움을 하고 등을 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질때문인 것입니다. 소유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더 생각을 넓힌다면 우리의 사고만 바꾼다면 이 세상의 소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유의 문제를 극복합니다. 소유의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이 사도행전 사건을 가만히 읽어보면 사도행전 2장에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자들이 각기 자기것을 자기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 사도들의 발 앞에 가지고 나와서 각각 필요에 따라서 그 물질을 사용했다는 중요한 기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요하고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랬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고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 그들은 함께 매를 맞으면서 함께 고난을 당하면서 함꼐 옥에 갇히면서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기뻐하고 찬송했었던 것을 보게됩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파벌이 생깁니까? 교회에서 왜 지방색이 생기고 문제들이 생깁니까? 그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한 하나의 증거일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다면 교회가 온전히 하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는 것 우리 한국 교회만큼 성령을 많이 이야기 하는 교회도 없지만 한국 교회만큼 이렇게 많이 분열되어 있는 것은 우리는 성령을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분열시키는 영이 아니라 성령은 화해시키는 영이고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잘 믿는 며느리와 예수 잘 믿는 시어머니가 갈등을 하고 있다면 그 두사람은 분명히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형제와 형제와 부모와 자식이 성도와 성도가 하나되지 못한 그 모습은 바로 성령 충만하지 못한 불행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니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안에 하나되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할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