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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돈을 벌었을 때 (계 0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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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인데, 오늘날 터키의 Akhisar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아주 유명한 특산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자주색 염료였습니다.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 이 염료는 Turkey Red라는 담쟁이식물의 뿌리에서 채취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주색 옷감은 매우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두아디라는 이 특산품으로 말미암아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었고, 활발한 산업활동 때문이었는지 협동조합이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맨 처음 믿은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여자였습니다. 즉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생산된 자주색 옷감의 빌립보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이 두아디라에 있던 교회는 여러 가지 구제활동이나 선교사업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서 사업이라는 말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선한 사업, 선행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기능 중 중요한 한 가지는 봉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과 상관없이 담을 쌓고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대사회적 책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 자체가 그대로 하나의 종교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회적 위치나 역할과 꼭 동일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에 매우 강조되어 있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에 대한 배려가 바로 그것입니다.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모아서 바로 그런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추수할 때 밭 모퉁이에 있는 곡식은 거두지 않고 그대로 놔두어야 했습니다. 밭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추수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이라도 거두어다가 먹고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땅의 안식년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매7년마다 경작을 하지 않고 땅을 놀려야 했는데, 씨를 뿌리지 않았어도 저절로 난 곡식들이 상당히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느냐? 이것 역시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규범들이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제대로 시행이 되고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선지자들의 책망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이것들이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의 백성 공동체가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한 신약의 교회 역시 이러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먹고 마시는 단체가 아니라 땀흘려 일하고 수고하는 단체입니다. 혜택을 받아 누리는 단체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고 나누어주는 단체입니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지 그렇지 못한지는 그 교회가 하는 일을 보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자꾸 일을 만들어내고 바쁘게 그 일들에 매달려 있다면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권투선수가 펀치를 많이 날린다고 해서 그것들이 다 점수에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교회가 하는 일이 남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인지, 아니면 우리끼리 먹고 마시는 일인지 구별이 되어야겠지요. 어떤 분들은 교회의 예산이 교회 자신을 위해서 대부분 사용되는 것이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 예산의 50% 이상을 교회 밖의 일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 교회들도 종종 있습니다. 50%는 다 못해도 30%는 교회 밖의 일을 위해 쓰기로 한 교회들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올해 우리교회 예산을 보면 거의 90%가 교회 안의 일을 위해 사용되도록 되어 있더군요. 우리 형편이 교회 안에 필요한 경비도 다 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내년부터는 어찌됐든 먹는다거나 하는 소비적인 일에 들어가는 돈은 최대한 아끼고, 섬기고 나누는 일에, 그리고 교회 밖의 일에 좀더 배정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 돕는 일도 좀더 열심히 하고, 어제 MTC 졸업식에 가서도 보니까 학교가 많은 후원자들에 의해 세워져 가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도 후원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교장 선생님 오셔서 설교해 주시라고 부탁드리기도 부드럽지 않겠어요?

두아디라 교회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교인들도 염색관련 직종에 종사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물질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일을 많이 하게 되고,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으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일할 기회와 능력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 있어도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손에 돈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매우 잘 이용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돈이라는 것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가도 없게 되고, 또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돈이지요. 중요한 것은 있을 때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돈 좀 더 벌면 좋은 일도 하지.' 하고 있다가 돈을 더 벌기는커녕 있는 것까지 말아먹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때 그것이라도 있을 때 좀 할 걸.' 이렇게 되겠지요.

우리가 다 풍요하게 잘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먹고살 만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수준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요. 우리보다 없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삯바느질을 하던 할머니가 수억을 대학에 기부한 경우도 있고, 뻔한 월급쟁이 생활에 십수년 동안 남몰래 소년소녀 가장들을 도와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재물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잠 3:27)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손에 선을 베풀 힘을 주셨는데, 그 힘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만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선행을 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베풀고 섬긴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거기에 필요한 것이 사랑과 믿음입니다.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의 사랑과 믿음을 인정하셨어요. 사랑하는 마음 없이 자기 희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믿음이 없이 묵묵히 섬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선행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거기다가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내입니다. 처음 한두 번 선행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들의 칭찬에 고무될 수도 있고, 설령 남이 몰라주어도 자기만족이 선행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행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을 시작했다가 지치는 수가 있어요. 교회에서 선교사를 돕기로 했다가도 지쳐서 중간에 그만두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어땠는지 보세요. 주님 말씀이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하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고 월급을 10만원 받았어요. 신학교 등록금이 한 학기에 65만원이었구요. 월급을 다 모아도 등록금이 안되지요. 그렇게 얼마 동안 살다가 다른 교회로 옮겼는데, 이 교회에서는 월급으로 25만원을 주고 등록금까지 대주는 거예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 손에 베풀 힘이 있구나' 생각하고 당시 선명회(월드비전)를 통해서 한 아이 후원자가 되었어요. 그렇게 몇 달 후원을 하는데, 그게 처음 마음먹었을 때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10만원 받다가 25만원 받으니까 엄청 많이 받은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것으로도 세 식구 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2만원 후원하는 게 갈수록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한번은 후원금 입금하러 은행에 갔다가 그 2만원을 잃어버렸어요.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그 후로 후원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요.

얼마 전 여선교회 회원 한 분이 월드비전을 통해서 한 아이를 후원하겠다고 하셔서 제가 대신 신청을 했더니 후원자 팩을 보내왔습니다. 여기 보면 후원하게 될 아이의 사진과 신상명세가 들어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생일에 카드나 선물을 보낼 수도 있구요. 사정이 허락된다면 아 아이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까지 가서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월 후원액는 33달러예요. 저는 우리 성도들의 모든 가정에서 이런 아이 하나씩 후원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최소한 그 정도 베풀 힘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쓸데없는 데 쓰지 않고, 또 쓰지 말아야 할 데 쓰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장로님과 낚시를 갔다오다가 속도위반으로 경찰에게 걸렸는데, 그 자리에서 120달러가 날아갔어요. 잠깐 실수로 120달러를 날리기도 하는데, 착한 일 하는 데 한 달에 33달러 못 내놓아서야 되겠어요? 이 다음에 여러분 가정에 심방을 가보면 집집마다 이런 아이의 사진이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했던 두아디라 교회에도 책망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상교회는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흠이 있고 실수가 있습니다. 그런 잘못들은 책망을 받고 고쳐나가야지요. 한두 가지 잘못이 있다고 그 교회가 버림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해서도 안됩니다. 요즘 여의도순복음교회나 광림교회가 한두 가지 잘못으로 아주 나쁜 교회처럼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지만, 너무 그러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해서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그 교회를 아예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부쳐도 안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못하는 아름다운 일들을 그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합니까? 단지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단면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책망받을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남을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감추어진 비리와 죄악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잘못은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왕비입니다. 나라의 국사가 한 여자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시대였지요. 두아디라 교회에 이와 같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여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도자가 여자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매우 남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고려대학교에서는 개교 115년만에 처음으로 여자 총학생회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이미 작년에 여자 총학생회장이 배출되었구요. 여자의 지도력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국민들도 이제는 여자 대통령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합니다. 지금 두 남자 사이에서 대통령을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이 다음에는 여자를 대통령으로 뽑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데... 두아디라 교회에서 여자의 강력한 지도력이 문제가 된 것은 그 여자가 선한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향 시돈에서 가져온 바알종교를 이스라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여호와종교를 말살시키려고 했던 이세벨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여자 지도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악한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 여자의 강력한 리더십에 끌려갔단 말이지요.

바울은 교회 안의 여자의 리더십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입니다. 바울 주변에 훌륭한 여자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자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바울이 보기에 당시는 아직 여자의 리더십이 제 역할을 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여자들의 교육수준이 남자들에 비해서 턱도 없이 낮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공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조용히 물어보라고 했어요. 지금 우리는 사정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여자의 교육수준이나 지도력이 남자보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여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행사되고 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제가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닙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도 아니예요. 그렇지만 여자편에 서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강력한 여자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저도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집니다. 여자의 리더십은 꼭 필요하고 또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암탉이 울어야 알을 낳지요. 그러나 정도를 지나치면 안됩니다.

어쨌든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여성의 리더십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별력 문제였습니다. 교회 안에 제시된 리더십이 교회를 세우는 것인지 파괴하는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갔던 것이지요. 교회 안에 침투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 이것이 강력한 지도력을 수단으로 삼고 교회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 이런 사람이 사탄의 포섭 우선 대상자가 되겠지요.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돼요. 어느 틈으로 사탄의 흉계가 스며들어오고 있는지 잘 살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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