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숨은 의인들 (계 03:1-6)

첨부 1



숨은 의인들 (계 3:1-6)

주님이 다른 교회들에게는 먼저 칭찬을 하신 다음에 책망을 하시는데, 이 사데 교회에 대해서는 다짜고짜 책망부터 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이름이 있지요? 이름이란 누군가를 부를 때, 또는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름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게으름뱅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의 성품이 매우 게으르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이름은 어떤 객체가 다른 것과 구별될 수 있도록 하는 편의를 위해서 붙여진 것뿐만이 아니라 그 객체의 성질을 묘사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 심사숙고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사람이든 지역이든, 이름에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고한 천사는 그 오실 메시야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했습니다. 왜 구세주의 이름이 예수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뜻의 예수가 이름이 된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이름을 지었다면 '김구원'쯤 되었겠지요? 다 늙은 할머니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까 사라가 웃었습니다. 그랬다고 하나님께 들켜가지고 단단히 혼이 났어요. 그런데 정말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웃음이 떠나지를 않게 됐어요.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어요.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불렀겠지요? '얘, 웃음아, 가게에 가서 우유 한 병 사오렴. 웃음이 너, 왜 울었어?' 그렇게 웃음이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늘 되새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웃음이라는 이름은 단지 그 아이를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존재의미였던 것입니다. 형을 단단히 골탕먹인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고 벼르던 형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지친 몸을 땅바닥에 눕히고 그만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얼마나 놀랐던지,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어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구나. 그 후로 야곱은 그의 인생여정에서 힘들고 낙심될 때마다 이 벧엘을 기억합니다. 이 하나님의 집은 그의 꿈과 믿음이 회복되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없어져버리거나 또는 그 이름에서 기대하는 것과 아주 다른 것이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가령 이삭이라는 아들이 점점 커가면서 부모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골칫거리가 되고 부모의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만드는 아들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름을 웃음에서 울음으로 바꿔야 할까요? 벧엘, 그 하나님의 집에 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땅을 더 이상 벧엘이라고 부를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한번은 오후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정신 없이 잠이 들었던가 봅니다. 점심을 먹은 후여서 눈은 자꾸 무거워지고, 세계사 선생님의 옛날 이야기는 자장가로만 들렸겠지요. 그런데 누가 날 깨워서 일어나 보았더니 선생님이 눈을 부릅뜨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더니 제 이름표를 보셨어요. 당시 저희는 하얀색 마름모꼴 아크릴에 한자로 이름을 써넣은 이름표를 달고 다녔는데, 제 이름을 보시고 그 선생님이 '이름이 아깝다, 이 녀석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굉장히 마음을 찔렀습니다. 종아리를 몇 대 맞거나 벌을 서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팠어요.

지금 우리 주님이 사데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름이 아깝다, 이 이름값도 못하는 녀석들아!'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평판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능력의 현장, 겸손하고 성숙한 성도들, 정통한 교리, 생동감 있는 예배... 모든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정말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매우 다릅니다. 평판은 살아 있는 교회, 좋은 교회였지만, 주님의 평가는 죽은 교회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주님 보시기에는 죽은 교회가 사람들의 눈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교회로 비쳐질 수 있었을까요? 결국 그들은 위선의 대가였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들의 경건도 죽은 것이고, 그들의 기도와 선행도 모두 가짜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열심도 있었고, 사람들 보기에는 아름다운 사랑도 있었지만, 주님이 인정하실 만한 중심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매우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교회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름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 집사라는 이름을 가진 분도 있고, 장로라는 이름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또는 신앙생활 10년이라는 이름, 혹은 20년, 30년의 이름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10년, 20년을 떠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너 남들 보기에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음 믿음만 가지고 있구나.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죽은 경건, 능력이 없는 경건만 가지고 있구나. 교회에서 맡은 직책은 거창한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죽어 있구나.' 혹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책망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우리의 이름에 합당한 믿음, 이름에 합당한 행위로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의 적당한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데 교회가 그렇게 형편없는 교회였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살았지 실제로는 죽었다고 판정될 정도의 사데 교회가 그래도 다 죽어 자빠지지 않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형편없고 죽어버린 사데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의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 명이 거기 있었고, 그들은 주님께 합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숨어 있는 의인들 때문에 사데 교회가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단 안에 의인들이 있다는 것은 그 집단의 축복입니다. 만약에 소돔 성에 의인 다섯 명만 있었더라면 하늘에서 불이 쏟아져 망하게 되었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돔 성에 악이 가득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거기에 다섯 사람의 숨은 의인도 없었다는 것 역시 큰 비극이었던 것이지요. 이 숨어 있는 의인들은 눈에 금방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은 타락과 부패입니다. 모두가 다 타락하고 부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절망과 비관에 빠지게 됩니다.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본 엘리야는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악독한 왕비 이세벨에게 모조리 붙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4). 이제 자기까지 붙잡혀 죽으면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사라지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더 이상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엘리야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궁내대신 오바댜가 선지자 100명을 50명씩 둘로 나누어 굴속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 100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엘리야는 모든 선지자들이 다 붙잡혀 죽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렇게 많은 선지자들이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다 할지라도 이 선지자 100명만 있으면 백성들을 다시 돌이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100명의 선지자들이 전국에 흩어져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부흥회를 열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조그마한 나라가 떠들썩하게 확 뒤집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선지자 100명만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 보기에는 온 백성이 다 하나님을 떠나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신실하게 경외하는 사람 7,000명을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온 나라에 바알의 깃발이 휘날리고, 산마다 언덕마다 세워진 바알의 신당에서 백성들이 무릎을 꿇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숨은 의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의 상황이 무척 염려할 만한 것이라고 진단됩니다. 겨우 회복이 되는가 싶던 경제는 다시 추락을 거듭하고 있고, 정쟁은 마치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본받은 듯 의미도 없고 이슈도 되지 않는 소모전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도덕적, 영적 수준은 날이 갈수록 바닥으로 치닫고 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작년 한 해 동안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 할 교회마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빌미를 스스로 만들어냄으로써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그 안에 많은 숨은 의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입니다. 그래도 새벽마다 부르짖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려지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탄식이 하나님의 귓전에 울리고 있습니다.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렇게 숨어 있는 의인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우리가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 숨어 있는 의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어딘가에 숨어 보이지 않는 의인들 때문에 그 혜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이 바로 그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는 의인들인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알지 못했던 100명의 선지자와 7,000명의 의인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 의인들이 누구이며, 또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이 숨은 의인들,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살리는 생명이며, 우리 교회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그 의인들을 보시고 온 사회와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습니까? 몇 안 되는 이 의인들은 죽은 사데 교회의 생명이었습니다.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교회가,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앞에 나서서 '나를 따르라'며 큰 소리를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을 부르짖으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굴속에 숨는 것입니다. 숨어 나타나지 않은 채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숨어 있는 의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숨어 있는 의인들을 보시고 악하고 패역한 세대를 참으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할지, 언젠가는 나서서 개혁의 주체가 되고 소리를 높여야 할 때가 있을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그 숨어 있는 의인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침묵하고 있을망정, 밖에 드러나지 않을망정, 그 의인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 집단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우리 교회 안의 숨어 있는 의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여러분이 속한 집단과 사회 속에 숨은 의인으로 존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