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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숫자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계 0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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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주에 이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지요? 좋은 이름이나 의미가 깊은 이름도 있고, 그저 돌쇠, 먹쇠 같은 별 의미 없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특별한 이름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라는 도시에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미국 동부의 펜실베니아 주에 필라델피아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펜실베니아 주는 일단의 청교도들이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가 세운 식민지입니다. 지도자였던 William Penn이 자기 이름을 따서 펜실베니아라고 했는데, 그 식민지의 수도 이름을 필라델피아라고 지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필라델피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필라델피아는 필로스라는 단어와 아델포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필로스는 사랑이지요? 아델포스는 brother, 형제입니다. 그러니까 필라델피아는 형제사랑이라는 뜻이지요. 이 도시는 BC 2세기에 버가모의 왕 유메네스에 의해 세워졌는데, 이 왕에게는 아탈루스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아탈루스는 왕인 형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에게 충성했던지 필라델푸스(Philadelphus), 즉 형제사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메네스는 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동생 필라델푸스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징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지요? 우리는 숫자가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리예요. 민주주의의 원칙을 다수결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숫자의 능력과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부시와 고어는 숫자가 자신들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실천해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한 표라도 더 얻은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즉 많은 것이 강한 것이지요. 그리고 강한 것이 이깁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 이것이 철칙입니다. 또 힘이 있어야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그 현실은 믿음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힘이 있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교회 안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상목표는 성장이 되었어요. 빨리 성장해서 대교회가 되는 것, 이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엊그제 코스타에 가서 김동호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분 말씀 가운데 6억을 들여서 개척교회 예배당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교회는 5천만원 빚을 못갚아서 애써 지은 예배당을 경매로 빼앗기는 수도 있고, 태풍에 날아가 버린 지붕을 수리하지 못해 애태우는 농촌교회도 많은데, 교회가 크니까 그런 큰 일도 하는구나, 결국 숫자가 구원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교회주의, 성장지상주의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숫자가 큰 일을 한다는 현실적인 측면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6월에 안디옥 개신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한국의 안디옥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라는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처음으로 실천에 옮겼던 그 안디옥에 개신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프랑스 영사관과 은행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매입해서, 개신교의 선교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터기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아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했는지 아십니까? 한국사람들이 했어요. 더 좁혀서 말한다면 서울의 광림교회가 했습니다. 세계가 놀랄 일이지요?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와 월드비전 국제총재 같은 분들이 함께 참석해서 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크고 힘이 있으니까 그런 놀라운 일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역시 숫자가 구원하는구나 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그런 숫자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힘이 없다는 것이 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라도 되는 양 무사안일에 빠지기도 합니다. '야, 우리는 언제 그런 일을 해 보나?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동안교회나 광림교회에게 큰 칭찬을 하시고 상도 많이 주실 것인데, 우리 교회는 한 일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어서 어떡하나?' 하면서 비애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 같은 작은 교회가 무슨 선교를 해? 우리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열매 없는 것을 정당화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었어요. 동안교회처럼 100억짜리 예배당을 지었던 교회도 아니고, 광림교회처럼 이슬람 국가 속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울만한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들이 가진 것은 매우 적은 능력이었을 뿐입니다. 작은 교회였고, 많지 않은 성도들이 생존의 문제와 싸우던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좋은 선생들에게 잘 배워서 지식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두아디라 교회처럼 돈이 많아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하나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았다는 말이지요. 빌라델비아 교회는 숫자가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식에 뛰어났던 에베소 교회도 큰 책망을 받았고,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던 사데 교회도 철저하게 실패했고, 스스로 부자라 여기며 숫자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라오디게아 교회도 형편없는 교회임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숫자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환상일 뿐이었습니다.

적은 능력으로 큰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십시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에게는 의지할 숫자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큰 숫자가 있었다면 그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의 힘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 숫자가 자기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죽이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교회가 크고 숫자가 많다면 그 숫자를 믿고 좀더 버티는 것은 그래도 좀 나았을지 몰라요. 반면에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힘도 없었고 믿을 숫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믿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지요.

통계 수치라는 것은 정확한 현황을 파악하고 과거의 평가와 미래의 계획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힘과 권력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에 숫자 부풀리기가 자행되지요. 미국 텍사스 주의 남침례교 신자 수는 텍사스 주의 인구보다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텍사스에 남침례교가 가장 큰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장로교도 있고, 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같은 다른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숫자 부풀리기가 심하다 보니까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장자교단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교단보다 신자수가 좀 많다고 장자가 되는 것입니까? 장자교단이라는 단어 속에는 숫자가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교만과 아집도 함께 들어있지요. 장자라면 집안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야 장자 아닙니까? 그렇지도 못하면서 키만 크다고 장자라고 우기면 누가 인정하겠어요? 누가 장자교단 시켜주었습니까? 다른 교단들이 나는 둘째 아들 교단, 나는 셋째 아들 교단이라고 하면서 자칭 장자교단을 형님처럼 모시고 있습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자기들만 스스로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니에요? 또 하나 웃기는 사실은 그 장자교단이 하나가 아니라는 거예요. 쌍둥이라도 장자는 하나뿐일텐데, 서로 장자라고 우기니 대법원에서 결정을 해야 할지 국회에서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람의 관점과 기준으로 본다면 구원은 숫자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한번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통에 넣었습니다. 부자가 많은 돈을 헌금했다는 것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만큼 헌금도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문제는 그 헌금의 액수, 즉 숫자가 구원하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한 과부가 헌금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엽전 두 냥을 헌금통에 넣었어요. 엽전 두 냥은 숫자에 들지도 않습니다. 부자들의 헌금에 비하면 새 발에 피도 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숫자 계산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과부가 다른 부자들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며 너도나도 다 엽전 두 냥 들고 나오는 사태는 없겠지요?

달란트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힘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기 쉬워요. 100만원 버는 사람이 10만원 십일조 하기는 쉽습니다.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10만원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1억을 벌었어요. 1000만원 십일조 하려니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결국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100만원만 냅니다. 그래도 전에 내던 10만원에 비하면 10배나 많은 숫자 아닙니까? 그래서 그만하면 많이 한 것 아니냐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신을 정당화시킵니다. 숫자의 장난에 속아넘어간 것이지요. 100만원 벌어 10만원 낸 것과 1억 벌어 100만원 낸 것 중 어느 것이 많습니까?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교회는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할까요? 적은 능력을 가졌을 때 그것으로 죽기살기로 주님께 충성하면, 그것을 보시고 주님이 무척 흡족해하십니다. 큰 능력을 가졌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큰 능력을 가지고 죽기살기로 주님께 충성하면, 역시 주님이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큰 능력이 있을 때는 죽기살기로 하지 않게 돼요. 그렇게 죽기살기로 하지 않아도 큰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과부의 헌금은 비록 엽전 두 냥이었지만, 그것은 죽기살기로 드리는 헌금이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이 낸 많은 액수의 헌금은 죽기살기로 드린 것이 아니라 풍족하게 쓰고 남을 것이었지요.

숫자가 우리를 구원합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적은 능력이든 큰 힘이든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광림교회가 터키까지 가서 안디옥 교회를 세웠다면 큰 능력으로 큰 일을 한 것입니다. 동안교회가 자기 예배당 지으려고 모아놓은 6억을 털어서 개척교회 예배당을 지었다면 큰 힘을 가지고 죽기살기로 일했다고 인정받을 만하지요. 그러나 큰 교회가 꼭 6억이 아니라 6천만원만 들여서 개척교회를 지어도 큰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큰 교회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분량의 10분의 1만 해도 큰 숫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 숫자에 속아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하는 수가 많습니다.

자, 그럼 우리처럼 적은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 작은 교회, 돈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우리의 적은 능력으로 얼마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돈이 없어서 큰 일을 못한다? 큰 일을 못해도 좋아요. 작은 일이나마 열심히 충성스럽게 하면 됩니다. 작은 일이라고, 하찮은 일이라고, 몇 푼 안 되는 돈이라고 남들이 코웃음을 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부의 엽전 두 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그 하찮은 일, 몇 푼 안 되는 돈에 우리의 믿음과 충성이 담겨 있을 때 주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니까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속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 남들 돕는 일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적은 능력으로 주님께 충실했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우리가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큰 교회가 되고 큰 힘을 갖게 된다면 거기에 맞게 또 충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의 적은 능력을 귀하게 잘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적은 능력밖에 없었던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원수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적은 능력으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까? 한 아이의 도시락이 오천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는 결과를 가져왔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큰 능력은 없지만, 적은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손에 그래도 적으나마 능력이 있고, 큰 믿음은 못되어도 작은 믿음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 귀하게 여기고 그것으로 우리 주님께 충성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적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켜 원수를 굴복시키고 더 큰 어려움이 닥쳐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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