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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충 믿어 구원받으려는 사람들 (계 03: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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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믿어 구원받으려는 사람들 (계 3:14-13)

이제 우리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일곱 교회 가운데 아주 특별한 교회입니다. 다른 교회들은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들 칭찬을 받았고, 책망없이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는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이 책망만 받았습니다. 아무리 문제를 안고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장점이나 잘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이 교회는 어찌된 교회인지 책망받을 모습만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외부적인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부적인 분쟁이나 갈등도 없었습니다. 이단의 침투로 교회가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부유한 가운데 평온한 것이 이 교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어려움을 겪던 교회들은 칭찬을 받았는데, 오히려 평안하고 문제가 없던 교회는 책망만 받았다는 사실이 시사해 주는 바가 많지 않습니까?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공식으로 설명하면서, 적당한 강도의 도전이야말로 문명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도전이 없는 곳에는 문명도 쇠퇴하여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평온함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회로서 칭찬받을 아무런 좋은 모습도 가지지 못한 교회,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 집단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교회가 아시아의 대표적인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도무지 못마땅하기만 한 교회가 버젓이 교회의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교회도 있고 저런 교회도 있다 보니까 교회 중에 그런 교회도 있을 수 있어요. 정말 심각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분들이 이 라오디게아 교회야말로 전형적인 현대교회의 모습이라고 진단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많은 교회들이, 또 주님을 따르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특성과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 근처에 있는 도시였는데,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 골로새, 이 세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골로새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라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또 2장 1절에서는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바울은 에바브라가 세운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그리고 히에라볼리 교회를 아직 방문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교회들을 세운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이 교회들은 바울의 지도와 영항력 아래 있었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바울이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편지를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곧 큰 교회가 되어서 초대교회 당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주요한 교회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주요한 도시들로 동서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상업과 은행업이 매우 발달했고 도시가 부유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키케로도 이 라오디게아의 은행에 돈을 많이 예치했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유하다고 자만에 빠졌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요? 또 이 도시에 특산품이 있었는데, 검은색 양모로 만든 직물이었습니다. 양모 자체가 검은색이었는지 아니면 염색을 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아디라 사람들이 자주색 염료로 많은 돈을 벌었던 것처럼, 라오디게아 사람들 역시 검정색 양모로 좋은 돈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윤기가 나는 검은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영적으로 헐벗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구원과 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사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에 또 하나 특이한 사실은 의과대학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안과병원이 유명했습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눈이 보이게 하라는 말씀도 그들이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약 4마일 떨어진 온천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온천의 뜨거운 물이 수로를 통해서 라오디게아 도착하게 되면 식어가지고 미지근해졌습니다. 이렇게 번창했던 도시 라오디게아는 나중에 결국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온천 근처에 오늘날의 데니즐리(Denizli)에 해당되는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자리에는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진단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라오디게아의 수로에 흐르는 미지근한 물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더운 여름날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목이 말라 수통의 물을 마시려면, 수통도 열을 받아서 그 속의 물이 미지근해져 있습니다. 마시기에 아주 불쾌하지요.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물은 마시기에 얼마나 좋은 물입니까? 차라리 뜨거운 차는 식혀가면서 마시기에 좋은 물입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은 마시면 구역질이 나요. 주님 하시는 말씀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입에서 뱉어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시원하든지 뜨겁든지 해야 주님께 합당하다는 말이에요.

차든지 더웁든지라는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많은 학자들이 뜨거운 것은 주님을 위한 열심을 말하고, 차가운 것은 주님을 배척하고 떠난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문맥을 잘 보면 주님께서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신 것을 보아, 차갑거나 뜨거운 것은 긍정적인 요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시는 물은 차갑거나 뜨거워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여기서 차갑다는 것을 사랑과 감동이 없이 냉랭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차갑거나 뜨거운 것은 둘 다 주님을 믿고 섬기는 데 있어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모습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이 지나쳐서 뜨겁든지, 혹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교회를 순수하게 지켜나가는 데 있어서 일절 타협이나 양보가 없이 엄격하고 철저하게 행함으로써 차갑든지, 이것이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충 믿어서 될 일이 아닌 거예요. 만약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영혼의 문제를 좌우하고 영원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럭저럭 흉내나 내면서 예수 믿는다고 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지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면서 무엇을 걸고 믿습니까? 예수를 믿어서 사업에 성공할 목표를 가지고 예수를 믿습니까? 아니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인격의 성숙을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사업에 성공하는 것 이상의 열심과 정열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에게 욕 얻어먹지 않을 만큼만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필요도 없고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둘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본질이 어떤 형태의 눈에 보이는 현세의 축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임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중요하고 심각한 일에 관련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표가 나지 않아요. 일요일에 성경책 들고 예배당에 가는 것이 예수 믿는 표가 아니에요.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에요. 말로만 '주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정말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요일에 교회에 나와서만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날 살아갈 때는 세상 살기 편할 대로 살아가는 사람, 그야말로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하는 사람, 바로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교인처럼 행세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사람처럼 행세하는 사람, 도무지 자기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적당하게 예수를 믿어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고 아니면 아예 그만두든지 하는 게 나아요. 믿는다고 하면 정말 믿는 사람답게, 믿는 사람이 해서는 안될 행위 같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고, 또 믿는 사람이 해야 될 일 같으면 아무리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해야지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제대로 된 교인 아니에요? 십일조를 하는 것이 제대로 믿는 사람의 행위라면 해야지요. 얼마 안되는 돈 그것이 아까워서 십일조 못해서 제대로 믿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야 될 일입니까? 믿는 둥 마는 둥, 어떻게 보면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도무지 믿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이런 일 할 때는 믿음이 좋은데, 다른 일에서는 전혀 믿음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시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정신차리고 똑바로 믿어야 해요.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그런 자신들의 문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들 예수를 잘 믿는 줄 알고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 자신만만해요. 사실은 빈 껍데기밖에 없으면서 말이지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나 환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의 정도가 검증되고 시험을 받게 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산군이 총구를 들이대며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물어보는 경우가 없지요. 예수를 제대로 믿는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구별해 주는 사건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저 내면의 세계에서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자기 양심에 따라 그런 결단과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기 때문에 자기기만에 빠지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으로, 교회 안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충분한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실패한 교회, 그대로 두면 영 가망이 없는 교회, 그런 그리스도인을 주님은 책망하고 징계하십니다. 교회가 징계를 당할 때, 그것은 교회의 희망이고 회복의 시작입니다. 징계를 당한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신다고 했거든요. 칭찬받을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한 교회, 그저 추하고 못난 모습만 가지고 있는 우리를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적당하게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안 믿는 남편이 믿는 아내에게 그러는 수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열성으로 특별하게 믿느냐고 하지요. 물론 예수 믿는다고 동네방네 요란스럽게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잘 믿는 것이 아닐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적당히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영역의 일부분만을 예수 믿는 데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한 사람은 이렇게 믿을 수도 없지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데 있어서 회색(灰色)지대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지요. 마음 중 일부분 조금만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나의 뜻 일부는 나의 소유로 남겨두는 것,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다해서, 즉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는 일입니다. 대충 적당히 믿는 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역겨운 모습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가 그처럼 주님이 토하여 내치실 미지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그런 부분이 있다면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 맞이한 이 새해에는 우리가 제대로 믿는 사람들, 말로만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으로 증거할 수 있는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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