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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계 0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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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계6:1-17)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면 우선 '심판의 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성경에는 '심판'이라는 말이 3백 77회 나오는데 그 내용의 극치가 요한 계시록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물론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볼때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심판이 무섭기만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심판이 있기에 그것을 거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종말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심판에 관한 기록은 6장부터 16장까지 계속되는데 그 전개 방법이 아주 독특합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시는데, 하나씩 떼어 낼 때마다 심판의 정도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일곱 인으로 끝나지 않고 곧 이어 일곱 나팔로 이어지면서 심판은 더욱 더 무거워지고, 일곱 나팔이 지나면 다시 더 심한 심판의 상징과 징조가 일곱 대접으로 이어집니다. 즉 '인', '나팔', '대접'의 환상들이 계속될수록 점점 재앙의 심도가 깊어지고 그 크기도 점진적으로 확산됩니다. 마치 소라껍질의 무늬가 나선형으로 퍼져 나가는 것처럼 재난과 재앙이 연속적으로 확장됩니다. 저는 이것을 편의상 '점진적 반추' 또는 '점진적 반복법'이라 명명합니다. 또 각 환상들마다 여섯째와 일곱째 사이에는 길든 짧든간에 어떤 다른 보충적 설명의 환상이 삽입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인의 환상은 세상에 임하는 심판의 역사적인 원리와 그 흐름에 대한 것이며 일곱 나팔 환상은 말세에 있을 고통과 그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대접의 환상은 재앙의 끝을 맺는 결정적이고 강렬한 심판을 계시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통치 주권의 잠정 기간으로부터 종말에 있을 심판까지 폭 넓게 조망하고 있습니다. 우선 일곱 인 중 여섯째 인까지 공부합니다.
 
심판의 처음 징조는 전쟁과 내란
 
첫째 인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첫째 인이 보여주는 예언은 국제적인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그 상징은 '활을 가졌다'는 대목입니다. 활에 대한 얘기는 성경의 여러 군데에 나타나는데 '활을 꺽었다'는 표현은 평화를 상징하고 '활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면류관'은 3장 1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왕관이 아니라 승리의 월계관을 뜻합니다.
 
로마 제국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AD 67-79) 황제와 티투스(Titus, AD 79-81), 그리고 도미티아누스(Domitian, AD 81-96) 황제의 재위시까지 대단히 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대외 저항 세력들을 초기에 진압 시키고 지중해 연안 일대까지 점령해 로마 군대 앞에는 누구도 나설 수 없을 만큼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AD 62년에 수가 많지도 않은 파르티아 군대에게 패했다는 것입니다. 파르티아 군대는 활쏘기의 명수들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흰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로마 군대에게 패했으나 전열을 재정비해 로마 군대를 역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후 파르티아 군대는 로마 군대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첫번째 인에 등장하는 내용은 사도요한이 이 파르티아 군대를 연상하며 썼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이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색'은 피흘림을 상징하고,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는 것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회가 질서를 잃고 나라 안에서 분란이 일어나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도 내란으로 살해된 사람이 10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인류는 수많은 내란을 치르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왔습니까?
 
가뭄, 물가폭등, 빈부격차, 질병 등의 재난
 
세째 인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 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데나리온은 화폐의 명칭으로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 데나리온으로 밀이면 한말을, 보리이면 서말을 살 수 있었는데 세째 인에 나오는 저울로는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 또는 보리 석되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그 만큼 물가가 폭등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가가 단숨에 10배씩이나 폭등하는 이유는 가뭄으로 인하여 흉작이 되고 기근이 들기 때문입니다. 검은 색은 기근을 상징합니다. 기근이 몰아닥친 상황은 바로 '검은 색 말을 탄 자가 저울을 가졌다'는 상징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는 대목은 감람유와 포도주는 피해를 입지 않아서 (본래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는 땅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어지간한 가뭄에는 피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큰 폭리를 취할 것을 예고합니다.
 
한쪽에서는 기근에 허덕이는데 한쪽에서는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 빈부의 차이가 심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 사회에 불만 세력이 많이 생기고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럴때 다행히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심어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행여 좋아할 일은 못됩니다. 약탈과 살인의 대상은 바로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째 인의 상징은 성경이 경제학적으로도 깊은 안목을 가지고 씌여졌음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 날로 깊어가고 있는 빈부의 격차와 부자된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네째 인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청황색은 본래 시체의 색갈입니다. 네째 인을 뗄 때 일어나는 징조는 많은 사람들이 내란과 흉년, 질병과 맹수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죽게될 사람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땅의 사분의 일' 즉 네명 중 한명 꼴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연단과 인내가 거듭돼야
 
다섯째 인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다섯째 인의 환상은 순교자의 영혼들이 하나님께 하루 속히 믿지 않는 자들(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청하는 장면입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표현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피는 생명을 뜻하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몸뚱아리는 불 위에 태웠지만 피는 따로 받아 제단 앞에 부었습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하나님께 바쳐진 죽음으로 간주할 때 그들의 피가 제단 앞에 뿌려졌을 것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이 제단 앞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장면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느끼게 됩니다. 첫째는 맨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심판은 순교자와 같은 충실한 신앙인에게는 오히려 기다려지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청원이 순교자답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5.17 광주 민주화운동 때 장성한 아들을 잃은 한 신실한 권사님이 '내 아들을 죽인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며 몸을 떠시던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감히 기독교 정신을 들어 비판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과 아울러 숙연한 감정까지 갖게 됩니다. 그만큼 피해자의 심정이 현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승리를 상징하는 흰 두루마기를 내 주시며 잠시 동안 기다리라고 위로하십니다. '잠시 동안'이라는 하나님의 시간이 얼마 동안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을 아직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예수님을 증거하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죽음보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더욱 두려워 해
 
여섯째 인
 
아직 일곱째 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섯째 인은 가히 '인'환상이 보여주는 심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인을 떼니 그 징조가 일곱가지나 나오는데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총담(흑염소의 털로 짠 천)같이 까맣게 변하며, 달이 시뻘건 피 같이 되고,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 덜 익은 열매들을 떨어뜨리듯 힘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지진이라면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지만 나머지, 천체의 이변들은 상상만 해도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그뿐입니까? 그 무한대의 세계로 보이던 하늘이 두루말이 종이가 펴졌다 다시 말리듯 말려서 없어져 버리고, 산과 섬들이 쑥쑥 뽑혀 옮겨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일곱가지 사건에 대해서는 에스겔(19:12f.), 아모스(8:9-10), 이사야(13:10f.,34:1f.)와 같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 있고 예수님께서도 자세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24:29). 즉 그 심판들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심판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최고 권력자로부터 평범한 소시민, 종들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고 그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차라리 우리위에 떨어져 달라'고 호소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도 에덴 동산에서 죄를 범하고 난 뒤 나무뒤에 숨었습니다. 그들 역시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낯이 두려워 숨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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