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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와 성령의 사람 (행 0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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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혜와 성령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스데반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친히 하신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이 되리라(행 1: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저 멀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전파를 이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 지역으로는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사람으로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 하여, 다시 말해서 히브리말을 하는 히브리파 유대사람을 중심 하여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에서 5장은 베드로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5장 하반부에서 시작해서 7, 8장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파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역은 같은 예루살렘이지만 그 문화권이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는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대표자가 바로 스데반입니다. 지역 적으로는, 지정학적으로는 아직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만, 소위 말하는 문화권적 차원으로 본다면 그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히브리 문화권에서 헬라 문화권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 나라에도 상당히 여러 민족이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우선은 한국 문화권의 한국말을 사용하는 한국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기에는 중국사람들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를 믿게 하면 그 복음이 그대로 중국에 전파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과 쉽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 하는 사람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려 면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중국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로써 본토의 중국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아주 쉬워집니다. 이렇게 볼 때에 지정학적인 벽보다 더 무서운 벽이 소위 민족주의적인 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문화권적인 벽이 가장 무서운 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선교학에서는 Cross culture 라고 합니다. Cross culture--문화권을 넘어서 교역을 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날 한국말로 세계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말을 아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파를 타고 복음이 전해진다 해도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은 그 방송을 들으나마나 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이 문화라 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문화뿐입니까? 민족주의가 있습니다. 생활의 편견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세계관이, 자기 나름의 고집이 있습니다. 자기 민족의 문화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꽉 막힌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벽을 뚫고 나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와 있는, 히브리말이 아닌 헬라말을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지정학적으로는 복음이 아직 땅 끝까지 전파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헬라말로 복음이 설명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온 세계가 헬라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온 세계의 만국공용어가 영어입니다. 영어만 하면 그럭저럭 어느 나라에 가든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의 공용어는, 만국에 통하는 언어는 바로 헬라어였습니다. 때문에 헬라 문화권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적으로도 헬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인류역사를 잘 알고 있듯이, 헬라 문화권에 있는 유대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 가운데서 택한 일곱 사람에게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집사로 세웁니다. 이 일곱 집사는 어디까지나 구제와 봉사를 하라고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은혜가 충만하게 될 때에 그들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조용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 문화권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질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스데반은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로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빌립, 이 두 사람은 집사이면서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선교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집사의 직무를 했다는 말은 별로 없고 오히려 선교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스데반은 복음전파를 이유로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복음전파가 왕성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저들이 전파하는 그 도에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제사장들까지도 복종했다 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도(道)'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피스테이'라고 합니다. '피스테이'는 '믿음'이라는 말로, 여기에 정관사가 붙어서 '그 믿음'이 됩니다. '그 믿음'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도'라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에 사람들이 복종을 했다-이것은 기독교 교리를 대표하는 말의 하나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 도가, 이 진리가, 이 교리가 참으로 높은 권세를, 다시 말해서 왕권을 행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있게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두고 하나님 말씀이 왕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도에 복종했다,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증거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많아지고'-양적인 성장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라는 말에 대하여 한번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일반 교인을 의미하고, 열두 제자는 '사도'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의 '제자'는 교인을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 제자의 수가 더욱 심히 많아졌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서 점점 그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고, 심지어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장본인들, 그 무리들 가운데 허다한 수가 이제는 교회로 나오더라는, 예수를 믿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물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제사장의 수가 무척 많았습니다. 팔 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12반열로 나누어서 한 달씩 봉사하게 되고 남은 시간은 고향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계가 참으로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같이 질적으로 순수한 교회에는 당연히 양적 부흥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부흥'하면 질적 부흥만을 말합니다마는 질과 양은 항상 함께 하게 마련입니다. 정말로 순수한 교회가 되면 교회는 양적으로도 부흥하게 마련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양적으로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그 질에도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신도의 수는 적지만 그 질은 좋다, 틀린 말입니다.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그 질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왕성하게 되면 그 도는 능력을 얻어서 모든 사람을 다스리고 왕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교회가 교회 됨의 위상을 바로 하고, 교회 됨의 본질을 바로 할 때에 오늘 주신 말씀대로 그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성장의 원리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9절)'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회당은 히브리사람들의 회당이 아니라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을 의미합니다. 특수한 회당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무려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곳곳에 많은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이 회당은 좀 특수합니다. 다른 것은 히브리말을 하는 사람들의 회당이었습니다 마는, 이것은 헬라말 하는 사람들의 회당입니다. 유대 교민의 회당입니다. 원래 히브리사람이기 는 하지만 이국에 가서 오랜 세월 사는 동안 히브리말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헬라말을 하고 헬라 풍속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생각도 상당히 헬라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는 더 열심히 믿었습니다. 하나님도 더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회당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입니다. 그러니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란 이 회당에서 온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이어서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내용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 교민 출신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 여기에 적을 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헬라말 하는 사람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나타난 고유명사들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리버디노'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라틴어 '리베르티누스'의 준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해석해본다면 '리버디노'는 로마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다가 자유인이 된 사람들을 의미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에는 세 종류의 신분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과 노예와 자유인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각기 3분 의 1 정도씩으로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자유인'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언젠가 로마에 갔을 때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대답해주는 말인즉, 이 '리베르티누스'라고 하는 말이 바로 자유인이라고 하는 특수계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에 자유(liberty)를 얻어 서 '리베르티누스'가 된 것입니다. 이제 로마 입장에서 보니 자유인 이 된 그들이 귀찮습니다. 그래서 추방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추방을 당해 갈 곳이 없는 저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리버디노'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사람으로 살면서도 서자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리버디노-아주 특별한 무리입니다.
다음으로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저들은 각 지방별로 따로따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이 회당에서 모이고, 저 회당에서 온 사람들은 저 지방에서 모이고 말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몇십 년 전에는 이렇 듯 각기 모였습니다. 평양에서 온 사람, 신의주에서 온 사람, 신천에서 온 사람…… 이렇게 같은 서울 안에서도 각자 따로 모였습니다.
따로 모여서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그렇습니다래'하고 제 말, 제 풍속 사용해가면서 저들끼리 모였습니다. 좋지 않습니까? 피난민들끼리 모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들 역시 예루살렘에 뿌리를 두고 살면서 도 각 지방에 살던 사람들끼리 그들 나름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로마에서 온 사람들은 로마사람들끼리, 헬라에서 온 사람들은 헬라사람 들끼리,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들은 길리기아사람들끼리 모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왜 '길리기아'가 중요하냐 하면 사도 바울이 이 회당 출신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 태생이거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모임인 이 회당의 회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 복음을 헬라 문화권에 해석 전파해준다고 하는 것은 만백성에게 복음 이 전해진다고 하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커다란 선교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이 헬라 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흥미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9절)……' '설교할새'하지 않고 '변론할새'라고 합니다. '강론'이라 하지 않고 '변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 가 있는 것입니다. 헬라식 전도는 변론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말싸움입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원래 변론을 좋아합니다. 지구가 어떻다느니, 우주가 어떻다느니, 사람이 어떻다느니, 만물의 근원이 어떻다느니, 아르케가 어떻다느니 하고 토론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원래 철학 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말도 잘하고요. 이렇듯 서로 변론하기를 좋아하는데,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보니 스데반이 변론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했다는 말씀이 됩니다. 철학을 강해하는 것 같은 방법으로 토론을 하면서, 말싸움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는 것입니다. '더불어 변론할새'-이 변론은 debate 내지 argument로 서로 언쟁을 하는 토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공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분명히 스데반이 토론에는 이겼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10절)'라는 본문말씀대로 분명히 말싸움에는 스데반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진 사람들이 가만히 있던가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겨루는 운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경쟁심을 유발하는 운동을 합니다. 저는 앞으로 목사될 분들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운동을 하되 서로 마주서서 승부욕을 가지고, 승부를 가름하는 운동은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입니다. 가령 테니스나 탁구를 생각 해보십시오. 둘이 마주서서 운동을 할 때에 보면 공을 정당하게 잘 넘겨주면 되받아 치기도 잘합니다. 그런데 이기려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이기기 위하여 공에 스핀을 넣고 그것도 모자라 강하게 내려칩니다. 언젠가 제 아들놈하고 탁구를 하는데 도저히 못 당하겠어요. 강하게 내려치는데 라켓을 갖다대니 공이 그 자리에서 팽그르 돌고 말아요. 이렇게 해서 상대방을 이겼다고 해봅시다.
이긴 나야 기분이 좋겠지만 진 사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두고 보자'하는 마음이 들밖에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왜요? 공 을 정정당당하게 잘 주지 않고 비스듬하게 스핀을 넣어서 쳤으니까요.
말싸움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말싸움에 이긴 자는 비록 이겼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진 사람은 진 사람대로 기분이 나쁩니다. 점점 더 마음이 굳어집니다. 말싸움에 졌으니 이긴 저 사람을 우러러봐야겠다, 존경해야겠다-이렇게 신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옳다고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더욱 굳어질 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일찍이 경험했습니다. 그도 헬라파 유대인으로 변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데네에서 전도할 때에 변론함으로 결국은 아데네에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6:20)'하고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변론을 피하라여러 번 같은 말로 훈계했습니다. 변론하지 말 라, 말짱 헛것이다, 이겨도 소용없고 져도 소용없다, 변론이라는 방법으로 전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라고 당부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의 문제입니다. 기분 나쁘면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 문 닫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말싸움하지 말 것입니다. 싸울 듯하면 다른 방향으로 그 말을 돌려 중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싸움이 끝까지 가면 결국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아주 상당한 경험을 쌓은 뒤에 변론하지 말라고 권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했다고 합니다. 과연 무엇에 대하여 변론했겠습니까? 성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변론한 것 같습니다. 성전은 유대사람들이 가 장 거룩하게 여기는 곳입니다. 그들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런가하면 율법은 불변의 최고 규범으로서 저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두 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합니다. 변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자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만 7장에 서 보는 바 스데반의 증언 내용을 대충 훑어보면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스데반은 참성전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외형적인 건물이 아니다,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참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요 하늘에 있는 것이요 성령께서 계신 곳이요 말씀이 역사 하는 곳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 이 건물은 중요하지 않다, 라고 변론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들을 기분 나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율법에 대한 자기들이 가지는 전통적 해석을 소중히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이것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라고 변론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하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이 되신다고, End of the Law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해석이 결국은 저들의 마음을 거스르게 됩니다. 저들을 기분 나쁘게 만든 것입니다. 비록 바른 말을 했다 해 도 이것이 결국은 저들을 더욱 극악해지게 만든 것입니다. 성전을 모 독했다고, 율법을 모독했다고 하면서 스데반에게 죽이겠다고 대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전 모독죄요 율법 모독 죄로 사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역할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이상하게도 교회가 부흥할 때마다 핍박이 있었습니다. 핍박 속에서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핍박이 교회 부흥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부흥에는 늘 핍박이 따랐습니다. 핍박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핍박이 있을수록 교회는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박해와 교회 부흥은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스데반을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충만하다' 라는 말은 넘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릇에 물을 가득 담으면 넘칩니다. 물이 철철 넘칩니다. 그 넘치는 모습이 바로 충만입니다.
그 인격에, 그 가슴에, 그 영혼에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충만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에게 무엇이 충만했는지 본문은 다섯 가지로 말씀합니다.
먼저,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합니다(8절). 그리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다고 합니다(3절). 또한 믿음이 충만했다고 합니다(5절).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과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그런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함에 참지를 못했습니다. 그대로 전도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더불어 변론을 하고, 힘있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을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활활 불이 붙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8절말씀에 있는 '은혜'와 '권능'을 한번 자세히 비교해 봅시다. '은혜'라는 말의 헬라어는 '카리스'요, '권능'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뒤나미스'입니다. '카리스'와 '뒤나미스'는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카리스'를 영어로 직역하면 '은혜'라는 말의 'grace'가 됩니다. 이것을 다시 현대어로 바꾸어보면 'sweetness'가 됩니다.
'사랑스러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뒤나미스'를 영어로 직역하면 'powerfulness'가 됩니다. Sweetness와 Powerfulness를 한번 비교해보세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운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강하고 담대합니다. 은혜스러운가 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가 하면 사랑스럽습니다. 부드러 운 그 속에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펄펄 끓어오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모습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우락부락하지 않습니다. 사랑스럽습니다. 말도 온유합니다. 그러나 그 온유함과 겸손함 속에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그 행위에 엄청난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불굴의 용기가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스데반의 모습을 이렇게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스데반이라는 그 이름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스데반은 '스테파노스'에서 온 말로, '스테파노스'는 '왕관'을 의미합니다. 영 어로는 'crown'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름은 스데반의 부모가 지어주었겠지요. 이 이름을 지을 때에 앞으로 어떤 왕관을 쓸지 미리 알고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는 왕관을 썼습니다. 첫 순교자의 왕관을 썼습니다. 그런 면류관을 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첫 순교자'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승리자의 이름입니다.
또한 스데반에게는 예수님과 비교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거짓 증인에 의하여 고소 당했다는 점이 같습니다. '거짓증인들을 세우니(13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스데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처럼 거짓 증인을 세워서 고소함으로 돌에 맞아 죽게 합니다. 둘째로, 죽을 때에 원수를 향하여 기도한 점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스데반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죽으시기 직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 역시 하나님 앞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한 뒤에 죽었습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스데반과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같은 점입니다.
세 번째로, 끝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능력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는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죽으셨습니다. 스데반도 보십시오. 그 역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마는, 아마도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능력을 행했을 것입니다. 많은 이적과 능력을 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그대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죽어 가는 시간에 능력을 행함으로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장님이 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능력을 행하는, 권능의 사람이었지만 굴욕의 그 순간에는, 죽음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털 깎는 자 앞에 서 조용한 양처럼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참증인의 모습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10절)'-스데반은 변론에 강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능히 당치 못했다면 스스로 굴복함으로 예 수를 믿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반발해서 마침내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저들은 로마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로마사람에게 의뢰하지 않고 스데반을 직접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그만큼 극성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있었어도 사형선고와 그 집행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선고는 로마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도 보면 예수님을 로마사람에게 넘겨서 빌라도로 하여금 재판해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자기들이 누군가를 끌어다가 죽이는 것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저들은 스데반을 끌어다가 직접 돌로 쳐죽이고 있습니다. 로마의 법으로 보면 그들도 사형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로마의 법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아주 극악하게 발악적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스데반을 죽여야 했을까요? 왜냐하면 이것은 지성인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지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도무지 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 같았으면 '이 무식한 것들'하고 내버려 둘 수도 있습니다. 율법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니까요. 무식한 놈들 떠드는 거다, 하고 돌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상대할 것이 못된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는 확실한 지성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도 보면 논리적으로 전합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마는,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를 보면 얼마나 논리 정연한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성경 구절구절을 인용해가면서 설교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이러한 지성적 신앙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그냥 감정에 떠드는, 생각 없이 떠드는 신앙이라면 얼마든지 일축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신앙은 한마디로 체험적 신앙이요 철학화한 신앙이요 논리화한 신앙이요 확실한 지식으로 정리된 신앙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당할 수가 없지요. 당할 수 없으니 죽일 수밖에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을 제일 먼저 죽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 당시 제일의 사도가 아닙니까? 저들의 원흉입니다. 그런데 정작 저들이 제일 먼저 죽인 것은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지성적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예수를 감정적으로 믿고 굉장하게 믿는 것 같지 만, 그실 체계화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은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확실한 지성인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신앙입니다. 보십시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저들은 스데반을 당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에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결론이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지금 저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를 갈면서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정작 죽음을 눈앞에 둔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평온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참 평안입니다. 모두가 죽이겠다고 아무리 떠들고 야단을 해도 그 마음은 고요합니다. 조금도 거침이 없습니다. 평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말입니다. 자기를 향하여 욕하는 자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깁니다. 스데반은 그 마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에, 부활의 약속과 함께 하기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천사의 행복이 있기에 그것이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것 이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예수 믿는 사람은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썩어 가지고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미소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참으로 평화로운 것이요, 참으로 행복한 것이요, 참으로 사랑에 넘치는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실로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갈면서 자신에게 원수처럼 대드는 저 들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동료들입니다. 그런 저들이 이제는 스데반을 죽이겠다고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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