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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복음 (행 1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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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복음(사도행전 15:6-11)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 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 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 15장에는 전 장에 걸쳐서 예루살렘 공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1 차 전도여행을 마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공회로 모이고 그 동안 뛰어다니면서 전한 복음의 내용과 전도 방법 등 결과를 보고하면서 문제되는 바에 대하여 평가를 받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는 이 문제는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사실은 여기서부터 복음이 정비되면서 마침내 세계적인 교회로, 세계적인 교리로 문을 열고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 같은 비약이 이 공회로부터 이루어져나간다고 하는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릇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 한다면 그것은 예루살렘공회에 앉았던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처럼 예수 믿고도 아직 바리새주의적인 편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바리새주의는 큰 장애물입니다. 세계로 향한 선교적 교회가 되려고 할 때에 결정적으로 이것이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가, 교리가 어떻게 선교적으로 정비되어야 하느냐, 선교신학적으로 어떻게 재정비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누누이 이에 대한 말씀을 드렸거니와 여기서는 한 가지, 다시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서 말씀하고자 합니다. 복음이 유대사람들에게만 전해질 때, 말하자면 동일 문화권에만 전해질 때에는 효과적으로 전해집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렇습니다. 언어가 같고 풍속이 같으므로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다른 사람도 믿게 되고, 또 몇 사람이 전할 때에 전체가 알아듣게 됩니다. 이렇다할 편견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단일 문화권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경우는 좋은 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과 자기 문화와의 관계를 이렇다할 비판 없이 소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적 요소를 신앙으로, 신앙을 문화로 소화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어디까지가 문화며 어디까지가 복음인지 애매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에 도전 받을 때에는 교회가 새롭게 혹은 계속적으로 개혁을 해야 하는데, 저렇게 되면 개혁의 동력인(動力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보아하면 교회가 아주 필요 없는 일에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 내용, 뜻, 그것과 그것을 담는 그릇인 유대의 문화--이 문제에 대해서 유대사람들은 아무런 거부감도 생각도 비판도 없이 그대로 기독교를 자기 문화권에서 소화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문제는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문화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형태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이 문화적인 그릇과 기독교의 본질과의 관계, 우리네 풍속과 복음과의 관계, 한마디로 문화, 풍속, 습관, 관례 같은 것들과 복음 자체와의 관계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혼미하게 이해하게 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본질적인 아닌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추도 예배라는 것을 봅니다. 제사 드리다가 안 드리니까 섭섭해서 추도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한번은 추도예배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23주기'라고 해요. 그래 다시는 교역자 부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집집마다 23주기다 25주기다 하고 목사를 불러댄다면 목사가 어떻게 됩니까? 매일 추도예배나 인도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추도 예배를 꼭 해야 되고 목사님이 오셔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다, 라고 매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추도 예배 안 드릴 수도 있어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우리는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 관한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게다가 신앙적인 것으로, 그래야 효도가 되는 것으로 알고, 추도 예배를 무시하다니 말도 안 된다. 고인의 죽은 날을 그냥 지내다니 당치도 않다고 펄펄 뛸 일이 아니지요. 그 날이 그 날이지요. 혼령이라도 다녀가나요? 고인이 왔다가기라도 하나요?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만 효도인 줄 압니다. 온 세계가 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네 혈기 있는 사람들 보면 무슨 일로 언성을 높이다가 '그렇게 되면 내 성을 갈겠다'며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성을 못 가는 줄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들은 성을 마음대로 갈아요. 결혼해서 살다가 아내 친정에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장인의 성을 받고 말아요. 엄격히 말하면 유대사람들은 성이 없어요. 왜 없는지 아세요? 다 한 가족인데 무슨 성이 필요하냐--이것입니다. 그래 이름만 있어요. 그러니까 성(姓)이다, 씨족이다, 자식이다, 아들이다--이렇게 따지는 것, 지지리도 문젯거리입니다. 우리네 문화의 문제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지 않아요. 그런 것을 두고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답시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하면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우리의 문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들이란 그실 별로 입니다. 남의 아들이라도 데려다 잘 키우면 되는 거지 굳이 내 아들이어야 되고, 내 종자여야 되고,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이것은 복음적, 신앙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것처럼 절대화하고 있거든요. 얼마나 모순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적어도 문화적인 요소와 복음적 본질적인 요소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화적인 요소란 얼마든지 바뀌는 것입니다. 또 바뀌어야 합니다. 얼마든지요. 그리고 그래야 복음적인 요소가 불멸할 수 있어요. 문화적인 요소를 올바로 바꾸는 것이 개혁입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개혁해나가야 본질적인 요소를 보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원리에 대해서는 세세히 말씀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예루살렘교회에서 문제된 것이 바로 복음적인 요소와 문화적인 요소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어지간히 시끄러웠던 것 같아요. 회의는 언제나 그래요.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2시간이고 3시간이고 토론을 해요. 아침 신문에 보니 어느 모임에서도 장장 12시간이나 회의를 했다고 합디다. 대단했겠다 싶어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말입니다. 그나마 결론도 없었대요. 회의란 길어지면 안됩니다.
길어지면 마음이 점점 멀어져요. 타협이 안됩니다. 타협이 안되거든 유보해버리고 짬을 두었다가 다시 모여야지 그 자리에서 뿌리를 뽑자고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길게 길게 오랫동안 같은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했어요. 많은 토론을 했어요. 변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떠했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바울이 말할 때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지 않아요. 장로가 열변을 토할 때에 바울이 듣고 '그 일리가 있습니다.'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 자기 말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말만 옳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자기 주장을 신앙적이라고 생각할 뿐더러 거기에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명예를 거는 거예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마침내, 좀더 나가다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이 40명이나 나왔습니다.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왜 이래야 되는 것이지요?
변론이 있었어요. 분명히 많은 말싸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해결은 없어요. 야고보와 베드로가 이것을 잘 지켜보고 있었어요. 드디어 베드로가 말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점이 있어요.
정말로 진지하게 믿음으로 대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대한다면 하나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나 정직하지 못해요. 겉으로는 신앙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요, 율법이요, 하지만 속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내심이 달라요. 기득권을 보전하겠다는 속셈이 있어요. 보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우월감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네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시기와 질투가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악이 숨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못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같이 정직하다면 왜 다투겠습니까?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이란 백 날을 두고봐도 일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문화적인 요소를 초월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없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추상적인 이론, 변론이란 결코 결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나 저들 앞에서 아주 담대하게, 사도적 권위로 체험적 신앙을 간증하게 됩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베드로의 말씀은 딱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그 하나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고--그런 얘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하면 남이 틀렸다는 말이 되고, 내가 안다고 하면 남은 모른다는 말도 됩니다. 내 말이 옳다고 하면 남의 말은 틀렸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의 경험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어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좋으냐 나쁘냐가 중요한 게 아니예요. 심지어는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한 게 아니예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참된 의미에서 사건인지, 그것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한 자기 경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았다, 내가 경험했다, 확실하게 경험했다고 만 밝힙니다.
그 둘은, 하나님께서 앞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다 그르다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방사람을 구원하셨어요. 할례 안 받은 사람들을 벌써 구원하셨어요.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벌써 성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무슨 딴소리들이냐, 그 말씀입니다. No comment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가로막겠어요? 그렇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다 할 때에는 그걸 가지고 이렇고 저렇고 한다면 하나님과 싸우자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 하신다 할 때에는 오로지 그대로 수용하고, 그대로 지지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서 이미 그렇게 역사 하셨다고,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번론적 의도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를 야고보에게 맡기고, 십여 년 내지 십수 년 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변두리 이방나라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것 갖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마리아에도 갔습니다. 가이사랴에도 갔습니다. 욥바에도 가고, 안디옥까지도 갔어요. 이렇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들 지역 말고도 가고 오고 하면서 다른 많은 곳을 다닌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들을 체험하게 되었어요.
이방의 현장을 뛰면서 체험했어요. 예루살렘에 앉아 가지고 책상머리에 앉아 가지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행동의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앉아서 생각만 하니까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지요. 끝도 없는 변론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몸을 바쳐서 현장에 뛰어들어가 보세요. 단순해집니다. 그리고 복잡할 문제가 없어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도 가고, 고넬료 집에도 가고 욥바에도 가고 안디옥까지도 가고, 사마리아에도 가고 하는 사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긴긴 시간 피부로 체험하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 결론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에 가부를 논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다, 이방사람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이방사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관계없이 역사 하시고, 하나님께서 할례 받는 것과 관계없이 구원하시는데, 누가 이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냐, 누가 하나님께 대항할 것이냐--
그리고 베드로는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택하셨다, 라고 자기와의 관계를 통해서 간증을 합니다. 베드로는 일개 갈리리 어부였습니다. 불학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선택, 역사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역사 하시듯이 저기서도 역사 하셨다베드로는 바로 그 얘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라고, 베드로는 내 입을 통하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한 것 같습니다.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삼천 명 앞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려 3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불학무식한 한낱 갈릴리어부가 주의 택하심을 받아 성령에 충만하여 설교를 할 때, 수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고, 돌아와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 가서도 기도를 하니 성령을 받고,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도 기도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니까 성령을 받거든요. 여기서 나를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도 똑같이 역사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세례를 안 줄 수 있겠느냐 합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노라고 당당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리어 쓰임 받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게 하셨다--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복음의 말씀'이라고 말씀합니다. '톤 로곤 투 유앙겔리우'--'유앙겔리우의 말씀'이라고 표현된 이 말은, 신약성경에 꼭 한 번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한 말씀은 참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 이것을 사람들이 들어서 믿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의 길입니다. 나를 통해서, 주의 종을 통하여, 그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고, 택함 받은 주의 종을 통해서 전해지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믿어서 구원받는다--이게 직통하는 길입니다. 여기에 다른 길이 필요 없어요. 이것저것 걸림돌을 놓을 필요가 없어요. 말하기 안됐습니다 마는 어떤 교인을 보면 여름날 한창 더울 때에는 예배 마치고 인사하면서 보니 주머니에 넣고 있는 담배가 눈에 띄어요. 또, 악수하면서 보면 어떤 교인에게는 술 냄새가 납니다. 토요일날 밤에 많이 마신 것 같아요. 그런데 보세요. 담배가 주머니에 있든 없든 술 냄새가 나든 안나든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간밤에 술 먹고 피곤할 텐데도 교회에 나왔으니 우선 고맙지요. 술 먹은 것 좋은 것 아니지만 술을 마셨더라도 교회에는 나온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술 냄새 나는 사람은 교회에 못 들어옵니다--그래야 되겠습니까? 주머니에 담배 있는 사람 못 들어옵니다--그래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택하신 주의 종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도요. 신분을 물어서도 안되고, 과거를 물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는 동기를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한테 빚 받으러 나왔다가 예수 믿게 됩디다. 빚 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알고 빚 받으러 나왔다가 그만 덜컥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빚 받으러 나오면 안 된다-그래야 되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택하신 종의 입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고…… 그리고 또 있어요. 8절에 보니,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가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 말씀들을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좋아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고로 성령이 역사해서 듣고 마음 문을 열고 그래서 구원을 받는 것--이것은 외길입니다.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간단합니다.
이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9절)'-예루살렘에서도 그렇고, 가이사랴에서도 그렇고, 안디옥에서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차별치 아니하시는데 누가 차별할 것이냐,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시는 과거를 누가 물을 것이냐, 하나님께서 개의치 않으시는 풍속을 누가 개의할 것이냐…….
동일하게 역사 하셨어요. 히브리서 11장 1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이 바른 믿음이 필요해요. 신학자 몰트만은 말합니다. '믿음은 과거에 갇힌 인간의 삶을 미래로 개방케 하는 것이다.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의 시간의 축이란 미래로 개방케 하는 것이다' 과거가 등뒤에서 밀어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앞으로 이끌어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과거의 의가 있고, 과거에 잘한 것이 있고, 과거가 어떻고 어때서 …… 그래서 그것을 계단 삼아 올라가는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먼저 가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저 미래가, 약속된 미래가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가 미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과거를 잊어야 돼요. 과거에 매어서는 안돼요. 과거의 풍속에 매어서도 안돼요. 이런 것들에 매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지난날에 부끄러웠던 일 빨리 잊어야 돼요. 빨리 잊을수록 좋아요. 깨끗이 잊을수록 좋아요. 그리고 자기를 영접해주신 아버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 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11절에 '동일하게' 곧 같은 식으로, 할례 받는 사람에게 역사 하신 것처럼 할례 안 받은 사람에게도 같은 식으로 역사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거늘 이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그 말씀과 오늘의 본문 11절을 대조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노라'-이것이 베드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라디아서 2장 16절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같은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 요지가 이것 아닙니까?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그는 해석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란 '오직 은혜로'를 의미하는 것이요, '오직 은혜로'란 '오직 긍휼로'를 말하는 것이라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사랑 안에서 구원받을 뿐입니다. 다른 얘기는 하지 말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이미 이렇게 역사 하시고 계신 것을 내가 현장에서 보았다, 선교 현장에서 확실히 경험했다고, 베드로는 현장성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율법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유대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 율법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하는 것을 여기서 잠깐 엿볼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봅시다. 율법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 밖의 길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백퍼센트로 전적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여기다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로 인도하시든 내륙으로 인도하시든 골짜기로 인도하시든, 하나님만 믿고 조용해야 됩니다. 따라가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불평이 많았습니다. 왜 이리 갑니까? 이리 가면 됩니까? 이리 가면 삽니까?-여러 가지로 불평을 했어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시험하는 것이고,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고, 지혜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큰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방사람들을 그렇게 원하셨다면 여기에 왜 이 의를 제가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왜 반기를 드느냐,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그리고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율법)로 속박하려 하느냐-율법이라는 게 참 어려운 멍에거든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율법을 통해서 바르게 진실하게 해보지만, 해보려고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어렵습니다. 정직하게 진실하게 아무리 해봐도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두 가지 길밖에 없어져요. 남보다 조금 낫게 살았다고 해서 교만하던가 조금 못하다 해서 절망하던가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론을 지었어요.
이것(율법)은 죽이는 법이다, 살리는 법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요. 율법 앞에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요. 사도 바울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죄는 한 번을 지어도 죄요, 의는 99가지를 해도 의가 되지 못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서 힘써 주의 뜻을 이루어나 절대로, 구원 문제에 관한 한 내 의로 인하여, 내 선행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어보려고 얼마나 애썼느냐, 그러나 결국은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남은 것은 죄밖에 없어요. 그렇게 우리가 애써보다가 다 안된 것인데 어째서 이방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고 있느냐,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어찌하여 믿는 제자들에게 요구하느냐, 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나 오늘이나 문제의 해결은 여기에 있어요. 첫째는 체험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만 자꾸 이렇고 저렇고 하지 마세요. D, L. 무디의 체험담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보면 참 은혜가 되고, 다 귀하게 은혜스럽게 이해될 때도 있지마는, 어떤 때에는 딱 걸릴 때가 있어요. 몇 절에 가서 걸려 가지고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의심이 생기면 그는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기도하고, 애쓰고, 참고서를 보고, 생각하고 하지를 않고 밖에 나가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고아원에 가서 봉사하고, 심지어는 그 글에 이런 말도 있어요. 지나가는 수레라도 밀어주는 것입니다. 뭔가 몸으로 봉사하고 들어와서 다시 성경을 보면 잘 이해가 된데요. 원래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복잡해요. 적극적인 사람의 머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체험적 신앙, 실천적 신앙만이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조용히 생각해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신다 하고 보여주셨거든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가부를 말하지 마세요.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될 수 있어요. 성령을 떠났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성령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가슴에 충만하다면 이제 와서 이방사람을 향하여 이렇고 저렇고 무슨 말 할 수 있겠어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오직 은혜를 구원받은 것이요, 라고 하는 간증이 있는 자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마음 문을 열 수가 있어요. 내가 오직 은혜를 구원받은 것처럼, 저분도 은혜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안에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시 십자가 안에서 저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나, 은혜로 구원받은 나,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시고, 구원받은 바로 저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미 구원받았어요. 이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걸림돌을 놓고, 무슨 시비를 벌여야 합니까? 그런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은혜 중심적인 세계관 안에서만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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