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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 되어야 합니다 (몬 0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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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내용에 보면 바울은 복음으로 변화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를 소개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라고 말입니다. 즉 무익하던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변화 시켰을까요?

① 복음입니다.
원래 오네시모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노예가 주인에게서 탈출하면 당시의 형법으로는 주인이 재판없이 즉결처형을 할 수 있는 중범죄였습니다. 주인의 집을 탈출한 오네시모는 도피 생활 중에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바울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서 복음을 듣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울은 노예였던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존 케디' 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 도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가 사역을 마치고 죽고 난 후 사람들은 그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기념비에 사람들은 이렇게 썼습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에 식인종이 한 명도 없다.' 즉 그는 섬 사람 모두를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들은 더 이상 식인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식인종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노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그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냉혈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 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됐다. 그는 평생동안 권위의 상징인 목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항상 노예 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다. '죄의 노예였던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예복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한 J. 뉴톤입니다. 그의 찬송은 신자들뿐 아니라 불신자들의 영혼까지도 감동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새차에 관심이 많은 분이 있었습니다. 얼마간 타다가 새차가 나오면 당장 차를 바꾸어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를 잘 아는 분이 그분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은혜 받고 나서 지금껏 차를 안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당장에라도 새 차로 바꿀 수 있음에도 주님을 위해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썼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목표를 수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투자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② 사랑입니다.
바울은 회개하고 변화된 오네시모를 원래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사랑을 인해 간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갇힌 중에서 낳은 사랑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이 바로 낳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갇힌 중에서 사랑으로 복음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 이라는 표현을 당당하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었고 바울은 그의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바울의 낳은 사랑은 거칠고 완악하며 불순종하던 오네시모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주인의 집에서 탈출한 노예, 고집 세고, 거칠고, 불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만나서 그의 사랑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훈훈한 남풍은 꽁꽁언 대지를 녹이고 용광로의 뜨거운 열은 철을 녹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녹여낼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바울의 사랑은 오네시모의 사람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가 변화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북방 정책을 소위 햇볕정책이라고 했습니다. 꽁꽁언 북방의 형제들을 향해 욕을 먹으면서도, 쌀을 주고 비료를 주고, 소를 주었습니다. 뒷통수 맞아도 또 주고 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구애작전을 했습니다. 간첩선이 내려오고 서해에서 교전이 벌어질 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김대통령이 북한을 너무 짝사랑하고 있다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햇볕에 얼었던 북녘의 형제들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일의 마음도 녹았습니다.

저는 정치에는 별로 취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이 성경적이라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욕먹으면서도 베풀고 손해볼줄 알면서 주었더니 결국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주라 그러면 줄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합시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합시다. 괜히 욕하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을 사랑합시다.

③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은 변화시키는 영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사람이 순간적으로 변합니다. 목사가 목회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해를 받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비웃는 웃음과 차가운 시선 그리고 삐죽거리는 입술 다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때입니다. 수년간 설교하고 가르쳐도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볼 때 힘듭니다.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합리화하는 타협주의 앞에 설 때 목사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가장 힘이 듦을 느낍니다. 그 때 마다 기도합니다. '목사의 설교는 무력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한 없으시니 성령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원래 성령의 충만은 '다이너마이트'라는 뜻입니다. 폭팔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바윗돌도 속에 구멍을 파고 화약을 채운후 폭팔 시키면 산산조각으로 깨어집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서 새사람을 만들어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읍시다.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①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가 왜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쳤는지는 잘알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몬 1:18절에서 바울이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라고 한 것으로 봐서 주인의 재물에 손해를 끼치고 감당할 수 없으니까 도망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갚아야 할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아주겠다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에게 손해만 끼치던 인생이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래서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제는 네게도 유익하게 되었고 나에게도 유익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너와 내게 유익하다면 모든 이에게 유익한 존재가 된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을 위해서 유익한 사람이 되십시오.

② 심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몬 1:11-12절에서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라고 했습니다. 심복이란 헬라어로 '스플랑크논' 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내장, 중심에서 유래한 말로서 동정이나 애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충성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충성하지 못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칠 수밖에 없는 무익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바울 자신의 심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에게 머물러 두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시 법적으로는 엄연한 주인이 있는 노예였기에 그를 다시 옛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낸후 빌레몬으로부터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자기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만큼 오네시모는 충성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나와 함께 하나님의 심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곁에 두시고 싶어하시는 심복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목사 함께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주님의 심복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모세를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울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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