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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구성요소들 (딛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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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기독교를 믿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하게 죄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천사가 분명히 말하였고,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마리아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을 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이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마1:20-21). 예수님께서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19: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억압받는 상황에서의 구원이 아니고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 비참을 겪는 것은 인간의 제도나 구조적 모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의 부패한 죄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로 이 부패한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은 죄에서 구원을 얻도록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의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가장 우선적인 목적을 이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하는 일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디도서는 바울이 크레테 섬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는 디도에게 준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고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은 이 편지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편지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디도 개인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바울과 이 편지의 수신자인 디도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자들은 선한 행위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구원받기 이전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이 두 번째 단락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에 어떤 구성요소들이 있는지, 다른 말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과거의 신분과 삶
먼저 바울은 3절에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와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 신자들이 은혜밖에 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 두 가지씩 네 군으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리석은 자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어리석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의 의미로 '센스가 없다'(sense-less)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 파악하는 능력인 센스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그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이 본문에서 순서적으로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하였는데, 원문의 의미는 하나님을 반역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헛된 것을 좇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용어를 종합하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계시하셨는데도 센스가 없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는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두 동사가 다 수동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악한 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지만 속임을 당하고 있었고, 스스로 정욕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지배를 받아 삶을 탕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욕과 쾌락은 그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은혜밖에 있었을 때에는 악독과 투기로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냈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인 의미로는 '시간을 보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악독이라는 말은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악한 감정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 투기, 즉 시기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믿기 전에 우리는 악한 감정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하는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가증스러운 자'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단어인데 혐오감을 주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존재는 서로 사랑할 수 없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우리도 한 때 이러한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센스가 없어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속아서 각색 정욕과 쾌락에 사로잡혀 여기에 지배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감정을 품고 늘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는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존재였으며,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사역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사역을 4-6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이 말씀에서 우리 구원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구성요소들이라고 할 때 구원의 근거, 구원의 적용, 구원의 증거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구원은 어떤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1) 구원의 근거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루는 첫 번째 요소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사람들은 이 인간 세상에 왜 고통이 왔으며, 죽음이 왔는지,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고민해 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 교육, 과학, 그리고 여러 종교를 통하여 이 문제의 근원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찾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피동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치 컴퓨터에 어떤 프로그램을 입력시키면 그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이성적인 능력을 주셔서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 따먹을 수 있는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사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을 듣고 선악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 후에 인간은 죽음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왔으며, 심지어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땅까지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무 것도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 교육, 과학, 종교 등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 본문 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언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나타내 보였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내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외우고 있는 로마서 5:8의 말씀에도 이 사상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심장에서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첫 번째 구성요소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즉 은혜입니다.

(2) 구원의 적용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5절에서 어떻게 적용해 주셨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이 말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문법적인 부분만 이해하면 됩니다. 이 말씀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헬라어 문법에서 동격입니다. 중생의 씻음은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역사라는 뜻입니다.

중생이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데 이 의미는 미국의 칼빈 신학교의 교의학 교수로 있었던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교수가 가장 잘 정의를 내렸습니다. '중생이란 새생명의 원리가 인간 속에 심어지고,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기질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Systematic Theology, 469) 그리고 여기서 씻음을 외적인 세례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게 만드는 내적인 의식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더 설명하는 말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새롭게 하셔서 새생명을 주심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이 성령님이 내주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두 번째 구성요소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에게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입으로 믿는다고 말한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학식이 풍부하였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5)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성령으로 난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바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6-8)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람의 실체를 느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로 이 바람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중생)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거듭난 생명의 실체를 인식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결과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내적인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며,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이 오고, 성경이 이해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어쨌든 인간의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면 말씀을 깨닫게 되고, 생명이 자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신학자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내가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고, 알지 못했던 그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입니다.'라고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으나 보이는 것처럼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세상에 학벌이 높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 돈이 많아 온 세계를 여행하면서 폭넓은 식견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밖에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적용해 주심으로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속자가 되어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번역은 미래사로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번역하였습니다만 올바른 번역이하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여기에 기록된 시제는 헬라어 성경에 모두 과거 수동태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식으로 바꾸면 현재완료형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뜨거운 가슴에서 시작된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적용해 주셔서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었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 구원의 증거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무엇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8절에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이 말은 참으로 믿을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말씀을 담대하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이 모든 것을 믿어지게 하시고 적용해 주셔서 의롭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렇게 구원해주신 것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 사실을 담대하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선한 행위는 당연히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선한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세 번째 구성요소는 선한 행위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 교인들은 행위를 구원과 결부하여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원인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맞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연구한 바와 같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도 하나님이시고, 적용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행위와 구원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장2항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한 행위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요 그 증표이다 &8943;'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장성운 형제와 입교문답을 하는 허희정 자매나 조성호 군은 꼭 이 사실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한 행위는 우리가 가진 영광의 복음과 신자의 품위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9-1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우리는 좋은 옷과 귀금속으로 단장하기보다는 선한 행위로 우리의 복음과 신자의 품위를 장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때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리석어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속아서 각색 정욕과 쾌락에 사로잡혀 여기에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감정을 품고 늘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는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존재였으며,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중생의 씻음,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현재 의롭다 함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요, 두 번째로는 성령의 사역이며, 세 번째로는 선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을 이해한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이고, 다음으로는 선한 행위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신자로서 선한 행위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위로 우리가 받은 영광의 복음과 신자의 품위를 아름답게 단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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