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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가 주는 기회를 마음껏 누리라 (골 01: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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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주는 기회를 마음껏 누리라’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의 총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이것이 총 주제입니다.
골로새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했던 일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중요성을 모두 다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중요성을 모두 다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최고가 아닌 ‘여러 가지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얘기했습니다. 부인보다 무서운 것은 강등(降等)이고 부인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왜곡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골로새서 1장13절부터 쭉 나오는 내용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이야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로 능력 있는 분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구속(救贖)해 주시는 분,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구속은 영어로 Redemption이라는 단어인데 ‘값을 치르고 죄인을 풀어주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노예제도가 보편적인 시대였습니다. 노예들이 많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돈을 주고 노예를 삽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노예에게 다시 자유를 줄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줄 때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너를 구속(救贖)했다.’ 고 얘기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감옥에 들어간 목사님, 선교사님들이 계시는데 우리 정부에서 중국 정부에 힘을 써서 그들을 석방되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이 구속되었다, 자유를 얻게 되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빚으로 인해 오랜 기간동안 눌려 지냅니다. 자유롭게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압박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와서 그 빚을 갚아주거나 아니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 그럴 때 구속되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속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①이전까지 그를 누르고 있던 힘을 깨는 것, ②그리고 그 힘을 깨고 난 다음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속함을 입었다고 표현할 때는 두 가지가 동시에 강조되어야 합니다. ①죄의 힘을 깨는 것, ②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죄의 힘을 깨는 것에만 너무 강조점을 두고 자유를 누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약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같이 살아날 때에 구속이라는 온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힘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나이가 젊은 젊은이일수록 힘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제 서해교전(西海交戰)이 있었습니다. 보통 때야 남북평화가 어떻고 서로 대화를 하면 되고 사랑해 주면 되고 민족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로 들어갔을 때, 실제적인 현장에서는 힘 없이는 당합니다. 그것을 여러 차례 느끼지 않습니까? 힘이 없으면 반드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을 잃으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알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일제시대를 돌이켜 보면 됩니다.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국민의 권한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힘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우리 백성들에게 강조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무실역행(務實力行)사상입니다. 무실역행이 무엇입니까? ‘참되고 실속있도록 힘써 행하자!’ 또 다른 말로 하면 힘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제력, 군사력, 국권…… 이런 모든 분야의 힘을 기르지 아니하면 민족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누르고 압박하고 있는 특정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을 깨기 이전에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힘을 깨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성과 논리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 대해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우리가 타락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레토리(?)가 아닙니다. 진짜 실제적인 힘입니다. 악한 마귀가 죄의 힘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힘 때문에 우리는 죽게 되었고 죄에게 팔려가게 되었고 죄의 힘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충성하기를 원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런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힘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23절을 보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경은 죄를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여러분! 술 마시는 사람들이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내가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술이 나를 마신다는 표현을 하지요. 우리도 내 힘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까? 담배 끊는 것, 술 끊는 것을 내 힘 가지고 할 수 있습니까? 마약 끊는 것을 내 힘 가지고 할 수 있습니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늘 억울해 하고 억울해 하지만 무서운 힘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박 삼대라는 얘기를 들어보셨지요? 할아버지가 도박꾼이라 집안 망치고, 아버지도 도박꾼이 되어서 집안 망치고 아들까지 도박꾼이 되어서 집안 망칩니다. 이제 지긋지긋해서 이 아들이 결심을 했습니다. 도끼를 가지고 손가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장감을 느낍니까? ‘무시무시하구나! 손가락을 자를 정도로 도박을 끊고자 하는 마음이 있구나!’그 후로 한참 지났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이 발가락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도 끊을 수 없는 무서운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끌고 가고 있는 힘이 실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망 없는 인간들에게 무슨 소망을 주셨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힘을 끊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 힘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할 때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이길 수 능력이 없다고 하면 목회만큼 지루하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일도 없습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윤리라고 하면…… 모두들 앞에서는 잘 듣습니다. 그러나 변화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들은 말씀을 역이용합니다. 여러 차례 훈련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변화될 것 같습니까? 2-3년만 지나면 다 말짱도루묵입니다. 이것만큼 지루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지 아십니까? 교육으로 변화가 된다고요? 설득으로 변화가 된다고요? 절대 변화되지 않습니다. 질기디 질긴 힘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망으로 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증거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붙들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제까지 자신을 끌고 갔던 그 힘이 끊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세계관이 다 무너지고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새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인간의 설득으로 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그 능력의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이 능력 의지하고 주님 앞에 서 있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헌신합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거두다 보면 우리도 알게 모르게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다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승리도 계속되면 약간 도취되는 것 아십니까? 승리도 중독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자꾸 승리하면 승리에 익숙해지고 승리에 중독됩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의 축구 경기를 예로 듭시다. 이번 월드컵이 시작되기 이전 우리의 목표는 1승 하는 것, 16강, 이 정도의 아주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볼 때는) 실력보다도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세계적인 강팀을 하나씩 물리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도 모르게 승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사실 실력 이상의 모습이었습니다. 은혜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은혜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이겼던 팀보다 약하다고 보이는 팀들에 대해서 조금 얕잡아 보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모두 내 능력으로 이긴 양! 터키 같은 나라하고 뛸 때는 마치 다 이긴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길 확률 91%, 터키가 이길 확률은 9%,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확실히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터키가 얼마나 축구에 강한 나라인지 아십니까? 지난번 유럽선수권대회 우승했던 나라입니다. 유럽의 명문 프로팀들에 있는 탁월한 선수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얕잡아 보았습니다. 그들의 능력보다 우리가 더 탁월하다고 착각했습니다. 이제까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라는 요소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다 무시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실전을 보니까 당혹하게 됩니다.

우리가 승리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무게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며 무게중심을 하나님께로 옮겨야 합니다. 특별히 승리를 많이 이룬 사람, 여기에도 잘나가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인생이 잘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인가 속기 쉽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엎드리고 얼마나 많이 기도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일부터 제주선교를 떠납니다. 선교라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선교를 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마다 한번씩 모든 무게중심을 아버지께로 옮기는 그 작업이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증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의 권세를 멸하는 그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과 은혜가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고 주님의 구속의 은총이 우리가 하는 모든 사역과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죄를 깨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
그다음 두 번째 차원으로 중요한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서 이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가지고 방탕하게 방종하면서 다 낭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안 짓는 것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예수 잘 믿는 것은 죄 안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능력있게 쓰임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안 짓는 것에만 너무 축소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예수 제일 잘 믿는 모습을 마치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아무 일도 못하니까 죄도 못 짓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있을 때가 가장 예수 잘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의 접근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해야 될 일은 주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해서 열매를 거두는 일입니다. 그것이 구속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종 되었던 사람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민으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 온전한 구속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을 태어나게 만듭니다. 태어나는 것만이 다입니까? 태어나서 인간답게, 능력있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구속의 내용은 자유를 포함합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이고 ‘구속되고 난 다음의 자유’를 주제로 삼은 성경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1장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유를 얻고 난 다음 다시 종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헛되지 쓰지 마고 육체를 위해서 헛되지 되게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면서 열매 거두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 모습이 진정한 구속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이런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면서 그 자유 가운데 열매를 거둔 어떤 모델을 찾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서 우리가 히딩크 때문에 네덜란드라는 나라에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복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원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습니다. 스페인이 가톨릭적인 표준을 가지고 억누르고 있을 때 거기로부터 나와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본산이 되었던 곳이 네덜란드입니다. 7개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세운 것이 네덜란드입니다. 그러므로 네덜란드의 뿌리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이고 갈라디아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나라의 국시(國是)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자유를 주는지는 네덜란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상황에서는 네덜란드를 벤치마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있는 나라입니다. 강소국(强小國)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한 작은 나라! 주변에 영국이 있고 프랑스가 있고 북쪽에 스칸디나비아반도, 스웨덴이라는 강력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하게 설 수 있는 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가 있고 중국이 있고 일본이 있고 바다 건너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그 중간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가 제가 볼 때 네덜란드 같은 그런 처신을 한다고 하면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하면 제일 강력하게 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복음으로 그들이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일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 편견 없이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복음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모든 장벽들을 다 깨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네덜란드가 가장 편견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여기고 다 품어 주었습니다. 여기서는 위아래 귀족…… 이런 것도 없었습니다. 다 품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같은 곳은 편견이 심한 나라였습니다. 특별히 유태인에 대한 핍박이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에 있던 유태인들의 상당수가 거의 다 네덜란드로 이주했습니다. 그때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철학자 스피노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스페인 출신의 유태인입니다.

사람이 이주를 한다는 것은 몸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품고 갑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지고 있었던 해양에 관한 폭넓은 지식들을 다 품고 네덜란드로 가 버렸습니다. 그 후 스페인 무적함대를 깨 버리고 강력한 나라로 부상한 것이 네덜란드입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품고 모였기 때문입니다. 지식만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부도 같이 안고 갔습니다. 물질도 안고 갔습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같은 곳이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금융중심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나이, 학력, 출신지방을 구별하지 않고 오직 능력대로 사람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히딩크의 생각은 히딩크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네덜란드적인 풍토에서 나온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다 품어 줍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시간이 지나면서 강력한 사람은 팀 만들 줄 알고 적까지도 내편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에게는 암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쓸데없이 적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 하나를 얻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아십니까? 내가 다가가서 친구하자고 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접해 보십시오. 국제적인 질서 안에 들어가 봅시다. 친구가 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오랜 기간동안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만들었던 친구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욕 몇 마디 하면 됩니다. 우리가 중국이라는 나라와 친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까? 90년도에 수교하고 난 다음 12년 동안 얼마나 쏟아 부었습니까? 그렇게 어렵게 친구 만든 것을 말 몇 마디로 금방 적으로 만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일본도 우리의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적 만드는 것은 쉽습니다. 반일감정 돋울 수 있는 몇 마디 말만 던지면 얼마든지 적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우리가 얼마나 오랜 기간 동맹관계를 맺었습니까? 그러나 말 몇 마디로 적 만드는 것 시간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는 적 만들고자 충동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냉철해야 합니다. 친구는 친구로서 남겨 두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냉철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실리를 얻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월드컵을 하면서 축구에서 졌지만 굉장히 놀라운 것을 얻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터키를 우리의 진짜 친구로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터키는 우리하고 친하다고 생각을 했던 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터키를 친구로 남겨 놓았습니다. 비록 축구에서는 졌지만 터키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터키를 얻었다는 것은 이슬람권을 다 얻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이제 유럽의 마음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네덜란드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장벽과 편견을 깨버리고 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인생을 살다 보면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보십시오. 죄는 용서가 됩니다. 죄는 반드시 용서가 됩니다. 심지어 사기치고 도둑질한 것도 용서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도둑질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가서 진심 어리게 사과를 합니다. “제가 그때 갑자기 무슨 충동에 의해서 그랬나봐요.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하면 대개 용서해 줍니다. “제가 피치 못할 상황이기 때문에 당신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 용서해 줍니다. 사기 친 것도 용서해 주고 도둑질도 용서해 줍니다. 일반 사회에서 이런 것들은 다 용서해 줍니다.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를 모욕한 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내가 너한테 도적질을 했니, 사기를 쳤니, 뭐를 했니?” 라고 나오는데 꼭 성공 못하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의 심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상대를 모욕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민족과의 관계이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든…… 잘못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욕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용서받기가 힘듭니다. 우리 주변에 참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상당히 좋은 관계를 맺다가 마지막에 상대를 다음에는 안 만날 것 같이 완전히 모욕감을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이 약 올리는 데 익숙한 민족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상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데 실력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할 줄도 알고 가슴에 상처를 주는 사건이 뭔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민족의 미래는 없습니다. 끊어야 됩니다. 아무리 분노해도 상대방에게 다 쏟아 붓는 것 아닙니다. 적 만들면 안 됩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갈라지십시오. 침묵하라고요. 또 만날 사람입니다. 나중에라도 친구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정신입니다. 네덜란드는 복음으로 모든 장벽을 다 깨버렸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능력 안에서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옳고 그름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네덜란드적인 요소, 자유를 누렸던 요소 중의 하나는 나그네 의식이었습니다. 절대로 어떤 땅에 정주하고 정착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국토가 좁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0%가 바다보다 낮은 땅입니다. 그래서 Holland 움푹 파인 땅이라는 국호가 나왔습니다. Holland! 영어로는 네덜란드라고도 하지만 Holland라고 더 많이 하지 않습니까? Holland가 무엇이냐 하면 움푹 파인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머무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살 길은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활발할 때는 유럽에 있는 배의 3분의 2정도의 네덜란드의 배였습니다. 배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또 한곳에 정주 안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융업 같은 것입니다. 암스테르담이 금융법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와 참 유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다 자꾸 땅투기하면 안 됩니다. 나가야 합니다. 좁은 지역은 좁은 지역만의 강점이 있습니다. IT, 인터넷 같은 것, 랜선 까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미국 같은 나라는 얼마나 경쟁력이 없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랜선 하나 깔려고 하면 100㎞ 넘어가서 집이 하나 있고 또 100㎞ 넘어가서 또 집이 하나 있고 그것은 불리함입니다. 우리 안에서의 강점이 무엇 인지 알고 뛰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기마민족적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마 민족 후계자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랍 속담 중에 이것을 좋아합니다. ‘알사파르 알자파르!’ ‘여행하는 자는 승리한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정주하면 힘이 없습니다. 움직여야 힘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텔레비전 보면서 축구경기를 응원한다고 하면 ‘야! 저놈 빼 버려! 저놈은 왜 저렇게 머리가 긴 거야, 빼 버려! 계속 헛발질이네. 하늘을 차네? 아예 야구를 해라! 홈런을 치네?’하면서 계속 투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청앞에 나와서 뛰면, 기마 민족같이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오-필승 코리아 하고 응원도 팔딱팔딱 뛰면서 하잖아요. 그때부터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민족의 전성기는 70년대였습니다. 농촌의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도시로 오고 움직이고 이동성이 있을 때 믿음도 제일 좋았고 가장 활력이 있었던 때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삼일교회 성도가 왜 비교적 강한지 아십니까? 이유가 이것입니다. 일년에 두 차례씩 막 뒤집어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포로 보내고 통영으로 보내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강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정주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발휘할 줄 압니다.

여기 20대들 계십니까? 20대의 3년은 외국에서 사십시오. 또 가서 정주하지는 말고 갔다 오고 아니면 서울에 살면 부산에 살다가 서울에 살다가 왔다갔다하라고요. 거기에서 우리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일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일 때에 복음의 능력이 힘 있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을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 한국 민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을 품고 중국을 품고 러시와 연해주를 다 묶어버릴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면 됩니다. 다 품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을 가지고 나아갈 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머무르지 않고 뛰게 만드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머물러있던 사람들에게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펄쩍펄쩍 뛰면서 소아시아로 가고 유럽으로 가고…… 땅끝을 바라보잖아요. 복음은 그렇습니다. 절대로 머무르지 못하게 만듭니다. 뛰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복음이 주시는 자유함을 우리 삶 가운데 그대로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복음이 주는 자유의 능력으로 단순하고 강인한 삶을 삽시다.
세 번째로 복음이 주는 자유의 능력은 단순하고 강인한 삶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네덜란드는 환경이 험난하다고 했지요. 땅이 낮다 보니까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풍차가 돌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전경이 아닙니다. 물 퍼내는 작업입니다. 물이 고여 있어서 퍼내려고 풍차가 도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앗간이 아닙니다. 물 퍼내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보니까 이들은 강인해지고 단순해졌습니다. 영국 사람들도 강했지만 영국 사람들이 라이벌의식을 느꼈던 사람들이 바로 네덜란드사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 그래서 영국의 영어단어 가운데 네덜란드의 비하하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Dutch! Dutch-pay! 쫀쫀하게 돈 내는 것, 각자 먹은 것 내는 더치페이…… 더치페이라는 말이 다 나올 정도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근검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환경이 어려우니까 단순해집니다. (네덜란드는 옛날 영국과 해외진출을 경쟁하던 강국이었기 때문이 Dutch에는 경멸적인 뜻이 내포됨)

프랑스에서는 선원을 뽑을 때 조건이 그것이었답니다. “신선한 고기 있어요? 포도주 있어요? 순밀로 만든 새하얀 비스킷 있어요?” 그런 것을 물었습니다. 이거 선원 맞습니까? 그런 것 먹고 싶으면 빵집 주방장을 하지…… 그런데 네덜란드 선원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과 죽만 있으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먹고 뛰니까 당해낼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원이라고 하면 최고로 강력한 선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자유를 줍니다. 열매를 거두는 사람의 특징은 주기마다 한번씩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돌아와야 힘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제주선교를 떠납니다. 여러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도시락을 어떻게 하고…… 먹는 것 신경 쓰면 선교 못합니다. “빵은 뭐 먹을까요? 도넛으로 할까요, 곰보빵으로 할까요, 크림빵으로 할까요?” ……그러면 안됩니다. 아무 빵이나 주면 그냥 먹는 것이지요. 나는 바나나우유, 나는 초코우유 하면 선교 못합니다. 간단해야 됩니다. 복잡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 구조를 보세요. 팀 나눌 때 아브라함 팀, 이삭 팀…… 이렇게 복잡하게 이름 붙입니까? 그냥 1,2,3,4, 숫자로 나갑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깃발 하나 꽂으면 모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강력합니다.

여행가 한비야라는 분이 쓴 중국견문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견문록을 보니까 두 번째 챕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도 여행을 자주 다녀서 그런지 그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간단하게 살기’라는 내용입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행 시 제일 고역은 짐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짐을 어떻게 하면 간단하게 쌀 수 있는지를 연구합니다. 내일부터 제주선교를 떠나는데 여행을 많이 떠나본 사람은 짐이 작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거의 안 떠나다가 한번 가는 사람은 거의 피난민 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의자까지 넣어옵니다. 짐은 간단해야 합니다. 짐을 간단하게 싸는 원리의 하나가 무엇 이냐하면 넣을까 말까 망설여지는 물건은 빼 버립니다. 그런 물건은 결국은 안 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용도로 쓸 수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한비야 씨는 커다란 면 보자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용도가 좋은지 샤워를 한 후 타월로 쓸 수 있고 어디 가서 지저분한 잠자리가 있으면 시트 대용으로 쓸 수 있고 여자이니까 허리에 두르면 치마가 되고 침대가 여러 곳에 있는 데서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침대 사이에 커튼이 될 수도 있고 너무 더운 곳에서 머리에 두르면 멋진 모자가 될 수도 있고…… 그리고 2주마다 한번씩 짐 속에서 쓸데없는 것을 다 버립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하니까 집중적인 여행이 가능하고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 축복에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마다 한번씩 단순해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없어도 삽니다. 열매를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없어도 될 것을 버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나무를 심어 놓고 관상수로 바라보는 사람은 잎도 예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열매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열매가 목적인 사람은 반드시 가지치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쓸데없는 가지를 다 쳐 버립니다. 그래야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없어도 될 것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웃들을 섬기고 복음증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영향력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멋대로 뛰어다니면서 방종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자유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의 힘으로부터 끊어서 자유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냥 숨만 쉬고 움직이기만 하면 죄악의 열매를 맺어야 할 우리를 구속해 주시사, 자유케 하시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땅의 캠퍼스와 직장에 이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심어야 합니다. 편견이 있는 곳의 편견을 깨야 하고 원망, 불평,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 안에서의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야 될 것이고 서로 간에 이전투구하는 모습 가운데 새로운 비전과 꿈을 심겨줌으로 더 넓은 곳으로 가게 만들고 사치하고 방탕하고 썩어질 것을 위해서 사는 인생들에게 단순하고 강인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복음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늘도 구속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기를 바랍니다. 죄로부터의 세력을 끊어버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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