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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사람에게 정서적 풍성함을 전달하는 사람 (골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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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로새서 9번째 강해시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정서적 풍성함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고 했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쭉 설명해 주고 있고 2장에 넘어가면 그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공급해 주는 힘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무엇을 공급받았습니까? 예수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2장3절에 보니까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모든 지혜, 모든 지식, 그런 것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가기만 하면 지혜와 지식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이라는 것은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배운 사람을 지식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배우려는 의욕이 넘쳐납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침대에서 자기 직전에도 책을 읽고 바캉스 갈 때도 책을 들고 갑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책이 몇 권씩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지식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이런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지혜는 지식과 대비적인 개념입니다. 판단력, 적용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판단력을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판단력은 학력과 꼭 일치하지 않습니다. 많이 공부했다고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학력은 높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명확하게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친할머니 같은 분이 그런 분입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학력이지만 어떤 의사결정을 내릴 때에 보면 박사학위 받은 사람보다 더 명확하고 확실한 판단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기가 막힌 지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우리가 험난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부요함 가운데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이런 풍요한 지식,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세 가지로 점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사랑케 하는 지혜를 공급하십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은 사랑케 하는 지혜입니다.
2장2절을 보시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사랑을 부어주시면 결과적으로 어떤 열매를 거두느냐 하면 연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혜에는 우리를 연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의 지혜에는 우리의 연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지식은 좀 교만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1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다 가치 있고 다 능력 있는 것이다, 그냥 먹으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자기들은 자유롭게 행동을 했는데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흔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면 좋은데 ‘그것도 모르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흔들리는 바보들이 다 있구나.’ 하고 조롱을 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고린도교회는 지식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랑이 없었고 덕이 없었습니다. 하나 되게 만들지 못하고 세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늘다보면 보는 눈이 열립니다. 눈이 열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허물도 많이 보게 되어 있습니다. 허물이 보이면 말을 하게 됩니다.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꾸 비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외롭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에 사랑하면 사람들을 하나로 만듭니다. 묶습니다. 사랑하면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그 이해의 풍성함까지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지식만 가르치면 사람을 엉뚱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보면 여러 가지의 직업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교도관도 있거든요. 대만선교 갔을 때 청주에 있는 여자교도소의 교도관을 만났습니다. 교도관이라고 하면 우락부락할 것 같이 생각되는데 이 19기(25세) 자매는 머리카락도 치렁치렁하고 모델 같은 아주 아름다운 자매였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갖고 있던 교도관의 이미지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사명감이 있는 교도관이었습니다. 영혼들을 주께로 이끌려고 하는 뜨거움이 있는 자매라고 생각됩니다.

전에도 뜨거움이 있었던 어떤 교도관이 있었는가 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죄수들이 죄를 짓는 이유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르쳐야겠다!’ 하루는 전혀 글을 모르는 젊은 죄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열심히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열심히 가르쳤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출소했습니다. 다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 보니까 또다시 잡혀왔습니다.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서 보냈는데 왜 잡혀왔니?’ 죄목을 보니까 문서위조죄였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지식만 가지고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해답이 아닙니다.
Willow Creek의 청소년 담당 사역자인 보 보셔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원래 20년 가까이 미국 중부 시카고 일대의 틴에이저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던 분입니다. 이분은 전직 미식축구 코치입니다.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는 분인데 이분이 20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하고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청소년이 어떻게 하면 변화가 될까, 이제까지 해볼 것은 다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 신나는 게임, 그런데 그것 가지고 청소년들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변화가 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달라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사랑을 느끼게 하니까 변화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분의 얘기는 간단합니다. 청소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달해야 됩니다. 그래야 사람에게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7장23절에 보면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 왜 양떼의 형편과 소 떼에 마음을 두어야 됩니까? 사랑 외에는 절대로 자라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한 녀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 없이 논하고 사랑 없이 평가하는 것들은 답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사랑해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면 원만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대개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이성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반면에 여자들은 감성적인 판단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움직이는 동인(動因)이 무엇이냐, 이성 때문에 움직입니다. 남자들은 이성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여자들은 많은 순간 느낌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어떤 매력이 넘치는 남자가 있습니다. 매력이 넘치는 남성이 자매하고 대화를 하다가 등을 가볍게 두드립니다. 이성적인 남자들은 그것을 여러 차례 관찰합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가지고 대화를 나누다가 자매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다른 케이스도 봅니다. 역시 등을 두드렸는데 가만히 있습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오빠 좋아-그랬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렇게 내립니다. ‘내가 여러 차례 관찰을 통해서 보았더니 대화 나누다가 자매의 등을 두드려도 되는구나.’ 이렇게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고 난 다음에 자기도 비슷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버럭 화를 내고 따귀를 때리려고 하고 느끼하다고 하고 난리가 납니다. 여자들은 느끼하다고 할 때 혼자 있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동료 자매들과 회의를 엽니다. ‘나 그 녀석 느끼하게 느껴!’ ‘나도!’ ‘나도!’ ‘나도!’ 3명 정도만 느끼하게 느낀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느끼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남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이성을 가지고 여러 차례 관찰을 했다는 것입니다. A라는 케이스에서도 문제가 없었고 B라는 케이스에서도 문제가 없었고 C라는 케이스에서도 문제가 없는데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는 것입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고 억울해합니다. 이 남자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지요? 자신이 느끼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느낌입니다. 느낌! 자매들은 느낌을 가지고 승부를 걸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총각 때만 그렇습니까? 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도 리더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가끔 결혼하고 난 다음에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나 살림하고 아이 키우느라고 머리가 굉장히 아파! 머리 아파 죽겠어!’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럴 것입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머리가 아파? 타이레놀 사올까?’ 그러면 여자가 화를 더 냅니다. ‘누가 타이레놀 먹을 줄 몰라?’ 그럽니다. 그러면 ‘아스피린 사올까?’ 그런다는 것입니다. 더 화가 납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이렇게 얘기하기를 원합니다. ‘머리 아플 만도 해. 이제까지 너무 답답하게 살았지 내일 나가서 테마파크에 가서 하루 즐길까?’ 이런 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그렇게 느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머리 아프니까 아스피린 먹어야지, 머리 아프니까 타이레놀 먹어야지, 이러니까 날마다 불행한 인생을 살고 쫓겨나고 이러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 만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해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계속 사랑하다 보면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언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여자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남자의 언어를 이해하게 됩니다. 비로소 대화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 되게 만드는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 주시는 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입니다.


2. 예수님께서 믿음을 세우는 지혜를 주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것은 믿음을 세우는 지혜를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믿음 세우는, 믿음을 굳건히 세우게 만드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교만함으로 남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였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믿음이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믿음이 세워지고 긍정적이 되고 비전과 꿈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같이 이런 악한 자들은 꼭 옆에 와서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무너뜨리는 사람은 무너져야 세울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무너뜨리는 것은 쉽습니다. 파괴는 쉽습니다. 그러나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쉽게 무너뜨리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우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세우는 일을 해 본 사람은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에 함부로 무너뜨리자는 말을 못합니다. 오히려 리모델링 하자, 변화시키자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 무엇이었습니까? Gnosticism,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어떤 단계가 있답니다. 자기들이 단계를 정해 놓았습니다. 단계마다 특징들을 가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이 단계들을 밟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애매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증거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단순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또 하나는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진짜 복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단순한 것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 예수님 믿고 영접할 때에 구원받는다!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누구나가 다 이 내용을 받아들이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무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지식이 있다고 합니다. 특이한 지식!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예수 믿는 것을 자꾸만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훈련을 받아야 됩니까? 꼭 무엇을 해야 되고 무슨 단계를 마쳐야 되고……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나가서 증거했더니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단순해져야 합니다.

또 하나,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영지주의자들은 공교한 말로 우리들에게 깊은 생각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속이는 말입니다. 속지 말아야 됩니다.
잘 보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음을 세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느 때 믿음이 굳건해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로마서 10장17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에 믿음이 생기던가요? 환경에 변화가 있고 돈다발이 떨어지니까 믿음이 생깁니까? 돈 벌어보신 분은 알지요. 돈 생기니까 더 괴롭지요? 더 불편함이 있지요? 더 의심이 생기지요? 환경이 우리에게 믿음 주는 것 아닙니다. 잊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만 믿음이 생깁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흔들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굳건하게 새우는 것이지 다른 것이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통장에 돈이 있고 주위에 아무리 보디가드가 많이 있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이 믿음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증거하는 일을 해야 됩니다.

저는 이런 얘기 들었습니다. 한국의 어떤 중등부가 크게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담당하는 목사님이 중고등부 학생을 모아놓고 성경을 통독하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쭉 읽는 성경통독!
저는 이상했습니다. 중학생들이 앉아서 성경 통독하는 것을 재미있어 할까, 그런데 이분은 독특한 방법을 개발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랩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중학생들 랩을 좋아하잖아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오예-오예-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오예-오예-그러니까 애들이 신나서 자기가 한번 해 보겠다고 하고 한 장 읽으니까 다른 아이가 너 그만하라고 하고 자기가 한다고 하고 한 장 더 읽으면 안 될까요 하고…… 어떤 애들은 성경 한 구절도 못 외우는 아이들이 요한복은 3장을 다 외우더라는 것입니다. 외우다가 오예-오예-하다가 오 주님 하고는 고꾸라져서 회개하고 변화 받고 부흥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 랩으로 접하든 아니면 말씀으로 접하든, 말씀을 읽고 들으니까 변화가 되잖아요. 중요한 방법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말씀만이 믿음이 됩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돈에 여유가 있는 할머니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병상에 누웠습니다. 전도는 해야 되겠는데 전도할 길이 막연합니다. 누워있는데 어떻게 전도를 합니까? 그래서 이분이 머리를 썼습니다. 어떻게 머리를 썼느냐 하면 성경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했다고 합니다. 옛날에 1만 원 주었다고 하는데 지금 같으면 더 줄 것 같습니다. 한 시간에 2만 원, 굉장히 많이 주는 것이지요. 하루에 3시간, 6만 원이라고 하면 서로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격요건은 안 믿는 사람! 그런 사람 불러다 놓고 요한복음부터 읽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 읽히고 또 읽히니까 은혜를 받아서 이 사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을 읽다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나니……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고……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머니는 ‘한 번 더 읽어, 안 들려.’ 읽고 또 읽고 하다가 오 주여 하면서 ‘예수 믿을래요.’ 예수 믿으면 잘라 버리고 또 새로운 사람 얻어다가 또 읽으라고 하고 이분이 이런 식으로 해서 10명 이상의 영혼을 주께로 돌이켰다고 합니다. 구원시켰다고 합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굳건하게 만드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새겨들을 수 있게 하고 믿음이 생기는 것을 보게 만들고 말씀에 인생을 걸게 만듭니다. 그렇게 굳건해 집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굳건해지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함이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것은 행함이 있는 지혜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걸음입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스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는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뿌리 깊은 신앙이 나오지요. 여러분 뿌리 깊은 나무를 보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죽지 않지요. 흔들리지 않지요. 우리 한국 사람들 뿌리 깊은 나무를 굉장히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뿌리가 깊어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뿌리가 깊어지는 비결은 행함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스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합니다. 우리의 뿌리가 깊어지는 방법은 행함입니다. 기독교는 행할 때 뿌리가 깊어집니다. 제주선교 대만선교 이런 선교를 통해서 헌신할 때에 뿌리가 깊어집니다. 움직일 때 뿌리가 깊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우리는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4대가 믿고 있다고 합니다. 4대가 믿은 것이 뿌리 깊은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혈통에서 납니까?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사는 것을 보면 겨우 주일날 교회 담만 찍고 가는 나이롱이 어떻게 뿌리 깊은 신앙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신앙입니다. 뿌리가 깊어지려고 하면 헌신이 있어야 되고 행함이 있어야 하고 걸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에 10년 20년 믿어도 뿌리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1주일에 한번 예배드리고 헌신과 봉사도 없는 사람은 10년이 되어도 밤낮 그 수준입니다. 그런데 1년이 되었든 2년이 되었든 뿌리가 점점 깊어지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걸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깊어집니다.

행함이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견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행함이 있으면 가정이 견고해지고 직장이 견고해지고 학업이 견고해집니다. 잘못 믿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직장도 흔들리고 가정도 흔들리고 학업도 흔들립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고 공부는 지지리 못하고 직장에서는 밤낮 일 안 해서 쫓겨나고 집안은 내팽개치고 할렐루야 아줌마라고 기도원이나 쫓아다니고 애들은 거지같이 하고 다니고…… 다 잘못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한 행함이 있는, 걸음이 있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굳건해집니다. 가정이 더 탄탄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가정이 탄탄해지고 직장도 탄탄해지고 우리의 학업도 탄탄해집니다. 밤낮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머리띠 싸매고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집합도 모르던 아이들이 이제는 함수까지 다 풀어내고…… 이런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굳건해 집니다.

왜 굳건해지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순하게 집중할 수 있는 내용을 주거든요. 인생을 살다보면 껍데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승부 걸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붙들고 그 안에 집중하는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집중하는 인생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 코스타 강사로 자주 나오는 분인데 미국에 계시는 마취과 의사인 박수웅 장로님이라고 있습니다. 이분이 참 재미있습니다. 집회 끝나고 난 다음에 유머를 말씀하시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했던 유머를 또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매년 바뀝니다. 마취과 의사가 한가한가 봅니다. 밤낮 유머만 연구하시는 분입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마취과를 선택한 이유를 저한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자기가 미국에 갔더니 도대체 안 되는 것이 영어더라고 합니다. 괴로웠다고 합니다. 한국 환자와 다르게 미국 환자들은 이것저것 묻는다고 합니다. 설명해 달라고 한답니다. 자기가 알기는 아는데 설명할 능력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편한 것이 마취과라고 합니다. 마스크 씌우고 잠 재우면 영어 한 마디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깰 때도 자기가 알아서 깨고 너무 편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취과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 둘째는 시간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자기는 전도를 열심히 해야 되는데 다른 의사들은 응급환자가 많아서 전도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마취과는 마취만을 하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데 마취 좀 시켜 주십시오.’ 하면서 와서 몇 시간 자고 가는 그런 사람은 없답니다. 마취만 하는 사람은 없고 수술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수술은 계획과 스케줄이 있으니까 자기가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자기가 복음증거하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취과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이분은 3S-style을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Simple style, 군사는 단순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경기자는 단순해야 한다! 리차드 포스터도 얘기하기를 삶을 단순화하는 작업이 경건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복잡하게 살면 안 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두 번째가 Service style, 군림이 아니라 섬기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남 섬기며 살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Share style로 나누는 삶, 입으로 만이 아니라 행동하면서 나의 받은 것을 나누는 삶, 이런 3S-style로 살면 가장 능력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 진짜 이렇게 살아갑니다.
미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단어 중에서 integrit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번역이 안 됩니다.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다 여러 가지로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integrity는 완전, 흠 없는, 보전하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territorial integrity라고 하면 영토보전, 우리나라 땅 독도 같은 것을 보전한다고 할 때 이렇게 쓰거든요. 보전이라는 말이 맞기도 한데 어떤 번역을 보면 성실, 어떤 번역은 정직, 투명…… 동일한 단어가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왜냐하면 integrity는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개념이거든요. 정직, 성실, 투명, 동일함, 보전, 완전함, 흠 없는……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개념입니다.

그런 단어가 우리나라에는 없어요. 왜 없을까 하고 저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역사에 integrity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이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단어 가운데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제라는 단어도 순수 한국말입니다. 오늘도 순수 한국말입니다. 그런데 내일(來日)은 한자잖아요. 어떤 분은 그렇게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없는 민족이라고…… 우리는 미래의 얘기 잘 안하잖아요. 어제를 얘기합니다. 다 지난 이야기, 오늘 이야기하다가 내일이라고 하면 다 자고……
내일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 비전을 얘기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하나가 integrity!
integrity가 뭔가 생각을 해 보니까 integrity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의 원래의 형상회복, 또 다른 말로 하면 ‘주께 하듯’ 이런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만이 integrity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함을 가지고 정직함을 가지고 요셉이 ‘하나님 앞에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라! 그것이 integrity입니다. 번역하면 ‘주께 하듯’입니다. 하나님의 형상회복, 그런 모습으로 걸어가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십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됩니다.
① 주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케 하시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② 또 우리는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믿음을 세우는 자입니다. 불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세워줍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③ 또 하나, 말이 아니라 걸음입니다. 단순한 삶, 섬기는 삶, 나누는 삶, 특별히 이런 하나님 앞에서 주께 하듯 하는 integrity를 가지고……
해석도 안 되는 이 단어가 우리 삶 가운데 그대로 녹아들어서 우리 후손들은 integrity라는 단어를 해석할 필요도 없이 ‘이 단어입니다.’ 라고 느낄 수 있는…… 이 민족의 피 가운데 integrity를 심겨주는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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