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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lookism은 유혹인가? (골 0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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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로새서 11번째 강해입니다. lookism은 유혹인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의 충분성과 예수님의 탁월성에 대해서 공격하는 무리들에 대해서 응답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1. 영지주의
지난주에 살폈던 첫 번째 공격은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을 한 마디로 묘사하면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회피하려고 하는 이원론자들, 이런 사람들이 영지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체험만을 강조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고를 체험에서 시작합니다. 체험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모든 판단을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주관주의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라든지 프로이트 같은 사람은 기독교를 향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 소망을 외적으로 투사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소원, 열망들을 외부에 투사해서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무식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자기 마음에 있는 소망을 투사하기는커녕 우리의 소망과 야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히려 성경은 내가 가지고 있는 소망과 야망을 깨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라보면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 하나님의 절대주권, 부활과 같이 인간의 이성과 충돌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투사했겠습니까? 성경은 오히려 그 모든 말씀들을 가지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깨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충돌합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신앙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왜 말씀중심적인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까? 말씀중심적인 신앙이 되어야만 안전하고 진짜 기독교와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떠난 기독교는 껍데기는 기독교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방종교와 다를 것이 없고 포이에르 바하가 말한 것처럼 내 마음속에 투사된 모습의 기독교, 가상의 기독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야 진짜 기독교이고 말씀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을 만나야 진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공격, 어떤 의미에서 그 공격이 진짜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2. 율법주의
둘째 공격은 율법주의의 공격입니다.
율법주의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α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율법주의라고 단순하게 얘기하지만 율법주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유대주의적 율법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적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약간 차이가 있는데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 맞습니다. 그러나 할례나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반면에 오늘 살필 영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은 그런 정도까지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할례나 율법을 지키면 더 깊은 영적인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볼 때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영지주의적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이 깊어지고 더 심오한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그러나 방언도 해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야 더 깊은 것이고 통역을 하면 더 깊은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더 깊은 것이고…… 이것이 전부다 율법주의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자꾸만 치장하려고 합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외식주의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영적 엘리트주의입니다. 나는 보통사람과 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믿는다고 말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접근입니다.

1) 율법주의와 lookism
21세기 우리 상황에서 율법주의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절대로 율법주의라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 lookism입니다. lookism으로 드러나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lookism이 뭔지 모르는 분들은 거의 없겠지만 잠시 설명을 하면 이런 것입니다. 외모라는 뜻의 look, 주의나 학설이라는 뜻의 ism이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뉴욕타임즈에 윌리엄 새파이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그런데 1년이 되지 않아서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까지의 인종, 성, 종교, 이념에 이은 새로운 차별 메커니즘입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차별을 했습니까? 인종, 성, 종교, 이념으로 차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차별 메커니즘의 새로운 것이 나왔는데 그것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차별하고 자기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뿌리 깊은 역사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반장이나 회장 같은 학교의 간부들한테는 구별된 이름표를 주었습니다. 반장이나 이런 아이들한테는 이름표를 다른 것을 주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고등학교 다니던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 다른 이름표를 달려고 간부를 누구나 다 하려고 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선생님들이 쓸 수 있는 굉장한 큰 무기였습니다. ‘이름표 다른 것 줄까?’ 이것이 굉장히 큰 무기였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런 아이들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름표 하나 때문에!

저보다 선배 되시는 분들은 대학 때 대학 배지를 달고 다녔습니다.
명문대학 다니는 사람은 명문대학 배지 달고 다니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 때는 배지 달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에는 배지가 있긴 있나요? 옛날에는 그 배지 하나 달고 다니는 것을 굉장한 자부심으로 여겼습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갔더니만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훈장을 오이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닙니다. 우리가 볼 때는 코미디입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굉장한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내가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영웅이 되어서 하나씩 단 것이라고 주렁주렁…… 제 눈에는 웃기는 내용인데 그들에게는 자부심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는 다섯 개밖에 없지? 나는 열개 달았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차별화시키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껍데기를 바라보는 무서운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영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다 보니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이어트 열풍이 붑니다. 전부 다 살 빼려고 합니다. 성형수술 열풍이 붑니다. 몇 주 전인가 타임지의 표지 제목이 그것이었지요. changing faces, 우리의 얼굴을 바꾸자, 동아시아의 얼굴을 바꾸는 성형수술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가사치품으로 치장을 합니다. 고가사치품이라고 하면 듣기 싫으니까 명품이라고 하고 명품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나이마다 외모를 치장하는 성향들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여기 10대들 있지요. 이들은 젊고 싱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꾸미지 않아도 예쁩니다. 화장품 안 발라도 피부가 너무 탱탱합니다. 고무 같은 피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0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뻗은 종아리 같은 것을 원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지…… 그리고 이들은 주로 가방이나 운동화로 치장을 합니다.

20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리 안 해도 다 예쁩니다. 특별한 20대를 빼놓고는 관리 안 해도 다 멋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늘씬한 다리와 팔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아직도 심오한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선글라스 또는 액세서리 같은 것을 원한다고 합니다.

30대가 되면 비로소 자기 몸이 깨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나이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탄력 있는 몸매가 꿈입니다. 배 짚어 넣기 같은 운동을 합니다. 30대는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얼마 전에 20대였기 때문에 옛 기억이 있거든요.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일 많이 팔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코스메티컬 화장품이라고 하지요. 의료화장품이라고 하나요? 이거 바르면 피부에 영양이 있고 뭐가 되고 뭐가 되는 화장품인지 의약품인지 모를 그것을 비싼 돈을 들여서 씁니다. 그러나 변화는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변화는 없어요. 살 빠지는 약 떡칠해도 살이 안 빠집니다. 이들은 주로 핸드백과 구두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합니다.

40대가 되면 드디어 인생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제는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하던 것을 다 포기합니다. 해봐도 안 되거든요. 40대는 자기 몸을 변화시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는 쪽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제일 많이 팔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체형보정용 속옷입니다. 들어보셨습니까? 속옷은 속옷인데 그 속에 철사가 들어 있고 살을 눌러서 못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코르셋 비슷하게 만든 것, 갑옷 같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데 만져보면 딱딱한 그런 것이 있습니다. 석고상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보석으로 꾸밉니다. 그러다가 인생 끝나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드는 대로 늙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제일 기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뒷모습을 보니까 머리가 치렁치렁한 20대예요. 그런데 불러보니까 50살 된 아줌마입니다. 그것은 귀신입니다. 아십니까? 나이가 50세가 되면 50세 같은 외모를 갖고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40세는 40세 같은 외모가 정상입니다. 그것을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변화가 되고 있다…… 똑같은 것이 아니잖아요. 변화되는 것이 멋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어떤 나이 50이 되신 남자분이 있는데 얼굴이 항상 동안(童顔)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분도 저는 보았습니다. 자기가 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동안이라는 것입니다. 동안 때문에 늙게 보이려고 별짓을 다합니다. 나지도 않는 수염도 길러보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나이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 최고로 좋습니다.

그러므로 겉을 꾸미는 것은 결국 속이는 것이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옷을 잘 입었다고 엘리트입니까? 진짜 엘리트는 우리의 신앙이 변화가 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내면이 변화되는 것이 진짜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동질감, 같은 시계를 찬 사람끼리 모이고 같은 자동차, 좋은 자동차 몰고 다니는 사람끼리 모이는 동호회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념과 사상을 나누지 않고 같은 껍데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다 속이는 것입니다. 기만입니다. 자기만족이고 과시욕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제가 안타까운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지난주 우리 교회에 영아부 부모님 모임이 있었습니다. 세미나가 있어서 가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에서 자랐던 처녀총각이 애를 낳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에 왔습니다.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14기 13기 12기, 10기 이런 사람들입니다. 처녀 때 저 정도면 참 아름다운 자매라고 생각했던 자매들이 있잖아요. 굉장히 예쁜 아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2, 3년 동안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전체가 다 모인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 예쁘던 자매가 애 둘을 낳고 난 다음에 완전히 무통이 되고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형제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예쁜 여자, 몸매가 날씬한 여자는 딱 3년이면 끝납니다. 그 다음에는 다 하향평준화되어서 그 모양이 그 모양, 그 덩어리가 그 덩어리가 되고 다 비슷비슷해집니다. 거기에 인생을 걸어요?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그 내면에 있는 가치를 바라보고 변함없는 가치를 바라보고 접근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결혼정보회사 사이트에 한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제가 혹시 총각 때라면 점수가 몇 점이나 나올까 알아보려고…… 거기 가보니 거의 외모를 보고 점수를 매기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많으면 5좀 별로 없으면 1점, 눈이 큰가 작은가도 점수를 매기고 부위별로 쭉 점수를 매깁니다. 직업, 몸무게, 경제력, 나이 등을 쭉 봅니다. 이것이 결혼정보회사인지 소장수인지 구분을 못하겠더라고요. 싸움소, 젖소 파는 것 같았습니다. 소장수 같습니다. 결혼을 할 때 그런 모든 조건에서 점수 많이 나온 남자가 좋은 남자입니까? 점수 많이 나온 여자가 좋은 여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인격체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을 점수로 쓸 수 있습니까? 완전한 사랑의 타락입니다. 사랑도 아니지요. 거래지요!

lookism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 삶의 이런 모든 것을 껍데기로 점수화시켜서 다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할례 받고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을 점수화시켰어요. 점수화시키면서 지키면 알량한 자부심 갖고 안 지키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들, 율법주의는 결국 본질적인 신앙에서 떠나게 만들고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율법주의의 악영향 1-성장의 방향을 오도하는 것
율법주의가 주는 악영향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악영향 가운데 크게 두 가지의 악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악영향은 성장의 방향을 오도케 만든다는 것입니다. 겉의 변화만 추구한다고 변화되는 것입니까? 외형만 추구한다고 변화되는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공허함입니다.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늙습니다. 변합니다. 저도 6년 전에 머리카락 많았습니다. 그때 사진과 지금 사진을 보면…… 겉사람은 누구나 후패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속,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진정한 가치는 우리의 속사람에 초점 맞추고 속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되는 것이지 겉사람에 초점을 맞추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모의 노예, 명품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자라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안에서 자유를 가지고 예수님 닮은 성품으로 자라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입니다. 존귀한 삶을 원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존귀한 삶을 살기 위한 삶의 기준으로 주신 것입니다. 기준으로 준 것을 가지고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을 하고 있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엉뚱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성장입니까? 아름다운 선글라스, 목걸이 이런 것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멋진 차를 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꾸며야 될 내용은 이전에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용서하는 인격으로 변화가 되었어요, 옛날에는 아이들에게 신경질내고 소리 지르는 엄마였는데 이제는 아이들에게 성경 읽어주고 ‘나의 사랑하는 책’ 노래 가르쳐 주고 찬송 가르쳐 주는 어머니로 변화가 되었어요, 옛날에는 가정을 다 내팽개쳤던 아빠였는데 이제는 아이들 놓고 기도해주고 축복해주는 영적인 가장이 되었어요, 옛날에는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격려하고 위로하는 성격으로 변화되었어요, 이것이 성장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요.

여러분, 얼마나 인격적인 성장이 있었습니까? 예수 믿고 얼마나 변화가 되었습니까? 얼마나 관용적인 사람이 되었습니까? 얼마나 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 옆에 갔을 때에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는 이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쓰임 받는 도구가 된다, 그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말씀을 들고 자주 섭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종을 통해서도 복음이 증거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고 그 증거된 모습을 통해서 영혼이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 아닙니까? 지금은 질그릇같이 부족한 종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많이 변화된 사람이 큰 자입니다. 능력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많이 변화되는 시키는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모이느냐, 얼마나 큰 건물이 있고 멋진 조직이 있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은 변화에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화가 되고 있는가, 나의 말투가 변화가 되고 있느냐, 행동이 변화되고 있느냐, 내 얼굴빛이 변화되고 있느냐 예수님의 기쁨이 있는가, 평안이 있는가, 그것이 성장입니다.

여러분, 외형의 변화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여자들 변화시킬 때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 어디라구요? 비행기 승무원들입니다. 비행기 승무원들 보십시오. 왈패 같은 여자들도 거기에 들어가면 다소곳하고 친절한 사람, 항상 생글생글 웃는 사람, 화를 낼 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속잖아요. 저 여자랑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평생 저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첫날밤이 깨지는 것이 환상이지요. 가시나무가 포도나무 됩니까? 가시나무에 포도 걸쳐놓은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것을 들어내면 시퍼런 가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들도 군대가면 변화가 된다고 하는데 정말 변화가 되었습니까? 몽둥이와 영창 간다는 위협 가지고 잠깐 변화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돌아오면 말짱 그대로 아닙니까?

외형주의, 특별히 이런 율법주의라는 것은 다 이런 것입니다. 껍데기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그것이 성장입니다. 율법주의는 속사람에 관심이 없습니다. 겉사람을 가지고 딜링하기 때문에 율법주의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외식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똑같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하나님 저들이 잘 몰라서 그럽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죽잖아요. 죽음의 모습조차도 닮아가고 있습니다. 껍데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그것을 다 놓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이고 위험한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강해지는 그래서 스데반과 같이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닮아가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율법주의의 악영향 2-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
또 하나 율법주의의 결정적인 악영향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하다, 내가 위대하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그것을 계속해서 부추겨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난 다음 제일 먼저 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으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너무 노력할 것이 없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용이 없다고 합니다.

수리아의 장군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5장)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살이 썩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히브리 노예 소녀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고향에 가면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가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를 들고 병사들을 이끌고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나아만이 생각하기를 내가 엘리사를 찾아가면 문밖에 나와서 환영해주고 반겨줄 줄 알았습니다. 환부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서, 게하시를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7번 목욕하라고 했습니다. 화났지요. 이놈이 나를 무시했다고 화를 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쉬운 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수리아에는 목욕할 물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목욕하라고 하느냐 그럴 때 옆에 있던 부하 중의 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을 시켰어도 했을 것 아닙니까? 한번 해 보시지요.’ 그래서 요단강에 가서 7번 목욕했더니 어린 아이 살 같이 다 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는 것입니다. 나를 무시했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간단한 복음을 증거하느냐…… 뭘 어떤 사람입니까? 문둥이지…… 저는 대구사람들이 참 복음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보고 이 문둥아 문둥아 하는데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다 문둥이입니다. 문둥이들이 뭐 잘났다고 딴소리하고 있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교회 와 가지고 잘난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와 가지고 존경받고 교회 와 가지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바보 아닙니까?

교회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는 문둥이입니다. 나를 치료해 주십시오. 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종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세워 주십시오. 그것이 문둥이답지요. 어디에서 환영받기를 원하고 딴 짓 하기를 원합니까!

율법주의가 악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하는 사람에게도 매력이 있고 듣는 사람에게도 매력이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안수기도 같은 것 잘 안 합니다. 그런데 저는 성도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압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첫째 제가 양복점에 가서 흰색 양복을 하나 맞춥니다. 백구두를 신고, 걸을 때도 그냥 이렇게 걸어 나오면 안 됩니다. 걸어 나올 때 음악이 나와야 합니다. 코러스가 막 나오면서 유유히 걸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조명도 이 정도 가지고 안 됩니다. 이것보다 10배는 환해야 합니다. 조명이 아주 환한 데가 몇 군데 있습니다. 사창가! 무지무지하게 환합니다. 금&8228;은&8228;시계 파는 데 무척 환합니다. 그리고 이단집단에 한번 가보셨습니까? 조명이 엄청 밝습니다. 그리고 흰색 양복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취면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옵니다. 번쩍번쩍하면서…… 특별히 여자들이 그런 것에 많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불러다가 머리에 손을 얹고 손을 흔들어 대면서 머리가 뽑힐 정도로 흔들어 대면서 기도를 하면 뭔가 뜨거움이 옵니다. 불 받은 것 같습니다. 병은 안 낫더라도 뭔가 받은 것 같습니다. 내 인생 바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은 것 아닙니까? 다 원하는 것이 뭔지 알지요. 뭔가 느끼는 것, 뭔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처럼 보이고 다른 데는 기도만 해 주는데 여기 오면 손을 잡고 뭔가 흔들어 대면서 뭔가 달라! 나는 특별해! 이것이 율법주의라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얘기합니까! 우리가 잘난 척하고 내세울만한 것이 있으면 성경은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도록 파괴시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 박살내 버립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바짝 엎드려 버리잖아요. 옷을 찢잖아요. 재를 날리잖아요. 나는 문둥이라는 고백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험한 십자가를 붙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율법주의적인 접근을 많이 합니다. 제가 아까 얘기했던 것은 감성적인 접근이고 어떤 사람은 지성을 가지고 율법주의화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러 복음을 어렵게 만듭니다. 지식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배우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성경공부에 단계를 매겨놓고 끝나고 나면 상장 같은 것, 라이선스를 주고 이상한 용어 만들고 못 듣던 용어 만들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또 성도들을 부추깁니다. 우리 교회는 보통 교회가 아니라고 합니다. 엘리트 교회라고 합니다. 중산층 이상의 교회이고 우리 교회는 박사가 몇 명이고 엄청난 전문직이 있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높여줍니다. 우리는 대단해, 대단해, 대단해…… 뭐가 대단합니까, 하나님 앞에 죄인인데! 내가 죄인이고 주님의 구원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연약한 종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 복음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육이 죽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죽잖아요. 그런데 율법주의는 어떻습니까? 우리 자존심을 살립니다. 우리를 부추깁니다.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깨지고 주님의 험한 십자가만을 붙드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참된 그리스도인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우리에게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했다가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말씀의 기준을 세우는 일을 합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고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기준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이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내면이 변화된 사람이 세상에 들어가면 세상도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기준을 바꿉니다.

1) 이준 국방부장관의 예
금주에 인상적이었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준 국방부장관입니다. 저는 몇 년에 걸쳐서 국군장병구국성회를 갔었습니다. 그럴 때 2년에 걸쳐서 이준 장군께서 기도인도를 하셨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기도인도를 하셨습니다. 한번은 식사를 같이 했고 한번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느꼈던 점이 무엇이냐 하면 상당히 잘생긴 분이었고 굉장히 신사적이고 탁월한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분 가정이 대단한 가정이라고 합니다. 아드님이 세 분 계시는데 2명의 아들이 별 넷이랍니다. 대장이 두 명이고 한명이 별 셋! 삼성장군, 집안에 별을 합치면 11개입니다. 그것이 기억납니다. 대단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참 검소한 분이고 믿음이 좋다는 인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고 해서 제가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이분이 국방부장관이 되고 난 다음에 첫 번째로 언론에 알려진 내용이 무엇입니까? 국방부와 합참과장급 이상의 간부 160명을 모아놓고 간담회를 열었는데 그때 이랬다는 것입니다. ‘내가 취임한 이후에 나에게 인사청탁이 10여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후로는 그런 청탁을 절대로 하지 말라. 청탁하는 사람은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 할지라도 절대로 진급시키지 않을 것이다. 공정한 인사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기준을 다시 세우잖아요. 저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보십시오. 정권이 바뀌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밤낮 제도 때문에 뭐가 안 된다고 하면서 제도 뒤집어엎는 일들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다 껍데기잖아요. 사람들 유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정당 이름 바꾼다고 하는데 껍데기가 바뀌는 것이지 내용 바뀌는 것입니까? 다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이 들어가니까 내용을 바꾸잖아요. 이제까지 공정하지 못했으니까 공정한 것으로 가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준으로 돌아가자, 정직함으로 가자,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개혁입니다. 내용입니다. 내면이 변화된 사람은 사회에 들어가도 내용을 바꿉니다.

2) 한강홍수통제소의 예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굉장히 큰 홍수가 났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왔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중부지역에도 비가 많이 왔는데 홍수가 났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연천지역, 동두천 물이 넘쳐야 될 것 아닙니까? 이번에 어제 뉴스를 보니까 밤섬이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철새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비가 많이 왔습니다. 밤섬이 잠길 정도로…… 그런데 중부지방에 홍수가 나지 않았어요. 이유가 뭔가 했더니 여기에 탁월함이 있습니다. 원래는 작년까지만 해도 한강에 수문들, 댐들이 있지 않습니까? 수문관리를 세 군데에서 했다고 합니다. 한강홍수통제관리소, 다목적댐 관리하는 수자원공사, 발전용수댐 관리하는 한국전력, 이렇게 세 군데에서 나누어 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나누어서 하다보니까 대화가 안 되고 일사천리로 일이 처리가 안 되니까 계속 홍수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합치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합치자, 자기의 권한도 내놓고 필요한 것은 모으고 단일체제로 통제의 일원화했더니 효율적인 지휘가 가능해져서 홍수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무서운 얘기 아닙니까? 댐을 더 만들어서 홍수를 안 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내용을 바꾸니까 변화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의 가치를 이해할 줄 알아야 되고 이런 것을 격려하고 박수쳐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홍수가 났습니다. 돼지 떠내려가고 사람 떠내려갈 때 어떤 사람이 목숨 걸고 뛰어 내려가서 돼지 두 마리 건지고 덤으로 사람 한 마리 건졌다, 용감한 시민상 그것을 주고 박수치는데 물론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면 속에 들어가서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미 가지고 있는 비효율을 효율적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바라보는 눈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 지금도 삶의 현장 속에 들어가서 이 일을 해야 됩니다.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

우리가 지난번에 예수 믿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두 번 실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사장에서 자꾸 사고가 납니다. 자꾸 떨어져서 다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푸닥거리하면서 미신적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영성 있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22장8장을 보니까 난간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떨어지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요. 우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삶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난간을 만드는 기준! 그것이 성도가 해야 될 일입니다. 이 사회의 진정한 소망은 성도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 성도가 들어가면 내면을 변화시키니까, 진정한 개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준 장관과 같은 모습들! 한강통제소 같은 모습들! 이것이 바로 성도가 해야 될 모습입니다. 율법주의는 껍데기를 추구합니다. lookism은 우리의 껍데기에 관심을 갖습니다. lookism의 현상이 정치에도 있습니다. 껍데기를 갖고 국민들을 현혹하려고 합니다. 정당 이름 바꾼다 해서 내용이 바뀌는 줄 압니다. 간판을 바꾼다고 내용이 바뀌는 줄 압니다. 속지 마십시오. 속을 사람도 없지만……
성도가 할 일은 내면에 변화된 사람이 들어가서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있지만 무너진 질서를 세우는 것! 기준을 세우는 것! 성도가 해야 될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현장에 나가서 이런 기준을 세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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