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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능력 (골 0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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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음. 이같이 우리는 붙어있는 가지임.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으며 줄기는 뿌리에 붙어 있음. 또한 그 뿌리는 대지와 연결되어 대지속에 있는 풍부한 수분과 자양분을 빨아들임.

가지는 또한 공중 있는 좋은 공기와 산소를 빨아들여 하늘에 있는 모든 능력을 흡수함. 이같이 붙어 있는 가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권능이 있음. 반면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금방 말라죽어버림.

그러므로 성도가 이땅에서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크고 잘난 가지인지를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문제는 붙어 있는 가지인지 여부임. 붙어 있는 가지만이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누릴 수 있음.

포도나무인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심. 그 선물은 평강과 말씀과 이름을 부르는 권세임. 이러한 선물을 받는 우리는 성도는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음. 그럼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선물을 구체적으로 보기로 함.


Ⅰ.평강
오늘 본문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음.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음. 이 평강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으며 그러기에 이는 환경과 관계가 없음. 예수님만이 주시는 독특한 평강이기에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이 있음.

사도행전 12장에 최초의 순교자 야고보가 등장함. 또한 베드로가 옥에 갖혀 온 성도들이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음. 그래서 천사가 옥에 갖혀 있는 베드로를 찾아 깨웠으나 깨지 않아 흔들어 겨우 깨웠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에도 베드로가 이렇게 평안하게 잠잘 수 있었던 능력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었기에 가능함.

우리는 세상의 제도가 평안을 준다고 착각함. 그러나 평안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임. 노벨 평화상까지도 세상에 가장 평안을 주지 못한 사람에게 수상하게 되는 모순과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음. 73년 키신저와 레둑토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후 다시 전쟁이 발발하여 75년 월남이 적화되었고 74년에는 라빈과 아라파트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중동에는 다시 전쟁이 발발한 것이 이를 증면하고 있음.

찬송가 469장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라는 가사가 말해 주듯이 하나님만이 진정한 평화를 주심.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으면 이러한 평강을 누릴 수 있음. 그러면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함 받으면 평강이 있음. 요한1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음.

또한 평강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야 함. 그러면 언제까지 기도하여야 하는가? 평안이 임할 때까지 기도하여야 함.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것임. 평강 가운데 주님이 우리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실 것임.

Ⅱ. 말씀

신앙의 깊이는 우리가 얼마나 말씀대로 사는가에 달려 있음.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는 말씀과 함께 있는가에 달려 있음. 오늘 본문 16절에 의하면 삶 가운데 말씀이 풍부하면 우리 삶도 풍성해진다고 말씀하고 있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읽고 묵상하고 나누면 우리 삶도 풍성해짐. 부흥은 말씀의 부흥임.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말씀을 거두어 가심. 아모스 8장 11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

이같이 최고의 기근은 하나님 말씀 듣지 못하는 것임. 한국교회 최고의 재앙은 하나님 말씀의 기근임. 과거에는 이땅의 많은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부교역자의 말씀에도 다 깨어지고 그래서 헌신을 결단하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났음.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현상이 사라지고 강단의 말씀이 힘을 잃고 있음. 마귀는 우리에게 지루함을 가져다 줌.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의 영을 주시면 말씀이 들리게 됨. 말씀과 가까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 순종하면 이러한 은총이 임함.

누가복음 10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음.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후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음. 우리가 이 율법사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되돌아보게 됨.

그 율법사가 또 묻되 “우리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음.그리고 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명하셨음.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토론만 있고 행함이 없기 때문임. 사마리아인은 행함과 희생이 있었음. 다니엘은 주님 말씀대로 살자며 데모하지 않았으며 구호도 없었음. 대신 삶 그자에서 말씀대로 살았기에 바벨론 전체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변화시켰음. 한사람의 경건한 인생은 세상에 큰 효과가 있음. 세상이 이런 사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음.사도행전상의 초대교인 사람들도 말씀대로 살아갔으며 그러한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음. 말씀대로 살 때 삶속에 승리가 있을 것임.

Ⅲ.이름을 주심

우리는 예수님의 자녀임.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음.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음. 그리고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음.

이름의 능력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세를 행하고 구하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임. 예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능력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라고 말씀하셨음. 이같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음.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면 방탕하게 살 수 없음. 우리는 예수님 이름을 능력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방탕할 수 없게 하며 딴 짓 할 수 없게 만듬. 그래서 이땅에서 격조 높은 인생 살 수 있으며 고상한 인생 살 수 있음.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과 말씀과 이름의 능력을 주시며 우리는 격조 높은 인생, 하나님의 능력 맛보며 살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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