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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새생활 (빌 0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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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에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교부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저가 주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주장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크리소스톰에게 “계속 예수가 주라고 주장하면 너의 집에서 추방해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말했습니다. “황제시여, 당신은 나를 집에서 추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가 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화가 나 “네가 갖고 있는 모든 재산과 소유물들을 압수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는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도둑도 없고 좀도 슬지 않습니다.” 더욱 화가 난 황제는 “그렇다면 너를 감옥에 넣어 자유를 빼앗고 일체 친구들과도 만나지 못하도록 하겠다.” 크리소스톰은 “모든 사람들이 떠날지라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침내 황제가 죽음을 선포했을 때도 그는 굽히지 않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황제는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
누가 진정한 승자입니까? 아르카디우스 황제입니까, 크리소스톰입니까? 환경은 삶에 영향을 줍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태어날 때부터 곱사등이였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문맹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귀머거리로 일생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결코 주위의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후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세상은 사람에 의해 정복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합당한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는 능력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지배당하지 않고 변혁시켰던 바울은 자신과 같은 고난에 있는 믿음의 형제 빌립보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바울의 심정으로 27, 2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에서 ‘생활하라’는 ‘시민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문화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에 속한 지역으로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로마 시민으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로마 시민의 옷차림에 라틴말을 사용했고 로마의 행정과 정치 제도를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로마 시민권을 가진 빌립보 사람들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거리로 끌고 가서 그들의 상관들 앞에서 고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우리가 듣지 못했던 이상한 소리를 전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로마인 우리가 받고 행하기에 합당치 않는 도입니다. 이 사람들을 처벌해 주십시오.”

로마 시민이 된 게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이러 하겠습니까? 그들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교훈들을 즐겁게 준수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시민이면서 특권을 누리기만 하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병역, 납세 의무를 감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힘이었습니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로마인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로마 제국을 강대하게 했는가?” 지성에서 그리스도인들보다 못했고 체력에서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뒤떨어졌으며, 기술에서 에르트와인보다 훨씬 못했고 경제에서 카르타고인보다 못했던 로마인들이 번영을 누리고 세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바로 시민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원칙을 지키고 시민 됨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한 정신이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배경 하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느 나라 시민인가? 만약 천국 시민이라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이것이 능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스스로 지은 게 아닙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지어준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역할 때 복음의 불길이 일어나 예수로 인해 생긴 많은 무리를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바울이 두란노에서 선교할 때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때 이를 본 마술하던 유대인들이 흉내내고 싶어했습니다. 특히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흉내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가서 예수 이름을 빙자해 명령했습니다. “이 더러운 악귀야, 떠나가라”고 하자 악귀는 “야, 내가 예수의 복음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면서 오히려 그 귀신들린 사람을 조정해 달려들었습니다. 아들들은 몸이 상하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습니다.

마귀는 유사품에 속지 않습니다. 자신이 유사품인지 진품인지 모르고 있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겠지만, 갈라 따로 내 놓지는 않습니다. 만약 자신이 유사품이라면 진품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모든 천사와 함께 인자의 영광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해 따로 놓으십니다.

협력으로 일구는 승리
본문에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징표, 구원의 빙거, 구원의 증거를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합당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증거는 복음에 서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협력하다’는 말은 스포츠 용어입니다. 팀을 이뤄 다른 팀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입니다.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팀의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아말렉 족속이 싸울 때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때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받쳐 줍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들어주었기에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협력은 모세가 손을 든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들어 준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야망과 아집을 버리고 연합 전선을 펴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은사에 따라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사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눈에 보이면 긍휼의 은사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면 중보기도의 은사입니다. 보이는 만큼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보이는 만큼 감당하면 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감당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이루어집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형제가 함께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에 서서 감당하는 만큼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시는 분들 중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분은 은사가 없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윌리엄 캐리는 1793년 인도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42년 동안 휴가도 없이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캐리 선교사는 25개 인도 방언으로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를 일으키고 선교 단체를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캐리에게 가장 소중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전신불구로 52년 동안 누워 있었던 친 누이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누워 있어야 하고 전혀 쓸모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기도의 사람으로 오빠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캐리 선교사는 기도 제목을 상세히 적어 알려 주었고 누이는 오빠를 위해 누워서 중보기도했습니다. 윌리엄 캐리가 눈에 보이는 일을 했다면, 그의 누이는 보이지 않는 일을 했습니다. 윌리엄 캐리가 영광을 받는 일을 했다면, 누이는 영광이 없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한다면 이미 경쟁자가 아닙니다. 팀원이요, 협력자입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치받지 마십시오. 치받는 것은 염소의 일이요, 양의 일이 아닙니다. 양은 앞선 형제와 자매를 따라갑니다. 신앙은 이어달리기 경주입니다. 배턴을 이어 받아서 달려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 주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게 진정한 협력이요,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참된 용기
둘째로 복음에 합당한 삶의 증거는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 군인들의 최대 찬사는 고난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하다는 칭찬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패배한 것은 감싸주지만, 전쟁터에서 비겁하게 구는 사람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로지 전진하는 것이 로마군 승리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확신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승리를 확신하는 자에게 일당백의 능력과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대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여 싸워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은 대적들의 힘과 권세 때문입니다. 그 힘과 권세는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서로 부딪히게 됩니다. 때로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보면 부딪히기도 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부딪히고 의로운 일로 부딪힙니다. 이래저래 부딪힐 때면 마음 한편에서는 ‘대항하라’고 속삭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에게 대항하게 되면 그 결과로 인해 오는 고통과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게 두려운 겁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담대하십시오. 예수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갈 때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대적의 힘과 권세를 두려워하는 면도 있지만, 일견 그 두려움을 감추려는 두려움이 더 많습니다. 원수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을 때 신앙인들이 갖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 귀찮아 집니다. 드러낸다고 도움될 것도 없고….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 싶고 연약함을 감추고 싶으며, 화내는 것을 감추고 싶고 약점을 감추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감추지 마십시오. 감추는 것보다 교만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의 요건을 가진 싸움이 아니라 연약함을 갖고 싸웁니다. 완전을 갖고 싸우는 게 아니라 불완전을 갖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때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때 내가 기도하면서 의로움을 선택하고 다시 사랑을 결정해 나가는 게 진정한 용기요, 신앙입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핍박한다면 함께 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상대해 주실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는 사단의 노예 된 자들입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마시고 사단을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관용을 베푸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하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예수님 바라보며 경주하는 삶
셋째로 합당한 삶의 확실한 증거는 29, 30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믿음은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삶은 경주입니다. 운동선수는 심판의 신호의 따라 출발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달리는 중에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고난은 달리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경주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린다면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고난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고난이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손이 잘려 나가는 것도,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고난을 느끼는 자만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신호등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빨간불을 켜시기도 하고 파란불을 켜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으로, 의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축복하고 격려하십니다. 고난에 민감해야 합니다.

고난이 닥쳤다고 그 고난을 안고 가지 마십시오. 고난이 지시하는 방향을 바라보십시오.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때 우리는 고난을 낚아내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이긴 후에야 영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월드컵 축구 4강 진출로 온 국민이 축제 분위기입니다. 8강전 스페인과 일전을 치른 당일에 결혼식을 가질 예정이었던 신랑 신부는 예식 시간을 조정해야만 했습니다. 온 국민은 한국 대표 선수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마음껏 응원했습니다. ‘이겨라, 이겨라 대한민국!’ 양 팀은 전후반 경기를 마치고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에 들어갔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첫째 골, 둘째 골, 셋째 골 성공, 스페인 네 번째 선수가 찬 공을 우리가 막아내고, 마지막 우리 선수가 찬 공이 들어갔을 때 그 기쁨과 환희는 전국에 가득 했습니다. “아, 이거다. 바로 믿음의 싸움이란 이거다. 참된 승리, 마지막 승리, 그 승리가 있기에 고난을 이기고 달려가는 삶,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고난을 이기고 얻은 승리는 값진 것입니다. 신앙에서 믿음으로 인내하여 얻은 면류관은 더욱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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