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살아서 배우는 별세

첨부 1


나는 고등학교 시절 극심한 가난과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 때문에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번 담관암으로 인해 수술대 위에 눕기까지 목회를 하면서 이미 세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었다. 그것은 살아서 죽는 연습이었다.
첫번째는 1973년 담석증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 두번째는 1980년 한신교회 개척 후 3년 되던 해에 오늘의 교회 자리로 이전하면서 다시 한번 쓰러졌다. 신반포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한다고 아파트를 전전하다가 겨우 교회당을 마련하고 이내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세번째는 7년이 지난 1987년 쓰러졌다. 그 해는 전세로 입주해 있던 지금의 건물을 교회가 매입하여 온전한 성전을 갖춘 후 비로소 안정적인 교회사역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세번 쓰러져 입원과 수술을 반복한 이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살아서 죽는 별세를 알게 하시는 은혜의 섭리였다.
별세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른다. 그리고 별세의 신앙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는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였음을 고백하는 자의 신앙이 바로 별세의 신앙이다. 여기에는 큰 고통이 없다. 죽음의 고통은 그리스도가 졌고 우리는 다만 그 은혜를 믿고 받기만 하면 된다. 이 신앙으로 사는 것이 별세신앙이다.
별세신앙은 가장 평범하게는 매일 매일의 잠 속에서 경험한다. 잠에 들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며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 새 날을 맞이하면서 부활을 예감한다. 전신마취와 함께 받는 수술도 이와 같다. 마취와 함께 모든 의식을 잃는 것은 죽음에 대한 한 체험이다. 죽음에서 깨어난 다음에는 그 병을 고치고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 부활 생명을 예감한다.

첫번째와 두번째 수술 속에서 어렴풋하였던 이 생각은 세번째 수술을 받으면서 보다 분명해졌다. 서울대병원에서 한 세번째 수술에서 의사는 마취 결과를 확인하면서 “아직 마취가 되지 않았네”하고 말하였다. 조금 있다가 의사는 다시 나를 확인했다. 이 때 의사가 한 말은 아직 의식이 남아있던 나에게 하늘의 음성으로 나의 고막을 울렸다.

“아직도 죽지 않았네!”

이내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지만 수술 후 의식이 돌아온 나는 그 때 들었던 의사의 음성을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과연 마취와 함께 죽지 않으면 고칠 수 없고, 새롭게 살려면 반드시 죽어야 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었다. 죽음이 새 생명의 전제요 필수 조건이었다. 나는 세번의 큰 수술을 통해서 죽어서야 비로소 살 수 있음을 배웠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어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으며,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롭게 살려면 먼저 죽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세번의 수술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부활에 이르는 성경적 신앙의 원리 곧 별세의 진리를 체감케 하시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지난 세번의 수술과 병상의 체험을 별세신앙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수련으로 여겼다. 곧 별세의 삼수(三修)다.

이 때는 살고 싶었다. 살려 달라고 많이 울었다. 고통하면서도 살 것을 꿈꾸고 생각했다. 수술하고 나면 다시 소생할 것으로 확신했고,믿음을 가지고 수술을 받았다. 기도한 대로 회복도 빨랐고,나의 사역은 다시 계속 되었다.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고,살려주시면 거룩하게 살겠노라 수없이 서원했다.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 눈물로 탄원했다.
나는 그 시련을 겪으면서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으며,거룩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정진하게 되었다. 7년마다 찾아온 시련 속에서 ‘별세의 진리’를 체험한다.

탐식으로부터의 별세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배가 고팠다. 먹는 것이 항상 그리웠다. 그래서 식욕을 잃은 적이 없다. 식욕 때문에 금식은 죽는 것처럼 힘들었다. 그래서 금식은 못한다고 거부했다. 어린 시절에 점심을 굶은 것만 해도 만 4년이 넘는다. 그러니 내가 금식한 일수는 40일씩 40번은 족히 된다면서 이 금식으로도 주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지난날의 금식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은 것이었고 내가 자원해서 한 금식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먹을 것이 풍족함에도 금식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제 금식은 내게 별세의 은혜를 받는 절대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 몸에 암이 생긴 이유를 스스로 깨닫고 소스라쳐 놀랐다. 그것은 내가 먹기를 탐하다가 생긴 것이었다. 담낭염 담석증 담관암은 소화분비액을 배출하다가 너무 힘들어 고장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과식한 음식으로 인해 소화기가 너무 과로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암이 된다. 먹어야 살지만 먹어서 죽는 사람이 많다. 먹어서는 안될 것을 먹어 몸에 독이 되어 죽기도 한다.

한국 사람에게 가장 많은 병은 먹어서 생긴 병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먹어서는 안될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 영혼이 죄로 얼룩지는 병든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고 사탄의 말을 먹음으로써 병든 영혼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다. 그것은 곧 사탄의 말을 먹고 사탄의 정신을 먹은 것이다.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독약이 있다. 바로 술과 담배와 마약이다. 그것은 영혼과 정신을 병들게 한다.

나는 30대 때 너무 많이 먹어 배가 산처럼 솟아올랐다. 신학대학교 시절 기숙사에 들어와 한 학기가 지나면 몸은 백짓장처럼 얇아진다. 잠자리에 누우면 일어날 힘도 없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못 먹었던 것을 회상하면서 먹고 또 먹었다. 결국 몸은 날마다 살이 쪘다.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 인물 났다고 기뻐했다. 얼굴은 기름기로 빛이 났고 배는 동산처럼 솟아올랐다. 자리에 누우면 우리 아이들이 그 위에서 뛰어놀았다.

나는 이런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 너무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우던 신학교 시절의 초췌한 모습을 회상하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배가 솟아오르니 뱃심이 생기면서 야심도 솟아오르는구나. 그리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신감도 솟아올랐다. 그때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

“일어선 줄 알았거든 넘어질까 유의하라.”

이런 생각이 스친 지 몇 개월 후 나는 산이 무너지는 진통을 몸으로 실감했다. 평소 좋아하는 삼겹살로 포식을 한 그날 밤 나는 산처럼 솟아오른 배를 부둥켜안고 방을 뒹굴고 괴로워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누구도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이 종을 이 고통에서 구해주소서.” 몸부림치면서 기도했다. 예수병원에 입원해 각종 검사를 했다. 그러나 병명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암이 아닐까 하는 의사의 한 마디 뿐…. 검사 도중 황달이 생겼다. 의사는 담석증이라고 진단하고 수술을 했다. 복부 비만 때문에 수술이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고 전해주었다.

한달 가까이 병원에 있는데 의사는 날마다 충고했다. “살고 싶으면 살을 빼야 합니다.” 땅의 것이 가미된 뱃심을 죽이는 첫번째 광야의 시험이었다. 그것이 별세시험의 재수(再修)라는 것을 모르고 인생의 고사장인 병원에서 퇴원했다. 지금 회상하니 내 병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나는 지금 식욕이 없다. 밥상에 앉으면 속이 매스껍고 토할 것만 같다. 그렇게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진리인지를 매일 깨닫는다. 지금 나는 먹어서 생긴 병을,하나님 말씀을 먹으며 고쳐가고 있다.

별세의 침묵

병든 환자에게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이 병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 병을 하나님이 주셨습니까,사탄이 준 것입니까. 내 잘못 때문입니까,혹은 우연입니까?” 병의 원인은 분명하다. 내 잘못이요,사탄이 준 것이다. 그래서 죄와 병은 유사성이 많다. 죄와 병은 사망에 이른다. 죄의 삯이 사망인 것처럼 병들면 죽는다. 죄와 병은 괴로운 것이다. 죄 지은 자는 양심이 괴롭고 그 영혼이 불안에 떤다. 병든 육체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죄와 병은 전염성이 있다. 죄가 유전되고 가까운 사람에게 전염되듯 병도 조상으로부터 유전되고 세균으로 전염된다. 죄와 병은 가정과 사회,국가를 병들게 한다. 죄가 성하면 사회와 나라가 부패하고 결국 멸망에 이른다. 병든 사람이 있는 가정은 편할 날이 없고 사회도 큰 부담이 된다. 죄와 병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죄 지은 자는 평화와 즐거움이 없다. 병든 자는 세상이 허무하고 삶에 대한 의욕이 없다. 그러므로 병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침묵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침묵으로 심판하시고 은혜를 주신다.
주님은 침묵하시는 은혜를 받았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종아,네가 고통받고 있는 순간 나도 너와 함께 고통받고 있느니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나의 아픔과 고통에 침묵하셨다. “병든 자는 할 말이 없구나. 병들 때만 살려달라 애결하는 이 부끄러움이여. 주여,나를 눈물 아픔 탄식이 없는 생명수 강가 저 천국으로 데려가주소서. 그때 문득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어리석은 아들아,천국이 병들어 죽은 사람만 오는 곳으로 아느냐’. 주님의 책망에 몸을 숨기네!”

하나님도 침묵하시고 나도 침묵하는 순간 섬광처럼 내 머리를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병든 자에게만 주시는 최고의 은혜,그것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란 책이 있다. 일본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가던 때의 순교 장면을 소설로 썼다. 수없는 기독교인이 신앙을 지키면서 고통 가운데 바닷물속에서 죽어갔다.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제 저들에게 능력을 나타내사 이 고통에서 구하소서. 하나님이여,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때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나는 평소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고독을 즐긴다. 외로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다 흩어지고 혼자 내 방에 남아 있어도 외로움은 없다. 그것은 혼자 있으면서 고독 속에서 많은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나는 병상에 있는 동안 성도들의 면회를 거절했다. 친구도 가능하면 멀리 했다. 심지어 아내도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나는 혼자 있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혼자 견디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주님을 배우기로 했다.

병 들어 고통받는 시간에는 하나님도 침묵하시고 나도 침묵했다. 내 고통은 의사도 간호원도 가족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나 혼자의 것이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어 나를 간호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일수록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캄캄한 밤에 병상에서 일어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이 종의 고통의 날들을 언제까지 두시렵니까. 이 종을 버려두시기가 얼마나 힘드시옵니까. 주님,침묵하시느라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용서하소서. 이 종 때문에 당하시는 아픔에 용서를 빕니다.” 캄캄한 밤에 통곡과 함께 이런 기도가 흘러나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에게 침묵하셨다. 3시간 동안 어둠이 임하여 온 세상은 하나님의 침묵을 나타내줬다. 침묵은 하나님의 신비를 담는 은혜이다.
나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나의 침묵을 통해 예수님의 별세 침묵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별세시킬 때 침묵하셨고 예수님도 침묵으로 별세에 이르셨다. 나는 하나님께 살 것인지,죽을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다만 ‘별세의 침묵’을 배우기로 했다.
/이중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