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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 (빌 0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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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모범은 희망이자 곧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역설적인 말이지만, 자신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닮거나 이룰 수 있다면 희망이요, 그렇지 않다면 절망입니다.
이상적인 것이라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꿈꾸고 바란다면 병이 되고 절핍하게 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최선을 다해 이뤄 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범, 적합한 모델을 세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자 완전한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이루신 구원을 바울 자신은 물론, 빌립보 사람들도 이루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것으로 몇 번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구원을 위해서는 결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빌립보 사람들 사이에 두지 않았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은 사람이 믿음으로 받고 반응함으로써 완성되어 갑니다.

자유 의지를 접고 주님께 복종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확실하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변은 여전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고 온통 불신의 지뢰밭으로 깔려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한 걸음씩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을 이뤄 나가야 합니다. 한 사람도 낙오 없이 모두 구원의 대열에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항상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복종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해 감정적으로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순종하라’, ‘복종하라’는 말처럼 왜곡되어 사용하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뤄 드리고 싶은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유 의지를 사용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좋고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 사용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에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지만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특별히 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유 의지가 100m를 10초안에 뛰고 싶다고 해서 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키가 작은데 10㎝ 더 키워야겠다고 저절로 커지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의지를 갖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서 먼저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지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성령님께 의탁함으로써 이끌림을 받는 삶으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무한히 크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와 선택권을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13절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소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행하신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길 때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뤄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님의 도구가 되고 그분의 주권 아래서 사용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분께 내어 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기쁨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 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 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세계관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라는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자신들의 의지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정의가 세워지면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하나는 ‘은혜의 세계관’입니다. 사람의 정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희망이요, 구원의 능력이요, 변화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관을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정의의 세계관과 은혜의 세계관의 대결을 잘 그린 소설이<레 미제라블>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작은 잘못 하나로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 점점 인간성이 파괴되어 갑니다. 결국 사나운 사람이 되어 형기를 마치고 출소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겨 주지 않습니다. 장발장은 나흘 동안 헤매다 어느 친절한 신부의 도움으로 잠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갈증을 느껴 일어나 마실 물을 찾다가 멋진 은잔을 발견하였습니다. 욕심이 생긴 장발장은 은잔을 훔쳐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형사 자베르는 ‘전과자는 변화될 수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으며 정의를 주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발장을 붙잡아 은잔을 갖고 다시 신부에게 돌아옵니다. 신부는 반가이 맞으며 “제가 은잔과 함께 촛대를 주었는데 형제님께서 촛대를 두고 가셨더군요”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위기에서 장발장을 구해 줍니다.

이것은 은혜의 승리입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려는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바로 구원을 이뤄 가는 능력입니다.

원망과 시비를 끊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백성, 자기의 의지를 포기한 사람들이 갖는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14절 말씀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첫째,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 사람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원망과 시비는 의성어입니다. 말들이 달릴 때 ‘딸그락 딸그락’거리고, 까마귀는 ‘까악 까악’하고 웁니다. 그것처럼 여기서 원망은 중얼거리는 것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원망은 감정이 섞인 중얼거림이요, 시비는 지적인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불평과 불만의 소리입니다.
마땅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구원을 이뤄 나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원망과 시비를 지적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비하다가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음도, 연약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처음 노예 상태에 있던 그들을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웅얼거렸습니다. 애굽에서 구해달라고 불평합니다. 왜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불평합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먹을 게 없다고 불평합니다. 고기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자신들이 얻고 누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감사도 없이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고정돼 주님이 나의 구원이시고 공급자이시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고 고백한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불평, 불만을 이길 수 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둘째,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은 어그러져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이 언제나 말세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 세상과 등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선 안 됩니다.

흠 없고 순전한 자녀
우리의 목적은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죽음 안에 갇혀 멸망해 가는 세상에 생명을 구원하고 어둠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빛으로서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흠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결점이나 책망이나 비난을 들을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스스로 평가할 때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상에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끊임없이 순결하고 정직하며 성결한 삶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완성시키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베푸는 산해진미도 거절했던 것입니다. 또 대적자들이 다니엘을 모함하려고 그의 흠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책잡았습니다. 그래서 법을 고쳐 일정한 기간 동안 다리오 왕 외에 어느 신이나 인간에게 기도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기도하는 다니엘을 왕에게 고발했습니다. 왕이 처벌했지만 다니엘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의 자랑이나 능력은 말씀대로 살려는 것, 순전함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것, 말씀이 삶을 축복하는 것 등입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한 게 있으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무너져 가는 GE를 인수해 세계적인 그룹으로 키웠던 잭 웰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뒷마당을 다른 사람의 앞마당이 되게 하십시오.” 그는 직원들에게 청소를 시켰는데 항상 불평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이유를 물으니 ‘왜 우리는 매일 청소만 해야 하냐, 우리는 더 많은 월급을 받지 못 하느냐’며 따졌습니다. 골칫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무 소용없고 또 어려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용역 회사에 청소를 맡겼습니다. 그는 어려움을 그런 방법으로 극복하여 위대한 기업을 일궜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망과 불평 중에 부족한 것,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부분이 그대로 감춰져 있다면 우리 삶은 곪아 썩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도려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꺼내놓고 회개하여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 나의 연약한 부분이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밝히는 참된 영광
우리의 육체, 영혼, 마음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 나갑시다. 우리가 죽어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늘 영광을 보게 되는 그 날까지 바울처럼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자신을 내어 드립시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의 당당함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죽을지라도 결코 하나님 따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갈등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는 방법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야 다시 너희에게 올 수 있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주님은 우리와 영원한 벗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거룩한 영으로, ‘파라클레토스’(곁에서 위로하시는 성령 하나님)로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 복음, 새 생명을 밝히 드러낼 때 바울처럼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두렵고 떨림으로 끝까지 복종하여 구원의 자리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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