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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명한 기준 (엡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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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오래 전에 기록해 두었던 제 기도 노트를 발견하고선 펼쳐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 노트를 보는 것은 축복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역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 움직입니다. 우리의 삶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이뤄집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리의 미래를 엿보게 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별을 따라 갔던 것처럼 기도는 삶의 별과 같습니다. 기도를 따라 가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축복의 삶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삶의 등불입니다. 큐티한 것을 적는 것처럼, 기도를 적어 보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삶이 흔들릴 때 기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점검하고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한 기준은 탁월한 선택을 제공
기도 노트를 보면서 갈등 중에 있었을 때 기록한 시 ‘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 참된 자유 알아
애써 머물러 있으려나
주는 내 눈에 안 보여
이리저리 헤매다 돌아온 나
깨지고 멍든 가슴 둘 곳 없어
쌓였던 선행 겉옷 삼아 감추려나
덮으면 덮을 수록 욕돼
오던 길 되돌아가려나
당신 가리신 겉옷, 속옷
다 벗기까지 달리셨는데
수천의 옷자락 부여잡고
뒹구는 내 모습
되돌아가려나
되돌아오려나

갈등은 항상 고난으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유혹, 조건이 주어질 때도 갈등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결혼해 큰 아이가 열 살, 둘째 아이가 여덟 살인데 최근에 셋째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 “주여, 쌍둥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사실 결혼 전에 아내와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 너무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고 3년 동안 연애하면서 절반은 남들에게 숨기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데이트하던 중에 권사님, 사모님들이 자꾸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겁니다. 사실 기분이 좋았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갈등을 이기고 아내와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것은 ‘선명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명한 기준이 있다면 여러 상황과 환경이 바뀔지라도 그 기준에 따라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항상 분명하고 확신에 찬 기준이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겸손’, 바울에게 ‘십자가’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최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기준이 선명할수록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왜 우리를 불러 세우셨는지 확실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3,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선, 삶에서 기본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의 삶은 너의 소유가 아닌 나의 소유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계획을 갖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는 실패나 후회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군사로, 제자로 각자 사용대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복은 영속하지 않고 만족이 없으며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평화·기쁨·만족이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이 주는 복에 속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등지고 세상의 것을 좇을 때가 있습니다. 탐욕과 명예와 세상 지식과 쾌락을 좇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게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은 믿음으로 시작한 기업이 성공했을 때 다윗과 솔로몬처럼 흔들렸던 것을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것을 얻고 보니 마음이 높아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니 외로워서 세상과 타협하여 숱한 유혹에 넘어갔던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화장실 안에서 겪은 사건’ 때문입니다. 박 회장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물질의 복을 따라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모든 신령한 복’은 제외되는 것이 없습니다. 물질이나 건강의 축복도 포함됩니다.

‘거룩’한 사람으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주신 복을 누리는 데에 있어서 몇 가지 기준을 요구하십니다.
첫째, ‘거룩’입니다.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거룩하다(하기오스)’는 ‘다르다, 분리되다’는 뜻입니다. 성전과 건물은 다릅니다. 제사장과 보통 사람은 다릅니다. 희생 동물과 보통 동물은 구별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구별되느냐 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로 다른 건물과 구별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분신이기에 다른 사람과 구별됩니다. 거룩은 모양에 따라 구별되는 게 아니라 영혼의 능력으로 구별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을 좇지 말고 ‘말씀’을 좇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격리되어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해 나가는 일입니다.

‘츠기하라 치우네’라는 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외교관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목적을 이뤘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러시아에서, 후반에는 리투아니아에서 일본 대사로 근무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집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독일 비밀 경찰을 피해 죽음의 사지를 넘어 폴란드에서 도망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 비자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일본 비자가 있으면 유럽으로 도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치우네는 본국으로 전보를 쳤습니다. 도쿄에서 ‘절대 안 된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그는 출세와 생명을 구하는 일로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치우네는 본국의 명령을 거역하고 일본 비자를 발행했습니다. 28일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자기를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탈출구를 열어 주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치우네를 파면했고, 그는 ‘전구 장사’를 하며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한 일이 세상에 드러나자, 많은 기자들이 찾아와 그의 삶을 취재했습니다. 기자가 그의 아들에게 “만약 당신 아버지가 외교관이었다면 보통 이상의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아버지의 선택에 만족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원하셨을 때 아버지는 자신을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치우네는 유대인을 위해 ‘옳은 일’에 목숨을 바쳤을 때 그가 외교관으로 꿈꾸던 일본을 선전하고 부흥케 하는 일이 6천여 명의 유대인들에 의해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광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입니다.

우리는 거룩도 모양을 갖춰 하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한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거룩은 ‘버섯처럼 쌓여 있는 거룩이 아니라 소금처럼 녹아있는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결코 ‘바리새인’이나 ‘에세네파’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구원하는 소금과 같은 거룩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거룩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기준은 ‘거룩’이어야 합니다.

흠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시는 두 번째 이유는 ‘흠이 없게 하시려고’입니다. ‘흠이 없다’는 헬라어는 ‘아모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 앞에 옵니다. 제사장들은 희생 제물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합니다. 흠이 없는 제물이라고 판단되면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는 이유는 흠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온전히 이뤄지도록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흠이 없음’은 비교 우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차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완전의 삶, 최고의 삶, 말씀의 삶을 선택해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 등 모든 것에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만족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유하고 주어진 상황과 처지에 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부르심이 자기 안에 온전히 이뤄지기까지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베푸신 기적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잔치하는 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고 말씀하시고, 마리아는 종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명하든지 그대로 하라”하고 명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비록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구주이신 예수님께 요청함으로 완전한 혼인 잔치를 이룬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삶, 약속하신 삶, 보여주신 삶을 포기하지 않고 구할 때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질을 바꾸시고 필요를 채우심으로써 원하시고 약속하신 흠 없고 온전한 삶을 누리도록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세 받은 자녀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5, 6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명한 기준 셋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삶은 아들로서의 삶입니다.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다’는 말은 당시 사회 제도를 인용해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로마의 가족 제도는 가부장적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고 팔 수도, 노예로 만들 수도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때로 이방 사람을 법적인 양자로 삼기도 합니다. 양자 결연식은 ‘추’가 달린 저울로 합니다. 한번 아들의 값을 주고 팝니다. 그러면 본래 아버지가 삽니다. 다시 그 값으로 팝니다. 또 다시 삽니다. 세 번째 팔고 나서는 다시는 돈을 돌려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완전히 팔고 완전히 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을 산 아버지는 로마 행정관 앞에 가서 양자 신청을 합니다. 그러면 양자 아들은 본래 집에서 어떤 의무가 있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유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맞이해 준 아버지의 아들로서 권세를 갖고 누리게 됩니다.

저의 군 생활에서 일병 시절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문산 쪽에 있는 모 대대에 배치받았습니다. 처음에 주특기가 없이 소총수였으나 나중에 정보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밑으로 후임병이 부임해 오지 않는 바람에 9개월 동안 막내생활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당시 해안 지방으로 간첩이 많이 침투해 경비를 맡고 있는 방위병을 현역으로 교체하자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산에서 해안 대대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연대에서 대기하던 중 해안 대대로 보내지 않고 연대 정보병으로 인사 명령이 났습니다.
그런데 연대에는 일병들이 많아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왜냐하면 군기는 항상 바로 윗기수가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병들이 많으면 여기서도 정말 힘들겠구나’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제가 부대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로 위 상병이 부르더니 “김일병, 이제부터 눈에 보이는 일병한테 절대 경례하면 안 된다”하는 겁니다. 제가 깜짝 놀라니까 “네 눈에 보이는 모든 일병들은 다 방위병들이다. 방위는 네 졸병이다”하고 현역 일병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 말해 주었습니다. 제가 길을 가는데, 지나가는 일병, 이등병들이 경례를 올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되, 그냥 살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보고 평가하신 후 자녀로 삼으시는 게 아니라 믿음의 삶을 살기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권세와 축복과 능력을 갖고 살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군대에서 일병의 권세도 큰 데, 하나님 아들의 권세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세상 앞에 무릎꿇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생명을 다해, 온 우주와 역사를 통해 이끌어낸 하늘의 사람입니다. 우리 삶을 세우시고 완전케 하시며 ‘영원’을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어깨를 펴십시오. 비록 감옥에 있을 지라도, 실패·절망이 홍수처럼 덮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하나님의 백성된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사십시오.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 더욱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1-3)하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당당하며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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