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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택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살전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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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로부터 온 아름다운 소식
우리나라의 ‘새문안교회’,‘정동감리교회’, ‘내리감리교회’처럼 데살로니가교회도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와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며 2년정도 목회를 합니다. 그때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서 기록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콘스탄티노플, 로마와 더불어 당시 3대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데살로니가는 로마 전역을 묶는 대 도로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방과 서방을 잇는 군사도로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술의 신이며 쾌락의 신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를 섬기면서 성적 방종과 타락이 극심했던 이 곳은 오늘날 대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대한 세상 한 복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 데살로니가는 복음의 실습장이었습니다. 만약 이 데살로니가를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다면 로마제국 전역을 복음화하고 땅끝 선교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는 바울이 마음 먹고 왔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원치않게 아주 짧은 기간밖에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세 차례 안식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증거합니다. 그 짧은 복음 증거 기간 동안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복음화됩니다.

이에 타격을 받았던 유대인들의 무리가 시장에서 깡패들을 동원해서 폭동을 일으키고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와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과 2, 3개월 밖에 전도를 못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어떠하든지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때 데살로니가교회에 불리함을 알고 어쩔수 없이 디모데를 보냅니다.
이 교회로부터 디모데는 두 가지 소식을 가져 왔습니다. 하나는 기쁜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러 근심어린 소식이었습니다. 기쁜 소식은 그들이 믿음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바울은 먼저 문안 인사를 합니다. 그 당시 가장 보편적인 인사였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하고 문안 인사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시간, 예배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성도들간에 아름다운 축복과 교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하며 서로 인사해보십시오. 출근하고 퇴근할 때 아이들에게도 꼭 이 축복을 하십시오.

우리가 받아야 할 복중의 복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복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한 후 바울은 감사와 칭찬과 격려를 잊지 않습니다. 어린 교회, 많은 환난과 문제가 있는 교회였기에 지적하고 책망할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감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칭찬과 격려입니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것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격려하고 칭찬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그려면 자신감을 얻어서 오히려 자신의 결점을 극복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
여기서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세 가지 감사제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개척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놀라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기독교 전체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앙덕목 세 가지를 들라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열매여야 합니다. 보통 믿음, 소망, 사랑하면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역사가 있고 사랑은 수고의 열매로 나타나고 소망은 인내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일하고 봉사하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헌신하게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일하고 봉사하고 섬깁니다.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경건생활도 철저히 하는데 나타나는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죽어 있는 거짓 경건일지 모릅니다.
믿음의 일은 어쩔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1인 1사역 1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기꺼이 수고합니다. 강요해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수고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헌신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이 말을 하려면 손해보고 희생하며 헌신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기도를 놓아 버리며 인내를 중단하고 싶을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희망으로부터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소망은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게 합니다. 우리를 평가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모든 형편을 아시고 살펴 주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때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상줄 자에게 상을 베풀고 축복할 자를 축복하고 벌할 자를 벌할 것입니다. 선악간에 모든 것이 드러날 그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넉넉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주 앞에 갑니다.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서며 칭찬받기 위한 참된 소망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왕같은 제사장으로 택함 받은 백성
두번째 바울이 감사한 것은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여러 환난과 시험이 오고 비록 병중에 있을지라도 구원만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나같은 사람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설 수 없는 죄인중에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은 사랑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나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사랑 받는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배척 받고 손가락질을 당할 때 바울은 그들을 향해 ‘세상은 너를 버렸지만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요, 하나님이 선택한 자’임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힘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요 하나님앞에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선택에 대해 에베소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내가 이 자리에서 예수 믿을 것을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정하고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비밀을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의 선택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예수 믿을 것 같은 사람인데도 끝내 믿지 못한 가룟유다 같은 인생은 선택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받은 자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선택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바로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 하나님의 예정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고구마 전도왕’을 소개합니다. 바로 김기동 집사님입니다. 고구마가 익은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젓가락으로 쿡 찔러보면 됩니다. 익은 것은 쑥 들어가기 때문입니다.이분도 전도할 때 이런 ‘고구마 전도법’을 쓰는데 만나자 마자 거두절미하고 ‘예수믿으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택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바울이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 소망이 없어 보이는 고린도에서 목회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중에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2년동안 목회를 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택한 백성이 남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담대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택한 자는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함께 하시고 지금 역사한다는 사실을 복음 전하는 자는 압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할 때 큰 능력과 확신으로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본문으로 똑같은 메시지를 전해도 성령이 기름부으시면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은혜가 쏟아지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 심령에도 큰 확신으로 역사합니다. 성령님은 말씀 전하는자와 받는자 속에서 내적인 확신으로 동시에 역사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지금 형편은 예수 믿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도저히 은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은혜와 기쁨이 있고 말씀이 들리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으심이 있을 때 성령의 검인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골수를 찔러 쪼개서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회개케하고 변화시킵니다.
말씀이 없는 성령의 역사는 신비주의와 열광주의에 빠집니다. 이는 마치 전쟁터에서 무기 없이 소리만 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반면에 말씀만 있고 성령이 없는 것은 종이 호랑이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단순한 윤리이고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
바울이 감사한 세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썼을 때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은 이들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감사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오랫 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본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이 본을 보일 때 먼저 믿은 우리를 부끄럽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 2절에는 이 마게도냐 교회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가장 부자교회였던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기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가장 부요하고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임에도 하나님앞에 드리는데 인색한 이 교회를 부끄럽게 하기위해 ‘마게도냐 교회를 봐라 본이 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본이 되는 이유중 하나는 많은 환난 가운데도 큰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격의 성숙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둑도 나보다 수가 높은 사람과 둬야 느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도전이 되는 사람, 본받을 만한 사람과 신앙생활 하지 않고 항상 시험드는 사람과 있으면 진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제자 훈련 방법은 성경공부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도는 공부가 아닙니다. 삶속에서 본을 보임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새벽기도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원 자주 가는 사람 만나면 기도원에 자주 가게 됩니다. 선교사를 만나면 선교사를 따라가게 됩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무척 중요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질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좋은교회에서 좋은 성도들과 함께 좋은 훈련을 받으면 세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본받고 있기에 나를 본받으면 주님을 본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주를 본받으면 어느새 나를 본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복음을 듣기보다 먼저는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는 자를 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교회와 복음을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실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본이 되지 못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버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 서로 서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고 예수 믿는 가정이 어떤 모습이며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줄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제가 놀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변하지 않는 분들을 보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변하지 않기로 결정한 분 같습니다. 변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본받지 않고 세상을 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삶에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놀라운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갓 신앙생활했는데 눈에 띄는 놀라운 변화를 보이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아서 매주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결단하고 지금까지 한 주도 빠짐없이 전도하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믿자 마자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분도 계십니다. 받은 사랑도 많지 않고 훈련받은 것도 많지 않은데 하나님앞에 큰 헌신과 헌금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이 여러분들의 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온누리교회는 모든 교회의 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꿈은 ‘바로 그 교회’입니다.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예수님이 의도하셨고 사도행전에서 보여졌던 바로 그 교회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바로 그 교회’를 모델로 본받을 때 이 땅에 그와 같은 많은 사도행전적인 교회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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