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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영광 우리의 기쁨 (살전 02: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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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참된 리더십, 부끄러움 없는 지도력에 대해 놀라운 말씀을 줍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참된 리더십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사람을 세우는 리더십입니다. 따르는 사람을 성공시키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람을 세우는 리더십이었습니다. 별 볼 일 없던 사람들,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셔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며 영향력입니다.

18세기에 세계를 움직였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요한 웨슬레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웨슬레에 필적하는 죠지 휫필드라는 영향력있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닳아서 내 생명이 없어지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던 휫필드는 병석에서도 몸을 돌봄이 없이 설교를 했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설교는 요한 웨슬레보다 탁월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죠지 휫필드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웨슬레가 사람을 세울 줄 알았던 반면 죠지 휫필드는 홀로 영웅이었습니다.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죠지 휫필드보다 요한 웨슬레가 훨씬 지대한 것은 사람을 세우는 진정한 지도력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맺는 마음 밭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열매중의 열매였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기에 혼신을 다해 준비하고 섬겼습니다. 기꺼이 고난과 능욕 가운데 나아갔으며 노동을 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사역에 대해서 사람들은 최악이며 실패라고 평가했습니다. 악의에 찬 조롱의 소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복음을 들었던 개척교회이고 초신자들이었지만 놀라운 복음의 열매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수고,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척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의 본이 되었습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전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 교회를 보면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런 짧은 기간안에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맺었던 비밀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들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들을 때 자랍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자에게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믿음이 얼마나 건강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말씀을 전하든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건강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어떤 땅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지만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곳도 있습니다. 씨앗이 어디에 떨어지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길 가, 바위, 가시떨기속이 아닌 옥토같은 마음밭에 뿌려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 맺습니다. 순종하는 마음과 간절함으로 받아 들이는 말씀은 그 믿는 자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좋은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신학교가 있는 나라는 미국과 독일입니다. 영국에도 탁월한 신학자와 유명한 설교가와 학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설교집을 보면 설교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빈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럽 교회는 텅 비어 있으며 미국교회는 쇠퇴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교회가 중국에 있습니다. 중국교회는 신학생들이 입학하면 그들이 졸업할 때까지 다시 신입생들을 받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인가한 신학교가 세 개 밖에 없으며 입학하는 학생들 수도 40-50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현재 공식적으로 1억이상의 크리스천이 있고 하루에 교회가 두 개씩 생겨납니다. 신학교, 지도자, 안수 받은 목사도 제대로 없는 그런 상황인데도 사람이 변화됩니다. 핍박을 이기고 고난을 이깁니다.

이 비밀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밭에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 냉담하면 열매맺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유럽교회이고 비어가는 미국교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단순하게 성경을 읽어주기만 해도 사람들이 변화가 되는 것은 전폭적으로 믿고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유대에 있는 교회들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탁월한 교회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목회하는 예루살렘교회, 사마리아교회, 안디옥교회같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교회 중의 교회였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끊이지 않는 교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본이 되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교회의 역사와 전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역사입니다.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복음이 선포되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역사와 전통보다 더 중요합니다. 교회는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온누리교회를 생각하면 감사가 되는 것은 16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도전을 줄 수 있는 복음의 역사때문입니다.
영국에서 교회가 카톨릭보다 더 전통적이 될 때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한 부류는 북미로 다른 한 부류는 남미를 향해 떠났습니다. 남미가 먼저 발견되었고 남미에 월씬 많은 관심과 투자가 있었습니다. 반면 북미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던 개발 되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북미와 남미는 교회도 역사도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의 이런 결과가 온 것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간 사람들은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났지만 남미에 간 사람들은 유럽에서 나지 않는 많은 보물을 찾아 갔기 때문입니다. 남미는 다시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브라질에서 진행되는 사육제는-사순절을 시작하는 날, 예수님이 오시는 대강절을 기다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음란하고 방탕한 축제의 전형이 되버렸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힘있게 빛나는 성도
데살로니가교회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큰 증거는 고난을 견디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에게 복음과 생명이 제대로 들어가 있으면 고난이 올 수록 빛이 납니다. 신앙생활이 평탄했으면 신앙의 성장 속도가 더딜 수 있는데 고난이 오히려 그를 더 단련하고 연단해서 짧은 시간안에 온전한 신앙으로 다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 앞에 흔들리고 물러서는 것은 연약한 증거이며 기초가 약하고 복음이 희미한 증거입니다. 복음과 생명이 제대로 들어가고 성령께서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고난이 와도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더 성숙해지고 강해져서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견디는 이 교회는 바울의 기쁨이고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초신자들이기에 오해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 복은 고사하고 고난이 계속되니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그들에게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은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만사형통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때 오히려 시련이 닥치기도 합니다. 이 때 하나님 탓이라고 생각하면 원망이 생깁니다. 반면 내 잘못으로 돌리면 저주의식에 빠집니다.

그러나 고난은 특별한 것이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할 때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것은 복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환난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내 삶은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죄와 육신의 욕심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단의 권세, 죽음의 권세 아래 있다가 예수안에 있는 빛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삶이 질적으로 바뀔때 단련과 연단은 반드시 있습니다. 당연히 변화에 따른 진통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자기 동족, 친족, 형제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을 때 바울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도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고난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동족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하기까지 처절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박해가 우리 신앙과 삶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고난 뒤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고 하나님나라 운동이 시작될 때 복음 전하는 자를 곱게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선교사를 환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땅에도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렀는지 모릅니다.
자기만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지금 팔레스타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방인들과 타협을 하지 않는 배타성 때문에 결국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모든 민족을 차별했던 이스라엘이 지금은 역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보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유대인이라 할 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은 이처럼 위험합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사단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과 진리로 거듭나는 일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잘못된 것도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신앙 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고와 희생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복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핍박하는 자는 자기의 죄의 댓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고난 받는 우리들은 축복이지만 핍박하는 자는 자기의 죄의 댓가를 반드시 채웁니다. 죄악이 차면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사단의 도구가 되는 일은 자기의 죄를 채우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끝까지 훼방했던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십시오. A.D 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완전히 폐허가 됐습니다. 성전은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가 됐습니다. 다시 기회를 얻어 유대인들이 잠깐 팔레스타인에 거주 했지만 A.D135년에 일으킨 폭동으로인해 팔레스타인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1948년 5월 14일까지 그들은 그 땅을 밟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는 사람들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결국에는 아브라함에게 맺은 언약처럼 이스라엘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구원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주님의 자랑과 기쁨되는 믿음의 삶
염려했던 교회가 오히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었기에 바울은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이 모든 사역은 성령께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랑을 데살로니가교회가 끝까지 간직하고 있기를 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믿음을 지키며 바울이 자신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떠난 것은 얼굴이지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역약한 교회, 고난받는 교회, 지도자를 잃어버린 교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교회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고 있다’고 1장에서 감사했던 바울은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 갔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것은 우리 믿음입니다. 내가 받은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전도하고 양육하고 복음을 위해 해산하고 낳은 사람들입니다. 수고함으로 해산한 영혼들은 하나님앞에 가져가는 우리의 면류관들입니다.
주님보실 때 우리는 그 분의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며 면류관이요 기쁨이요 영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가서를 통해서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세상사람들뿐 아니라 자기의 형제들조차 멸시했지만 주님은 ‘내 신부이며 내 사랑하는 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며 영광이듯이 주님께도 내가 전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고난과 연약함 가운데서도 주를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는 일들은 하나님의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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