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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결하십시오 (살전 04:1-8)

첨부 1


교육은 기초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신앙의 핵심적인 진리와 믿음의 도리들에 대해 명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교리는 천천히 배울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삶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는 초기에 황금률과도 같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은 어느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어떤 사람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실현 불가능한 기준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신앙의 핵심과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목표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4백30년간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 났지만 노예근성을 뽑아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다음이 아닌, 애굽을 빠져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모든 율례와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마지막 지상명령을 남기시며 모든 사도적 믿음과 교훈들을 초신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12사도의 가르침을 기록한‘디다케’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마치면 곧장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디다케를 통해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모여 예배후에 공과공부, 분반공부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온전할 것을 말하며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가 데살로니가서를 쓴 목적도 믿음을 바로잡아서 온전케 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4장 1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불과 몇개월 밖에 전도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기간 동안 주께서 명한 것을 모두 가르쳐야 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쳤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1, 2절에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윤리와 지침은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신자들에게 ‘새벽기도는 나중에 천천히 나와도 괜찮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술, 담배도 적당히 하면 괜찮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 순예배 참석, 일대일에 대해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냥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남아서는 안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쉽고 편하고 달콤한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거룩 혁명’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삶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안에 새로운 열망이 싹틉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 이전에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열망과 열정과 소원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상을 받기 위함도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한 의무감으로 윤리를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이 있을 때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에게 기쁨이 됩니다. 기독교 교육은 의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더욱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 점점 커감을 의미합니다. 그런 마음이 시간이 지날 수록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자녀들이 온전하고 흠없이 자랄 때 부모의 마음에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거룩한 삶을 향한 열정이 있을 때 하나님께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거룩은 외적인 경건의 모양이 아닙니다. 거룩은 구별된 삶을 뜻합니다.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된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옛 사람의 삶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역사속에 오심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듯이 내 삶에도 분명한 전환점이 생겨야 합니다. 이전과 이후의 삶의 내용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면 우리는 무늬만 크리스천인 가짜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구별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죄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완전히 들어가야 합니다. 일단 죄로부터 빠져 나왔을 지라도 다시 들어갈 확률이 많기 때문입니다. 손 씻고 끊고 버렸을지라도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죄에서 나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몸을 드릴 때 구별이 완성되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할 때 비로서 거룩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삶 전체로 퍼뜨리는‘거룩의 향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할 때 거룩히 여기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윤리의 대강령입니다. 거룩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거룩을 잃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만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이 없으면 축복도 없습니다. 거룩함이 없는 축복은 재앙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데 축복이 온다면 그것은 재앙과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이 없는 축복은 자신을 더 깊은 죄악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더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거룩의 시작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거룩을 연습하십시오. 나아가서 예배를 통해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 거룩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음란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위선이며 거짓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한 거룩함은 먼저 음란을 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은 정결한 삶, 투명한 삶, 부끄러움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생활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거룩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정상적인 성’과 ‘색욕’은 전혀 다릅니다. 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색욕은 육신의 즐거움을 채우는 도구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며 인격체가 아닌 물건 취급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철저히 비인격화시키며 그 안에 있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는 일들은 색욕하는 사람들의 죄악입니다.

삶과 영혼을 휘젓는 ‘음란’
당시 로마와 헬라 세계는 성적타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화산과 지진으로 폐허가 된 폼페이라는 도시에는 음란한 현장의 모습들이 아직까지 화석으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음란을 영혼을 찢어 놓는 심각한 죄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신성시 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내외에 첩을 두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남성다움으로 여겼습니다. 아테네에서 가장 탁월한 입법가요 행정가였던 솔론은 ‘매춘을 합법화해서 그 수입으로 성전을 건축하자’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문화가 당시 교회안에까지 침범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의 특징은 음행을 당연스럽게 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음란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임을 알게 됩니다. 살인, 우상숭배, 음행은 같은 죄의 반열에 드는 심각한 죄임을 초대교회부터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음란 중에 가장 악랄한 것은 매매춘입니다. 성을 상품화 하는것은 가장 추악한 죄악입니다. 돈으로 인격과 한 사람의 영혼을 사는 것은 죄중의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퇴폐와 향락과 성을 파는 관광국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우리의 교육과 가치관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교육이 지향하는 것은 입시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통치철학은 ‘잘 살아보세’와 ‘정권재창출’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덕적인 국가, 문화국가의 가치가 실종된 현실입니다. 그리고 비전을 잃어버렸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리면 백성이 방자하게 됨을 성경은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부재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정체성의 상실을 낳았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사람인가를 아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결코 함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기르면 이런 세상 속에서도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출세와 성공이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습니다. 이로 인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타인과 공동체가 고통받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사회전반에 음란이 확산되는 것도 이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 부끄러움도 묻혀 버렸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움을 잃은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회개도 없고 반성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마음은 죄를 두려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와 축복을 강조하는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아름다운 성
성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부부관계 안에서 그 즐거움과 복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을 잘못 사용하면 파국이며 재앙입니다. 성은 마치 큰 뚝안에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뚝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강물이 뚝 안에 있으면 푸르름과 생명을 입히는 일에 귀하게 쓰여집니다. 그러나 그 강물이 뚝을 넘으면 재앙과 파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은 하나님이 주신 합법적인 관계와 질서 안에서 잘 다루어지고 안전하게 보호될 때 우리에게 기쁨과 유익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범위를 넘어선다면 뚝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위험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배고플 때 밥먹는 것처럼 성욕을 채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성욕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 일은 없습니다. 독신으로도 얼마든지 건강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독신으로 지낸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욕은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의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부부관계안에서도 음란이 없어야 합니다. 배우자에 대한 존중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성의 축복을 누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란의 악영향은 심각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음란과 색욕에 빠지는 것은 형제들을 해치는 일입니다. 자기의 즐거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모의 음행은 자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음란이 있을 때 공동체의 결속은 깨어집니다.

그래서 이 음란은 주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무서운 형벌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음행에 대한 죄는 반드시 그 시대에 자기가 보응받습니다.
가출하는 청소년의 대부분은 깨어진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부모의 음행과 비행으로 가출하는 청소년이 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무너질 때 공동체와 신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는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마귀의 거짓된 속삭임에 속지 마십시오. 거룩함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아닙니다. 무미건조하고 부담스럽고 힘겨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음욕속에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음란은 속임과 거짓이며 ‘독이 묻은 사탕’과 같습니다. 거짓된 상상과 환상을 만들어 유혹하지만 그 안에는 결코 참 만족이 없습니다. 후회만이 남을 뿐입니다.

거룩에서 오는 참기쁨과 자유함
그러나 거룩함에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기쁨, 하늘의 기쁨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거룩함에 진정한 평강과 자유와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간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부요함과 기쁨과 평강과 축복이 우리 속에 쏟아지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거룩함을 저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저 버리는 것입니다. 음란은 형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성적타락은 반드시 영적타락을 가져 옵니다. 성적타락 속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고 음란의 영이 개입하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성적순결과 영적순결은 일치합니다. 성적순결을 잃은 사람은 영적순결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올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음란과 쾌락 속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기쁨이며 평강이며 능력이며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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