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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때는 깨어 있으십시오 (살전 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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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히 계속 되리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종말과 함께 역사의 종말이 반드시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오리라’고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함으로 깨어있는 사람들, 주를 사랑하며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에게는 구원과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언급하신 위대한 예언 네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리라’는 부활에 대한 예언입니다. 둘째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세우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내가 다시 오리라’는 재림의 예언입니다. 네 가지 예언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이미 성취됐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는 강력한 증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가 시작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모였던 사람은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20억정도의 크리스천이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셀 수 없이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정권, 독재정권은 무너져도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영원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강력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며 책임다하는 삶 예수님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면서도 재림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마귀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귀신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무시하는 태도, 귀신의 존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귀신을 두려워함으로 귀신에 얽매여 있는 태도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러한 마귀론을 경계했습니다.

마귀의 세력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밝히 드러내신 주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권세를 밟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박살내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보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니라

사탄과 귀신의 세력들이 주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지만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믿지 있는 현실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세술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즐겁고 폼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롯의 때,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며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심판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일상생활에 잠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태도는 심각한 문제이기에 주님은 죄와 죽음과 심판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현실속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깨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책임을 다하는 삶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극단주의적이고 열광주의적인 사람들은 재림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고 건전하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미선교회의 경우처럼 일상적인 삶까지 포기합니다. 나아가서 때와 시기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집니다. 1,2 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종말에 대한 진리를 분명히 가르쳤기에 바울은 더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에서 그 날과 그 때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7절을 보십시오.

때와 기간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산다면 때와 시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때와 기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는 세례요한의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셨습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사람들이 때와 시기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한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자신감 상실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때와 시기에 대한 주님의 첫번째 비유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고 하지 않고 오기에 항상 대비 해야합니다. 우리는 단지 수많은 징조를 통해 재림이 가까왔음을 예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분쟁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 변동치 않을 것이 오기 위해 흔들릴 것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도록 주님은 우리 삶의 기반을 흔드십니다. 주의 날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해산의 비유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여인이 잉태한 후 기간이 차면 해산할 날이 갑자기 옵니다. 분명한 사실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도 기한이 차면 반드시 옵니다. 주님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들의 구호입니다. 예레미야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할 때 거짓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한 절대로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멸망이 돌연히 임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세상이 영원불변할 것처럼 말하며 주의 재림에 대해 비웃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불경건, 불의, 회개치 않는죄에 대해서 심판할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렇기에 재림의 때에 대한 대비는 필연적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는 깨어 근신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처럼 임하지만 깨어 있으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어 빛된 삶 사는 ‘빛 사람’
우리는 재림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과 재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누구든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자들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날짜를 예고한 것 자체가 지옥에 갈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책임은 있습니다. 맞지도 않은 날짜를 자꾸 예고해 놓으면 ‘양치기 소년’의 경우처럼 돼버립니다. 안식교의 창시자 화이트여사는 예수님의 재림을 선포하며 그 날짜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을것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이 계속해서 거짓으로 드러날 때 정작 진짜 오실 시기에는 아무도 듣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결코 날짜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깨어 빛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런 삶이 깨어 있는 빛의 아들, 낮의 아들들의 모습입니다. 낮에 다니는 사람은 형편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밤의 사람들처럼 흐트러진 모습으로 다니지 말고 항상 빛가운데 거하십시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삶의 이중성입니다. 이들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홀로 있는 개인적인 삶의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결국 깨어 있는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14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진리를 찾지 못한 목마름속에서 방황하던 어거스틴은 이 말씀에 이끌려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습니다. 어거스틴이 깨어날 때 그 시대가 깨어났습니다. 그는 혼탁한 중세를 붙든 빛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어둠에서 깨어나 빛의 갑옷을 입을 때 가정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하고 역사가 변하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에게도 해당합니다. 지금이라도 방탕과 방종,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삶에서 벗어나 주 앞으로 나오면 개인이 변화됩니다. 나아가서 가정이 바뀌고 자녀들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으로 잠들어 도덕적, 윤리적인 나태함에 빠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상생활에 잠겨 주님 오심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상적인 삶에 빠져 영원한 삶을 잃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오늘을 살기위해 영원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지난 2월 인도에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7.3의 지진으로인해 한 도시가 폐허가 됐습니다. 이만명 이상의 희생자와 십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생겼습니다. 몇 주후인 3월 1일에 시애틀에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던 이곳은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전신갑주 입고
깨어 있음과 깨어있지 못함의 차이는 이와 같습니다.안일함과 거짓평안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성령님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은사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은사와 재능을 묻어두지 마십시오. 주님은 맡기신 것을 찾으실 것입니다. 주신 것, 베푸신 것을 찾으실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땅에 묻어 두고 엉뚱한 행동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으로 다른 사람을 깨우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깨우는 일은 전도와 증인의 삶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우리가 입는 옷은 세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완전 무장을 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마지막 때는 유혹과 시험과 환란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첨단 과학과 현대지식으로 무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주님 오심에 대한 소망으로 늘 깨어 있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군사로서의 무장입니다.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있으며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에 대해 담대히 말할 수 있는지, 주님 오실 때 나의 믿음과 사랑이 칭찬받을 만한지 살펴보십시오.
돈이나 세상의 권력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을 입은 사람만이 주 앞에 떳떳히 설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가르친 것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었습니다. 마지막날까지 우리가 지켜야할 은혜의 세 요소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9,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근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깨어 있는 삶은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경건치 않음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있지만 깨어 있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날, 영광의 날, 혼인잔치가 될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 깨워 주님 앞에 인도하는 부활 믿음
그 날에 우리가 주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신실함과 착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의 보혈의 능력으로인해 우리는 주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 주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은 깨든지 자든지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살아도 주 안에 있고 죽어도 주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와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우리가 깨어서 빛의 자녀로 빛의 갑옷을 입고 두려움 없이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홀로는 흔들릴 수 있으며 낙심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모여 권면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 가지 시련이 닥쳐도 믿음으로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서로를 권면하고 덕을 세울 때 요동치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부활주일은 단순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살아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부활주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삶입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며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만 깨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고 있는 자들을 깨워야 합니다. 깨워서 주님 맞을 준비를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을 깨워 주 앞에 인도하는 일,그것이 참된 부활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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