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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로부터 누구를 통하여 살아가십니까? (갈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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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회화를 배우다 보면 처음에는 아주 일상적인 회화를 배웁니다. 그 중에 하나가 'where from?'입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 출신지가 어디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역감정이 큰 나라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서로 으르렁 거리며 살아온 세월이 벌써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지역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대통령도 전라도와 충청도가 지역적으로 합쳐서 당선된 정부입니다. 한나라당의 대부분은 경상도가 지지기반입니다. 그러나 보니 경상도 사람들의 정서에 부응하는 정책을 펼치기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지역감정은 득보다는 손해가 많은 정서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감정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같은 사회에서는 남과 북이 지역감정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남북전쟁을 치룬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출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글의 첫머리에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뽑힌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사도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된 것이고, 하나님을 통하여 뽑힌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배경에는 유대로부터 갈라디아에 찾아온 사람들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며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방하며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디로부터 자신의 인생이 왔다고 생각합니까? 어디 출신입니까? 이 땅에서 왔습니까? 이 땅 출신입니까?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고, 하나님을 통하여 사도가 되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전치사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는 '아포'입니다. '아포'는 from의 뜻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디아'입니다. '디아'는 through의 뜻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통하여(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도된 것이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믿으십니까? 이러한 신앙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나의 인생이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대통령과 통하는 사람을 실세라고 합니다. 실세인 사람은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서로가 대통령과 통하는 사람에게 잘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대통령과 통해도 이정도라면 하나님과 통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가 사도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부심과 이러한 근원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성공적인 사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이 얼마나 값진 삶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통한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AD32년경에 다메섹에서 회심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을 통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는 어떤 곤경에도 굴하지 않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은 3년동안 회심한 후 열심히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핍박과 오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역을 그만두고 자신의 고향 다소로 귀향하였습니다. 그때가 약 AD35년경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바나바의 권면을 받고 안디옥 교회로 올 때까지 약 10년동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외로운 사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하여 사도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존재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10년동안 다소에서 외롭게 사도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바나바를 통하여 기독교의 중심지인 안디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AD45년경 안디옥으로 바나바의 초청으로 목회함)

바울이 자신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을 통하여 인정받았음을 깨닿지 못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 긴 외로운 사도의 삶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사도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도 사도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며 다녔을 것입니다. 자신을 복음전도의 지도자로 세워줄 것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나마나 거절과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방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의 사도직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하여 인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을 통하여 인정된 것을 알았기에 고난의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길고 험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바울은 복음전도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절에는 이러한 바울의 등장이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 2:1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십사년 후에' 여러분 14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바울은 회심한 후, 17년만에(갈 1:18의 3년과 2:1의 14년을 합친 세월,AD49년 ) 예루살렘 총회를 통하여 이방의 사도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인 받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바울의 외로움과 고통은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통하여 인정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인내할 수 있는 세월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통하여 사명을 받았음을 인정하십니까? 바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바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명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다메섹에서 부르셨지만 우리는 친구를 통해서, 혹은 전도자들을 통해서 삶의 현장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아마 각자의 재능과 관심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양한 사명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결국 바울이 5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고,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삶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고, 헐벗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희생하며 살아갈 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인간의 욕심이 크지만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처럼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러한 내용이 마태복음 7장과 25장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 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34-40)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 생애를 바쳐서 실천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는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20세기에 주목할 만한 두 사람이 있는데 52년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알버트 슈바이처와 79년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테레사입니다.

슈바이쳐는 독일의 오버알자스의 카이저스베르크에서 출생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곳의 성(聖) 니콜라이교회 부목사로 봉사하였고, 1900년 신학박사를 취득한 후, 1902년 스트라스부르대학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후에 학창시절의 결의를 실현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여, 1913년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곧 같은 적도아프리카 프랑스령 콩고(지금의 가봉) 랑바레네로 가서 의료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 포로로 억류되어 사업은 좌절되고, 유럽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1926년 랑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열고 의료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죽는 그날까지 가난하고 헐벗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스코피 출신인 마더 테레사도 캘커타의 센트메리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그 자리를 다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안락한 병원에서 죽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기가 돌보던 사람들은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갔는데 자신만 좋은 곳에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닿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성도들은 누구로부터, 누구를 통하여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통하여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계획되고, 전개되어야 합니까? 오늘도 수많은 연약한 사람들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헐벗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한 우리들의 결단과 각오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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