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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하는 자와 자유하는 자의 삶 (갈 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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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를 가리켜서 흔히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 해방 자유를 얻게 된 이 자유의 문제에 대하여 위대한 선언을 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서'라 한 루터는 이 갈라디아서에 대하여는 '자신은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이만큼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개혁자 루터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루터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었을 때에 그 당시 사람들을 보니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한 자들이 아니었으며, 또 그들의 삶도 성경에서 나타난 자유하는 자들의 삶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종교개혁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로 인하여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개혁은 바울이 이 서신서를 기록했을 때도 일어났었고, 지금도 이 글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그 성경을 기록한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자유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는 갈라디아서가 기록한 것은 필요에 따라서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설교하게 되는 것도같은 필요에 따라서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 3년 동안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냅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구약을 아는 사람으로서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새롭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으로서 그 율법으로는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하는데,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속으로 죄에서 사망에서 마귀에서 자유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교회에서 일하게 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30년 동안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새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AD47년,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수백마일을 여행하여 갈라디아 지방(지금의 터키의 일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나바와 함께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 등 네 곳의 큰 도시에서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세우고 또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것이 1차 전도여행입니다.
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은 AD49년에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실라와 함께 다시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하게 됩니다.
바울이 개척하였던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방문해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해 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격분합니다.
그는 거짓교사들의 거짓 복음의 본질을 파헤치면서 은혜의 복음에 대하여 강조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고린도 전후서의 말씀이 필요했고,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이 말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오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필요하기에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면 다 같은 것이지 거짓된 복음이 있습니까?
우리들은 분을 내어서는 안됩니다.
성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이 복음의 본질을 흐트려 놓는 일에 대하여는 바울과 같이 격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가 싸우는 일이 많고 나뉘는 일이 많지만, 감정문제요, 아니면 물질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하찮은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는 큰 줄 알고 이를 위해서는 혈기를 내고 주먹다짐까지 하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 잘못된 복음이 들어오면 아무리 부흥하는 교회라도 무너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여 준 복음을 훼손하는 그 어떤 자들에 대하여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은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다 손해 본다고 해도 이런 일들에 양보는 없어야합니다. 바울의 의분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써 전도하고, 선교해서 교회를 세우워 놓아도 잘못된 복음을 믿고 있으면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그래서 거짓된 복음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잘못된 교훈, 곧 이단은 오늘에도 있습니다.지금도 양극단의 이단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율법무용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란 어떤 이단입니까? 이것도 두가지 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직접으로 부정하는 유대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도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교회 안의 이단같이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무엇인가 구원의 조건을 은혜 외에 첨가하는 것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에다 할례를 행하는 것 하나를 더 구원의 조건으로 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부인하는 이단은 교회가 쉽게 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구원의 조건으로는 그 어떤 것들을 추가시킬 때에 이 미혹은 잘 분별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더 종교적이고, 매력있고, 합리적으로 여겨져서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런 잘못된 교훈은 뿌리 뽑아 내어야합니다. 이전부터 무엇인가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미신을 섬기던 그 버릇이 남아 있어서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하는 율법주의적인 생각, 이것은 바울이 말한대로 천사가 전했다 해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선행을 보고서 나를 부르셨다. 내게 있는 그 어떤 장점 때문에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이 확실한 구원의 도리를 부정하는 너무도 많은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주의는 아니라도 이 율법주의 적인 신앙형태가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충성과 열심을 내면서도 무언가 공로주의로 내세우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행하는 몇 가지 선행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적인 신앙형태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전적 은혜로 구원 얻어야하는 완전한 구원입니다.
완전한 사죄가 아니면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완전한 의가 아니면 영생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에 자랑하는 자는 주님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안에 얻게된 자유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자유자들의 삶은 방종이 아닌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거짓된 교사들은 여기에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율법무용주의자, 율법폐기주의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율법은 다 소용없다. 폐기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을 어긴 인간이 악한 것입니다.

물론 세상 법은 악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녕질서를 위해서 낸 교통 법규가 지키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중앙선이 있는 것도 신호등이 있는 것도 귀찮습니다. 법이 잘못된 것 보다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악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율법은 결코 구원을 얻기 이전에 구원을 이루라고 주신 법이 아닙니다. 그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법을 다 지킬 수 없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사죄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몽학선생과 같은 것입니다.
이 율법을 이제 구원을 얻은 우리가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하는데 이 율법을 갈라디아서 말씀에는 자유의 법,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요, 은혜 아래 있는 자로서 법을 지킬 때에 이 법은 우리들로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자유하게 하는 법이 됩니다.
주일이 있는 것이 피곤한 사람들도 있지만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일을 지킬 규정을 십계명에서 주셨습니다. 만일에 주일이 없다면 우리들이 과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까? 주일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도 힘들고 이것도 불평하는 자들이 일주간을 하나님의 날로서 지키겠습니까?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은 짐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신과 인과 의를 버리면 무거운 것이 됩니다.

갈리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하여 바울을 중상모략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했습니다. 이는 그가 전한 복음이 진리가 아니라고 가르쳐서 참된 복음에서 떠나게 하려는 악한의도입니다.

우리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 성령께서 감동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합니다.
두가지 극단의 이단의 교훈을 조심해야합니다.
율법주의자,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종교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없습니다.
마귀는 이쪽으로 밀다가 안되면 저쪽으로 밀어버립니다. 어느 쪽이든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됩니다.

안식교가 이단이 된 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키지만, 이것도 주일을 지켜야 구원을 이룬다고 하면 우리들도 주일을 지키면서 이단이 됩니다.
주일은 지켜야합니다.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일도 예배도 봉사도 어떤 선한 행위도 필요치 않다는 반 율법주의자도 이단입니다. 구원파들이 이런 이단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육체의 방종의 기회로 삼습니다. 이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죄가 죄로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얼마나 신선하고 젊은 사람들, 기성교회에 적대감을 품도록 해서 미혹하는 교훈들입니다. 이들은 갈라디아서 5-6장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3-4장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5-6장에서 그리스도안에 자유를 얻은 자의 삶에 대하여도 가르치고 있음을 유의해야합니다. 성령을 좇아 살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울의 서신서가 대략 그러하듯이
전반부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데 대하여 교리를 설명합니다.그러나 후반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은 자의 삶을 어떠해야하는가를 말해줍니다. 성경대로 바른 교리와 성경대로의 바른 삶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양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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