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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 (갈 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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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구속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다가도 얼마든지 갈등과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교회가 진통을 겪는 갈등은 없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과 베드로의 갈등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일화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욕심으로 인한 갈등이 아닙니다. 복음의 이해와 실천을 두고 일어난 바울과 베드로의 갈등인데, 이 사건은 오히려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가 외식하는 잘못을 했지만,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건을 종결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오늘 이 갈라디아서에 기록하기까지 해서 또 모든 역사교회, 세계교회에 이 사건을 통해 더욱 밝혀진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내용과 그 결과의 영향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복음은 어떻게 지켜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너무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갈등의 배경은 베드로의 실수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상황에서 볼 때에는 베드로는 바울을 책망할 수 있는 위치이지만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 사도요, 대선배인 베드로의 실수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요, 사도 중에서도 대표격인 예수님의 수제자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은 앞으로 세워질 모든 세계교회, 역사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말씀에서는 17년간이나 선교사역을 하던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유대인 가운데 신실한 목회자인 바나바와 헬라인 가운데서 회심한 목회자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 교회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전한 복음에 대한 증거를 했고 그 복음이 바로 된 것인가를 사도들 앞에서 검증을 받았습니다. 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유대인의 사도로 자신과 바나바와 디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인하고 교제의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 때에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베드로도 바울의 전한 복음이 자신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교제의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이를 보면 베드로도 바울의 복음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 교훈을 무시한 것은 아닌데, 베드로가 안디옥에 내려갔을 때 그만 실수를 해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그의 실수는 잘못된 외식의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자기가 전한 복음의 확증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받은 것이라면, 이 사건은 베드로가 안디옥에 내려왔을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의 경험에서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몇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베드로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린 사건입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교 기독자들도 이방인들과 함께 하지 않은 척하며 밖으로 나갔고, 함께 있던 바나바 까지도 위선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이방에 까지 전하도록 명령하신 주님의 명령에 대한 도전이 되는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바울은 그들이 진리대로 바로 살지 않는 외식된 행위를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방인 처럼 살면서 이방인에게는 유대인답게 할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책망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바울보다 베드로는 대 선배요, 베드로에게 바울이 교제의 악수를 하고 자신의 복음에 대한 확증까지 받았던 지위에 있는 분에게 좀 과격한 행위같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이전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인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짐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면서 특별한 계시를 하셨습니다. 옵바의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보이신 환상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들이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인식을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에 왔을 때에 처음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기독자 몇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자리를 피한 베드로의 행위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이중적인 행위인데 바울에게 발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베드로 사도의 예수님 부활 이전의 성품과 행위를 잘 압니다. 그는 변덕이 많고 나서기 좋아하는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실수가 많았던 베드로입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에 세 번이나 에수님을 부인했던 사도입니다. 이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담대한 사람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오해하지 말아야합니다. 거듭나고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되었으면 다시는 실수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이 외식된 행위는 예수님을 배신할 때의 행위 만큼이나 비겁한 행위이고, 복음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행위였습니다. 이 베드로의 이중적인 행위를 보았던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피하고 이제까지 이방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나바 까지도 이 베드로의 행위에 감염이 되어서 율법주의의 위선에 빠진 것입니다.

바울의 책망은 엄했지만 순수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책망을 받았지만, 바울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런 책망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베드로가 여기에 대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배워야합니다. 우리들도 실수합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위선적인 행위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지면 우리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외식된 행위를 지적해준 바울에 대하여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왜? 복음에 대하여 막대한 지장을 줄 수 있는 위선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을 받을 때에 빨리 고쳐야합니다. 지적을 받을 때에 감사하며 고치면 오히려 더 큰 유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배워야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다는 것은 어쩌면 도리어 크게 자신이 책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장에서 밝혀 말씀한대로 천사가 전한 복음이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까지 했습니다. 이 복음이 무너지면, 이 복음에 내용이 잘못 이해되고 전달되면 지금까지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게 되며, 또 우리 구원이라는 것이 허무한 기초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면 내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했습니다.

우리들은 사소한 문제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이 사소합니까? 우리들에게 있는 것을 누가 빼앗든지 우리들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우리들의 인격이 짓밟히든지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든지 이런 일은 실은 크게 여기지만, 너무나 사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소중한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는 우리들의 믿는 바를 굳게하고 담대하게 증거를 해야합니다. 기독교계가 이단인 아리우스 파를 포용할 때에 전세계를 향하여 대항한 이다나시우스와 교황에게까지 감히 도전장을 내었던 루터에 대해 감사를 해야합니다. 조선교회가 다 신사참배를 옳다고 가결 할 때에 홀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던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감사해야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양보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진리만큼은 추호도 양보할 수없습니다. 지금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거짓되 자유주의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정하며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는 너무도 잘못된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과 영광을 훼손하는 많은 단체들도 있습니다. 이들과는 우리들이 싸워야합니다. 진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바울의 담대를 배워야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확증을 받으려 했던 복음, 베드로를 책망하면서까지 지키려했던 그가 전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울이 전한 이 복음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합니다.
이 본문의 복음 내용은 곧 기독교의 구원 의롭게 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기독교외의 모든 이종교는 다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신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가 수 없이 많지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행하라는 종교, 모든 이종교와 믿으라는 기독교만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하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믿으라는 종교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원한 죄 문제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음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고, 구원에 이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구원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사람이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 더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지만, 사람이 의롭대하심을 입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의롭게 되려면 오히려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이제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의롭다 하다가 우리가 만일에 죄 짓는 일이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범죄하게 하신 것이냐? 다시말하면 사죄의 은혜가 있으면 누구나 마음대로 이제 죄를 짓게 되지 않겠는가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도 말씀했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는 자로서 이제 우리들이 사는 것은 율법 아래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아래 있는 자로서 우리들의 사는 것은 19-21절의 말씀대로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젠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요, 믿음안에서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으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자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를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웁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아무 의나 공로가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되 은혜 아래서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바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은혜로 되는 것이되어야합니다. 행위로 되는 것이면 복음이 아닙니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는 삶을 삽니다. 그것을 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믿음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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