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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확증 (갈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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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위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합니다. 이 양심선언을 통하여 우리 나라는 상당한 부분에서 민주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문옥 감사관의 양심선언으로 감사원과 청와대의 구조적인 비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으로 군대에서 선거할 때에 이제는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지 않고 그야말로 국민의 기본 권리인 무기명 비밀투표가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양심선언이 공명심에서 이루어져서 양심선언을 한 그 사람이 구속되고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다가 그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나서 그것이 이렇게 잘못되었다고 폭로하게 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할 것입니다. 첫째의 반응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해 있는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가 배신자라고 하면서 그의 약점을 캐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동기가 불순하다고 말하거나 그가 말하는 것이 모순이 있다고 역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후자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그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바리새파에서는 가장 앞서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1:14에서는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유대교에서는 앞서가는 지도자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요즘 말로 말하면 뜨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동기생들 중에 가장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교의 대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뛰어난 제자였고 유대교에 속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나아가는 장래가 촉망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5∼6에서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5∼6절)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정말 그는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완벽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다 포기했습니다. 출세의 가도도 포기했습니다. 가족도 포기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일생을 그 모진 고난을 다 당하면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 어쩌면 세상적으로는 커다란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장이 찍힌 문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 졸업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육부가 인정하는 졸업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교단에서 인정하는 졸업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를 공격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게 됩니다. 바울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대주의자들과 바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쩌면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어떻든지 말할 처지가 못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교회적인 공식적인 어떤 인정이 없었던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장한 이유는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에게 화살이 돌려진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그 표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장에서도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의 탁월성을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2장에서 바울은 1∼5절에서는 자신의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말하면서 6∼10절에서는 자신이 받은 복음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11∼14절에서 오히려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님의 교훈대로 행치 않고 있음을 책망한 일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복음의 우월성을 말하고 나서 15∼21절에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말하던 대로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이방인들을 향하여 먼저 유대인이 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1∼2절을 중심으로 바울이 복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헛되지 않은 복음과 달음질(2:1∼2)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감을 갖고자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한평생을 생명을 걸고 한 일을 인정받는 것은 그 인생의 최대의 행복일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이렇게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생을 바쳐서 이 복음을 위하여 힘쓰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 교회들로 인하여 복음은 더욱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막연하게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합리적으로 이를 많은 사람들과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1) 확증 받은 바울의 복음(1)
바울은 먼저 14년 동안 자신이 선포한 복음이 참임을 증거하고 있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1절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향한 증오의 마음으로 대제사장으로부터 이들을 잡아오게 하는 체포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3년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의 받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에서 전도하다가 14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일을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은 세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그가 회심한지 삼 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18:행9:26), 두 번째는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갔었습니다(행11:29,30). 그리고 세 번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러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입니다(행15장).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견이 많지만 성경 전체를 보고 갈라디아서 문맥을 보아서 세 번째 방문이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전하는 복음이 참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헛되지 않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 교회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 복음에서 떠나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14년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복음이 헛된 것이라면 14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동안 단 한번도 예루살렘의 사도들 측으로부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 당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일부 거짓교사들이 하는 말은 잘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종교가 바울의 전하는 복음으로 인하여 위축되고 소멸되어 가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 기독교가 점차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있는데 유대교는 점차로 소멸되어 가는 느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나온 지극히 불순한 것이지 바울의 복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점차로 위축되어 가고 있음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데 믿는 이의 숫자가 이미 남자만 5,000명을 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바로 너희가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대 전지역이 복음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을 그들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조차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자신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이 하나님을 말했는데 이제 바울은 그 하나님을 바로 세계의 모든 사람의 하나님으로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왔습니다. 그야말로 이 복음이 온 세상을 덮을 기세로 사방으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가 이미 복음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빌립보를 시작으로 유럽으로 복음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는 제사장들과 회당장들이 예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7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8:8에서는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교를 지탱하고 있던 두 기둥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제사장과 회당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내에서 유대교의 기둥이었고, 회당장은 이방 지역에서의 유대교의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돌아왔고, 또 그토록 믿었던 회당장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위기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감으로 인하여 이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기독교를 인정하는 체하면서 결국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체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건전한 유대교도들이 자신들이 평생토록 신봉하던 것을 버리지 못해서 이렇게 주장한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14년 동안 자신이 전한 복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복음이 초지일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이론을 말하면 점차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깨달은 복음과 나중에 알게된 진리와 어떤 발전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처음에나 지금이나 동일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처음과 나중이 같은 것입니다. 초지일과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복음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와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14년 동안 자신이 전한 복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또 그 복음을 지금도 초지일관 전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실물로서 증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복음을 믿는 우리들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바울은 처음에 가졌던 열정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반평생을 예수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살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도 역시 이와같이 초지일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하나요, 복음의 진리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복음을 확증받기 위해서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갔었노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십시오.
1절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분명히 바울은 예루살렘에 갈 때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두 사람과 함께 갔습니까? 바나바는 유대인이요, 디도는 헬라인이었습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바'로 불렀습니다(행4:36). 바나바는 초대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에 정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에게 헌금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11:24)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헌신으로 인하여 그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포함한 가난한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들어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와같이 전재산을 하나님께 드린 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어 안디옥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행11:22) 그리고 이 안디옥에서 바울을 만나서 세계선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면서 최초로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바나바는 조력자요, 바울이 사도로서 위치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바나바도 별로 개의치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갈라디아 교회가 알지 못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즉 바나바와 함께 간 이유는 원래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고 이제는 바울의 조력자로서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바울의 사도권의 우위를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바울이 증거 하는 복음의 확실성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디도를 데리고 갔는데 디도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도를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로 그냥 데리고 다녔습니다. 따라서 그는 거룩한 회의에 감히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디도를 이 회의에 데리고 갔습니다. 사실 당시에 할례를 주장하던 무리들이 남아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디도를 데리고 감으로 감히 예루살렘에 도전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가 어떤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이방인에게 이 복음이 전파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의가 집중되던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도 성령이 동일하게 임함을 보게 되었습니다(행10:45). 분명히 베드로가 이방인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두고도 사도들은 계속하여 망설였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 바울이 사역하는 지역에서는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동일하게 전파되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실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는 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면 디도로 인하여 사도들은 심하게 분쟁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디도의 무할례에 대하여 단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울의 복음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자신이 붙들고 있던 평생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복음을 자신의 문화에 흡수해 버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 끈을 붙들수록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지는 힘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교회에 가장 큰 문제는 무속의 요소들이라고 봅니다. 모든 예배에서 무속의 요소를 쫓아 내지 않으면 기독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누구든지 그 근본은 무교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면 우리도 복음을 버리고 자꾸만 무속적인 기독교를 추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교회로 자꾸만 돌아가야 합니다.

무속적인 요소를 교회의 순수성을 얼마나 많이 해치고 참 복음을 왜곡시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복음으로 돌아가는 정신을 항상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복음으로 날마나 확증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정말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바울이 복음을 제출한 목적(2)
바울이 14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복음을 확증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동기는 '계시를 인하여'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의가 열리기 전에 먼저 당시에 '유명한 자들'이라고 유대주의자들이 인정한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가 여기에서 복음을 제출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먼저는 주께 받은 계시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계시를 인하여'(카타 아포칼립신)라는 말씀은 단순히 바울에게 어떤 환상이 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바울이 전하고 있던 복음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행한 이방인 선교가 인간적인 동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인하여 행한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종교회의가 공식적으로 열리기 전에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복음을 제출'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자들'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교회가 인정하던 사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의 유명한 자들이란 9절에서 보면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공식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 사도들에게 사석에서 먼저 복음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복음에서 차이점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에서 이 난제를 다루기보다는 먼저 사석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조율을 함으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미 자신이 하는 모든 사역이 아무리 확신이 있었어도 바울은 참으로 일을 아름답게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행하는 일이 때로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밀어 부쳐서 결국에는 문제를 야기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질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사로이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전체의 조화 속에서 복음을 확증 받고자 한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처리할 때에 기도하면서 가장 은혜롭게 해결할 방안을 찾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옳을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사역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할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공인하지 않아서 기독교 내에서 분열이 일어남으로써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바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복음에 헌신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에 헌신했는데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도들과 만일 다르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그가 일생을 바쳐서 행한 이 복음의 사역이 단지 헛될 뿐만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행한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다면 아마도 허탈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죄를 범하고 자신의 사역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막았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할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행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복음을 예루살렘의 교회들도 동의함으로써 교회적인 확고한 확증을 얻어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전하는 사람마다 다르고 서로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결국은 양쪽이 다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은혜에 율법을 더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교회 질서를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바울이 14년 간이나 이방에서 복음을 전했던 모든 것이 헛되지 않게 하고 앞으로 자신이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이라면 교회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바울의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자신의 종교를 만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바울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다면 그의 사역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이 지금까지도 든든하게 서있는 것을 보아서 바울의 복음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바울을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그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리, 십자가의 도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4년 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 편지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을 보아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는 그들을 바울은 너무나도 이상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도 역시 내가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믿는 진리는 과연 성경적인가를 늘 물으면서 날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관행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중요하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교회는 교회의 관행과 법을 중요시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버리신 교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역시 성경과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믿고 있는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내어놓아도 아무런 하자가 없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마다 믿음의 주님이 다르다면 이는 잘못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믿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함을 얻었다면 우리의 신앙도 같아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었는데 그것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보다 억울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을 완전히 허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복음의 진리를 계속하여 성경을 통하여 확인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참 복음을 늘 확인하고 신앙생활을 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결과를 평가받으시기 바랍니다.

훗날에 우리의 믿음의 결과를 예수님 앞에서 평가를 받겠지만 우리의 믿음은 역사 앞에서도 평가를 받게 됩니다. 과연 그 사람의 믿음이 바른 믿음이었는가? 그의 사역은 정당했는가? 하는 후대들의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평가에서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과 봉사가 초지일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성경적인 믿음의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헛되지 않은 믿음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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