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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인 복음 (갈 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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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그가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었고, 그의 전한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듣거나 배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특별한 사도라거나 자신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다르거나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명과 이방인에게 전할 복음 메시지의 확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 사역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또 사명의식, 즉 복음 증거의 확신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직통 계시로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전장에 나간 나라의 대장이 왕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그 명령을 감당하려는 사명감이 없이 목숨을 내 놓고 싸우겠습니까? 오늘 공직자들의 타락은 소명과 사명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자들이 사명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이 있을 때입니다. 또한 받은 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때에 이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과 복음을 계시로 받은 것을 강하게 주장함으로 바울의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과 다르다는 의심과 아니면 바울이 다른 당을 만드려는가 하는 분파주의로 몰릴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바울의 전하는 복음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과연 사도냐, 또 바울의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과 다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갈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갈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자신의 복음의 교회 검증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행위가 오늘 복음으로 구원 얻은 이방인들인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전하는 복음이 독립적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가 14년동안 예루살렘을 단 한번 방문한 것과 단지 15일 밖에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음이 그들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가 적당한 시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 그의 복음은 그들의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과 그들에 의해 승인을 받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나바요, 또 한사람은 디도였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도 잘 아는 유대인입니다. 바나바를 데리고 간 것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디도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함께 있지도 못합니다. 이 사람 디도는 바울의 이방전도의 열매였는데, 당시 이방전도에 대한 논쟁 중이었기 때문에, 유대주의들에게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고 무엇인가 인간의 노력이나 종교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디도를 내 세운 것입니다.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하여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지 많은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믿지 않고,할례와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의 복음과 율법주의는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이 율법주의 교회가 많습니다. 신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율법주의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들은 그럴듯하게 보이나 큰 이단입니다. 그 때도 이들의 미혹으로 교회가 혼란에 빠졌는데 지금도 앞으로도 이 미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에 우리가 구원얻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고, 인생으로 아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천주교나 기독교나 비슷하지 않는가, 이 율법주의 이단들도 성경을 믿고 말하지 않는가, 여기에 화합하여 하나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은혜로 구원 얻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고 인생으로서는 행위로 온전함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잘못된 교훈을 다시 알고 대적해야합니다. 무엇이 잘못된 교훈입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나 인간의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율법주의 사상입니다.

둘째는, 율법주의로 복음을 혼미케하던 이 마귀가 이제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인간의 행위가 첨가되어야한다는 지금의 천주교 같은 교리가 그 때에 유태교를 믿다가 그리스도교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반율법주의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되었지 율법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교회생활에 지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 같이 들리겠지만, 이는 잘못된 이단입니다.

이 미혹에서 벗어나지 않아야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합니다.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아주 의미 있는 행위였습니다. 많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디도는 결정타를 가한 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디도가 믿었고 구원 얻었음을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도를 데리고 가면서 할례를 행하게 않았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모습을 입은 것입니다. 디도를 할례를 행하지 않고 에루살렘의 유대주의자 앞에 서게 한 것은 도전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실은 복음 증거를 위함입니다. 이는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한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앞에 기쁘게 받아들여져야하는 것입니다.

행15:1 에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던 유대주의자들 앞에 선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구원을 얻은 디도에게 구원을 얻는데에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이 구원을 얻는 것에는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자유를 빼앗으려고 가만히 들어왔지만 저들에게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함이라 했습니다.

갈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갈 2: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이 바울의 행위는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인데 얼마나 중요한 행위였는지 모릅니다. 만일 바울이 이렇게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이 이방인 할례의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오늘도 우리들도 이 복음이 무엇인가 확실히 알 수 없어 지금 까지도 할례를 행하므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 아래에 종노릇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유대주의자와 싸운 것으로 우리들에게 복음 가운데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이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는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끝까지 싸워야하고, 진리를 보수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2절에 '이방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이유는 그가 지난 17년간 이방인에게 전한 이 복음에 대하여 사도들에게 검증을 받고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검증, 교리적으로 검증이 중요함
바울은 사도들간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올라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에게 무엇을 배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서 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지금까지 전한 복음을 사도들에게 사사로이 제출한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혹 생각하기를 사도들의 교훈들이 각각 다르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복음', '베드로의 복음' 또는 '요한의 복음''야고보의 복음'으로 말도하고 아주 다른 복음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바울의 서신이라는 이유로, 예수교는 사도바울이 만들었다고 말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야고보와 바울의 서신서가 다른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이나 야고보가 전한 복음이나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다른 사도들이 아무도 이의 달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이 이방에게 전도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대로 어떻게 유대주의자들이 은혜의 복음에 대하여 방해하고 있는지도 말했을 것인데, 다른 사도들은 유대주의 자들에게 대하여 사도바울만큼 단호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비판적인 것도 같았습니다. 만일에 다른 사도들이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든지, 사도바울의 전한 복음을 불신하거나 사도바울과는 달리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고, 오늘 우리들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전도의 열매로 보이기 위해서 데리고 간 디도가 할례를 행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하나 입을 대지 않고 환영했습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이 일을 했다고 2절 끝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건의 기록에서 어떤 증거를 받습니까?바울들도 사도됨을 믿어야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면 그가 증거한 복음은 거짓된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되었고,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받았다고 담대히 말한 사도 바울의 증거가 참된 것임은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바울의 복음에 대하여 확정을 지어줬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방식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지역으로 부름을 받았고,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증거되었고, 결과적으로 복음의 다른 국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복음은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게 대하여 썼고, 야고보는 율법 폐기론자들에게 대하여 쓴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서로를 보완한 것입니다.

단지 한가지 복음, 사도적인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해 가르쳐진 교리의 중심 부분만이 있으며 이들은 우리들을 위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전 15;11에서도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했습니다.

불교의 경전이 많다는 것은 제 마음대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자랑하지만 제 각각 도를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들에게 주신 성경은 분명히 기록자가 다릅니다. 1500년 걸쳐서 40명이 넘는 기록자들입니다. 이들의 지식이나 신분이나 문화수준이나 다 다를 것입니다. 만일에 세상의 책들이 이렇게 기록되었다면 잡동사니 모음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록자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붙들고 기록하게 하시기 때문에 도 기록하시면서 그 인간의 어떠함을 무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러 부분, 여러모양으로 나타나지만 성경은 단일합니다. 어떤 성경도 전체 성경에 배치되지 않습니다. 전체 성경은 한 구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바울신학이라 바울의 깨달음이라 말은 하지만 실은 바울은 이것이 계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복음은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확실한 복음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다른 방법이 없음을 바울이 말했고, 이는 모든 사도들과 일치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디도를 할례를 행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방인들이라도 은혜로 구원 얻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복음 진리를 보수하는 일에 힘을 써야합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대항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은 혈기로 싸우는 세상 전쟁이 아닙니다. 마귀와 싸우는 싸움인데, 이는 복음을 훼손하려는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약한 양심을 가진 자들에게는 관용하고 부드러웠습니다.그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서 유대인들을 만나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디도를 할례를 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으의 진리가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어떤 정책적인 것들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리의 문제에 있어서 복음 진리가 위태로워지는 때는 그는 견고했습니다. 이 부드러움과 강함의 조화는 루터에 의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익, 우리의 명성, 우리의 생활,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고통을 당할지라도 복음, 우리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로부터 빼앗기는 고통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의 결단이 되게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복음진리에 대하여는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저를 어떻게 평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어떤 일을 한다고 하는 기관에 대하여 제가 하지말자는 말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까다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주 비판적이고 소극적으로 대하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도전되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입니다. 교회에 도전하거나 복음을 훼손하는 어떤 일에는 분노를 해야합니다. 비판없는 용서와 관용이 기독교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대한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해야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양보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사항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합니다.

복음과 율법주의는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되자는 운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은 힘써 지켜야 하지만 복음을 양보하고 하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이나 교회 안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갑갑하다하겠지만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이제까지 사람을 기쁘게 하였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분별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나타나는 어떤 것을 증거로 삼는 때입니다. 이것이 힘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고 바라보는 것은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소망은 믿음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약속을 보고 믿는 자만이 끝까지 신앙을 유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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