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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에 관한 지혜 (고전 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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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의 책을 보면서 그는 복음의 멧세지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는 한때 복음을 순수하게 믿고 받아들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복음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복음을 정치적인 관점과도 결부시키려 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책은 복음과 전혀 무관한 혼합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에서 사역했던 바울의 자세를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오직 복음만을 전파하였습니다.
고린도에 일어났던 일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다 철학(인간의 지혜)를 혼합시켰습니다. 그결과 혼란과 분열이 초래되었습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수많은 ‘방법’들을 갖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어휘들로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세 가지 근본적인 요소를 설명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 기본적인 것으로 되돌아올 것을 권고합니다.

1.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2:1-5)
바울은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역에 관해 세 가지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첫째로,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방식을 상기시켰다(2:1-2)
“내가”(And I)라는 바울의 첫 마디는 “주(主)안에서 자랑하라”는 1장 31절의 말과 연결하여, “따라서 내가”(Accordiingly I)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간 것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추종하는 종교적 광신자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 고린도로 갔던 것입니다.
당시의 순회 교사들과 철학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며 유창한 말로 추종자들을 확보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린도 시는 선동적인 역설가들로 득실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창한 웅변술이나 재치있는 언변(言辯)으로 복음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파는 외판원’이 아니라 &65378;그리스도의 대사&65379;(大使)였습니다.
바울이 유창한 언변이나 철학적 지혜를 의지하였다면 그 자신이 추앙을 받고 자신이 전하러 온 그리스도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1:7)

둘째로,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자세를 상기시켰다(2:3-4)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천한 종의 신분으로 고린도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있도록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자신과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거짓 교사들의 자세를 대조합니다(고후10:1-12). 바울은 자신이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강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사역을 능력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이나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65378;나타내는 것&65379;(demonstration)이었지 ‘연기하는 것’(performance)이 아니었습니다. &985172;나타냄&985173;(4절)이라고 번역된 말은 “법정에서 제시된 법적 증거”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설교를 이용하셔서 듣는 자들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변화시키는 능력이 바로 바울의 멧세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데 대한 증거의 전부였습니다. 사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셋째로,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목표를 상기시켰다(2:5)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역자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믿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지혜를 의존하고 구원의 섭리를 철학적으로 제시했다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인간과&985172;인간의 설명&985173;을 의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였기에, 고린도의 회심자들은 “성령의 나타남”에 신뢰를 두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케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 사역의 효과는 우리들의 논쟁이나 설득력있는 화술(話術)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으지하여, 우리가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이뤄질 때 복음 사역의 효과는 증대됩니다.

2.복음은 성부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이다(2:6-9)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지만, 이 일은 성부께서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복음이 단순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합니다.
복음의 멧세지는 하나님에 의해 무지한 이방인들도 이해하고, 믿고, 구원받기에 충분한 만큼 간단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극히 심오하여 아무리 명석한 신학자라고 해도 그 심오한 깊이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복음에는 피조물 중 가장 예리한 지성(知性)을 가진 인간에게 도전을 주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죄인들의 무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장성한 신자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일에 자라가는 성숙한 성도들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6절에 언급된 “온전한”이란 말은 “장성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3:1-4참조) 아마 바울은 여기서 교회 내에서 아볼로를 높이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아볼로는 웅변가에다 학식이 많은 설교자였습니다(행18:24-28)
이제 하나님의 지혜의 특성 여섯 가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첫째,이 지혜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지혜입니다(2:7)
이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과 피조계를 위한 그분의 광대하고도 영원한 계획을 장성한 성도들에게 알려 줍니다. “이 세대의 관원”중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이 경이로운 지혜는 만들어 낼 수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둘째,이 지혜는 감취었던 것입니다(2:7)
하나님의 지혜가 &65378;비밀&65379; (신약성경에서 비밀은 ‘거룩한 비밀’을 뜻합니다.)로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에는 감취어져 왔으나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진 진리가 되었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에 관련된 다양한 ‘비밀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해 주시기 위해 쓰신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엡3:참조)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되풀이해서 언급하는 대명사 “우리‘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우리“속에는 다른 사도들도 포함되엉 있습니다. 즉, 바울 이외의 다른 사도들도 복음에 대한 비밀을 계시받을 것입니다.

셋째,이 지혜는 하나님의 경영을 담고 있다(2:7)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으며 그 계획을 실행하시고 그 계획의 성취를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속(救贖)의 위대한 계획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급히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석연치 않게 생각될지라도 우리는 거룩한 선택과 예정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었습니다(행2:22-23/벧전1:18-20) 그러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습니다. 성공적인 기도 생활의 한 비결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데 있습니다(행4:23-320

예로써 룻과 보아스 보아스가 이삭 줍기를 허락했으니까(구원작정 은혜) 주으면 먹게 됨

넷째, 이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2:7)
“만세 전에 정하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은 에배소서 1장에 나타납니다. 엡1장은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세 번이나 언급합니다. (엡1:6, 12, 14)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바로 그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소식인가(요17:22-24 /롬8:28-30참조)

다섯째,이 지혜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는 감춰져 있다(2:8)
바울이 언급한 “이 세대의 관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다스리는 층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행3:17/4:25-28)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
라고 기도 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주실 수 있는 증거를 모두 다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갈보리 사건을 하나님의 대패(大敗)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였으며 사단의 대패였습니다.(골2:15).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사단은 그분을 죽이려고 애셨습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낳을 엄청난 결과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것을 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 계획을 주도하시는 분은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여섯째, 이 지혜는 오늘날의 신자들의 삶에도 적용됩니다(2:9)
이 구절은 흔히 천국에서 있을 일로 간주되어 장례식 때 사용되지만, 본질적으로는 신자의 현재적 삶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다음 구절(10절0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오늘 이 땅의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계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구절(9절)은 이사야서 64장 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64장 4절 말씀은
(사64: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포로로 잡혀가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죄를 범했고, 그에 대한 징계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스랑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었고,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지 70년 후 이스라엘의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따라서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렘29:11)

바울은 이 말씀의 원리를 교회에 적용시킵니다.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떻든지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를 보장받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세우신 계획들은 너무도 경이로운 것이어서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감히 생각해 낼 수조차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그 계획들을 작정하셨습니다(7절). 땅에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내내 영광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매일매일이 다 선한(Good) 날들입니다(롬8:28). 모든 일들이 잘 도어나가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펼쳐나가시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삶이 암울하고 우울한 색조를 띤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순종하지 못할 때, 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어질 때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늘 그분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의 두 가지 기본 진리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둘째.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광대하고도 영원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치르어진 십자가의 희생을 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눈을 떼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애 같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크심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 경이감(驚異感)을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사역으로 되돌아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세번째로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3.복음은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계시하십니다(2:10-16)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는 성삼위 하나님 모두가 개입하십니다(벧전1:2/ 엡1:3-14). 성부의 택정하시는 은혜, 성자의 사랑의 희생, 그리고 진리를 자각케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등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으면 구원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인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엡1:3)이신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이처럼 삼위일체적 국면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면 구원의 신비를 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대해 혼란을 느끼거나 또 자신이 혹시 택정받지 못하고 예정되지 못했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창세 전에 그분께서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택정하셨을 때 구원받았습니다(엡1:4). 그러나 내가 구원받던 그날 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랍고도 영원한 계획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을 때 구원받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나 아직은 세상 모두가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령의 사역이 개입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복음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자라가다 내가 구워받았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런데 바울은 이 성령의 사역을 네 가지를 설명합니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내주하십니다(2:1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몸을 자신의 성전으로 삼으십니다(6:19-20)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 만드십니다(12:13).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印)치시고(엡1:13-14)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요14:6). 성령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십니다(고후3:17).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요17:14,16) 이제 세상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권세와 그의 세상적 궤계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습니다(롬8:15). 성령께서는 사랑으로 역사하사 하나님으로 실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디모데후서1장 7절 말씀을 보자,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영적 부요입니까?

둘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통달하십니다.(2:10-11)
당신의 자신의 성품 속에서 무슨 생각이 진행되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 속에 있는 인간적 지각력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의 영 안으로 들어가 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써 우리 각자의 인격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개개의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共有)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10절)이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9절)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혜의 모든 축복들을 지금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셋째로, 셩령께서는 가르치십니다.(2:13)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며(요14:26).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라고(요16:13)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일의 연쇄적인 결과를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바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역시 말씀으로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영적 진리들은 구체적인 말씀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영감된 생각보다 휠씬 많은 영감된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어떤 목사의 가정에 자녀들이 네 명이 있는데 모두 다른 직업을 가졌답니다. 목사, 간호사, 전자공학자, 회계사 등 이들은 모두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자들인데 네 명의 자녀 중에서 그분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녀는 목사인 아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세상의 용어보다 하나님의 용어에 더욱 익숙해져야 합니다.

성공적인 믿음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언어를 배우고 그것을 활용합니다. 그들은 칭의, 성화, 양자삼으심, 화목, 선택, 영감(靈感)등의 용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기술 공학을 배우는 학생은, 화학, 물리학 및 전자공학의 전문용어들을 잘 이해합니다. 하물며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깨닫는 것을 어려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신자들을 가르치시는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합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 진리를 무언가 새로운 것에 연관시켜서 우리를 새로운 진리로 인도하시며 낡은 진리를 새로이 적용하게 하십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앉아 성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시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넷째로. 성령께서는 신자를 성숙케 하십니다(2:14-16)
본문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신령한 자(spiritual man)”라고도 불리운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지 않기 때문에, “육에 속한 사람(naturl man)>을 설명합니다.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먹지 못하고 또 성장하지 못해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한때는 모두 육에 속한 사람, 육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는 “신령한” 차원으로 옮겨져서 성령의 영역 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성장해야 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도 못하며 더욱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받음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영적으로 장성했음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표는 분별력, 즉 삶의 이면을 통찰하고 그 실제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능력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보는 것으로” 행하나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적 장님입니다.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분별력이 점점 자라(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점점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을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전혀 오류가 없이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역활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다는 것은 인생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예수께서 바라셨던 것을 나도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상이(相異)한 두 세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15절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신자들의 삶에서 결점을 지적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성도의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완전히 통찰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에만 너무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성령님의 기본적인 사역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또 성령만을 강조하다 보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행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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