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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의 자유에 대하여 (고전 09: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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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물질적 보조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절제합니다.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포기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바울이 그와 같은 말을 편지에 썼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권고하는 성도의 삶의 원리에 대해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유할 수는 없는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를 설명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우선 순위, 즉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의 순서에 대해 논합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개의 신자들이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선교 자금이나 선교 인력이 모자랄 리 없으며 주님의 사역은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다 그 말씀을 실천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미국의 한 부인이 선교 헌금을 바치면서, 그 돈은 집안에 있는 온수 탱크를 잠가서 절약한 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주님의 일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바치기 위해 신문도 구독하지 않았고, 목욕을 할 때에는 난로에 물을 데워서 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렸을 때는 그렇게 물을 데워서 목욕을 하곤 했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희생하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부인의 태도는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재정 보조를 거부한 이유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복음을 위해서입니다(9:15-18)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12절). 바울 당시 헬라의 여러 도시에는 순회 교사와 설교자들로 넘쳤고, 그들의 대 부분은 돈벌이에 전전긍긍하여 미사여구로 말을 꾸미고 유창한 웅변술과 수사학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방법을 거부했고(2:1-5참조), 또한 자신의 사역의 대가로 받게 되는 돈도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잃어버린 죄인들의 마음에 어떤 장애나 방해물을 전혀 만들지 않고 복음의 메시지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바울은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9:15) 라고 덧붙임으로써,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의도를 잘못 이해해서 바울이 그들로부터 재정적 보조를 바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없앴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도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전도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거룩한 청지기 임무(“직분”)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받을 상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울에게 보여주셨을 것입니다(“상”이라는 말이 눅10:7에서는 “삯”으로 번역했다)

그러다면 바울의 상급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값없이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바울의 사역 방법이 정당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돈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복음 사역이 방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말씀 선포자나 복음 전도자들을 대개 순진한 사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자들로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란 미명 아래 돈을 갈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딤전6:13-16). 그런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조종합니다. 우리는 분명 그러한 사람들의 목적에 동조하지도 않고 그들의 행습(行習)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도 우리가 그들과 한패거리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탐내는 그릇된 태도는 초대 교회의 복음 사역을 방해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진리보다 돈을 더 탐내다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신 것입니다(행5장) 마술사 시몬(simon)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었습니다(행8:18-24). 그 결과 그의 이름은 &65378;성직매매&65379;란 뜻을 지닌 용어 simony의 기원으로 사전에 수록되게 되었습니다.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서 18년 동안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헌금에 관해 설교를 할 때 꼭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인색한 마음이 없이 후하게 헌금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헌금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라고 설교하면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실족하거나 복음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려면 신자는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교회에 다녀도 신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면 헌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죄인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9:19-23)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자유 하였기 때문에 바울도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됐다”(22절)라는 바울의 말이 잘못 남용되어서 원래 의도했던 의미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은 상황에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와 사역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변덕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청중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 메시지의 내용을 조정하는 타협가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권모술수를 일삼는 정객(政客)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사(大使)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위해 큰 짐을 지고 있었던 유대인이었습니다(롬9:1-3/10:1). 그러나 그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엡3:8). 바울은 새로운 도시(그는 늘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곳으로 갔다/롬15:20). 에 갈 때면 항상 회당을 먼저 찾아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으면 발길을 돌려 이방인들에게 향했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짓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율법과 언약이었습니다(엡2:11-15).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그 어느 편에도 거슬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소유한 자유를 유대인 앞에서 자랑하지도 않았고,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관성 없는 자세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융통성 있는 접근 방식으로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설교를 읽어보면 그가 매사에 얼마나 지혜롭게 적응해 나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되는 진부한 설교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같은 귀족 출신의 유대인에게는 영적으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고(요3:),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에게는 생수(生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요4장). 예수님의 전도 방식에는 융통성이 있었고 탄력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방법을 따랐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융통 적이지 못한&65378;복음전도 공식&65379;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다 는 대로 고기를 먹을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바울은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존중했습니다(롬7:12).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을 얻기 이해서 율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율법에 얽매인 연약한 성도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그들이 성장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은 타협이라기 보다 고귀한 사랑의 법에 자신을 내맡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구주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셋째,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9:24-27)
바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운동 경기에 빗대어 말하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편지에서 그런 비교법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당시 고린도인들은 헬라인들의 올림픽 경기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지협경기(Isthmian Game)< 당시 고린도에 격년제로 개최된 올림픽 경기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4대 경기 중 하나>를 개최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그들에게 매우 친숙한 은유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고 상을 받기 위해서 선수는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는 최고로 좋은 것을 위해서, 좋은 것과 보다 좋은 것들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수는 시간뿐 아니라 음식도 절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권하거나 밤늦게 열리는 파티에 초대할 때는 웃으면서 사양해야 합니다. 음식과 오락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절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해를 끼치고 장애물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다다르기 위해서 운동 선수처럼 달음박질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경주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헬라인들만 올림픽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연습할 때나 실제 경기를 할 때나 항상 규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연습 중이라도 규칙 위반이 발견되면 자동적으로 선수 자격이 상실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바울은 스스로 절제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 전체의 강조점입니다. 즉, 권위(또는 권리)는 절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기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버리다”(27절)라는 단어는 헬라인들이 벌이는 경기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익숙한 전문 용어입니다. 이 말은 “인정받지 못하다”(disapproved), “자격이 없다”(disqualified)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 헬라인들의 경기에는 한 명의 선포자가 나와 경기의 규칙과 선수들의 이름 및 승자의 이름과 출신 지역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규칙을 어겨서 자격을 상실한 선수의 이름도 공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선포자”(a herald)와 “경기자”(a runner)로 인식했습니다. 바울은 경주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 바빠서 자신을 소홀히 하고 자격을 잃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자격이 없는 자가 되는 것) 이미 받은 구원을 상실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선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은 그의 시민권까지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승리해서 상 받을 기회를 상실하는 것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상(賞)이고 바울은 그 상을 잃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들의 경기에서는 오직 한 명의 선수만이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영원히 썩지 않는 면류관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면류관은 주님을 섬기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들은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몸을 절제하고 그 목표만을 응시하는 자들입니다.

최근 들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 절제의 중요성과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 것과 성령 충만한 생활의 관계의 중요성도 재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태도는 피해야 합니다 종교적 금욕주의는 불건전한 것이며 영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골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2: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그러나 먹고 쓰고 즐기는 일을 절제하고 성령 중심의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점잖게 자랑합니다. 그런데 과식해서 비만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또한 시간을 절제하지 못하여 개인 경건 시간이나 계획된 성경 공부 시간을 지속성 있게 갖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바울은 생애 전반에 걸쳐 하나의 큰 목표를 추구하였습니다. 바울의 그 목표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다른 성도들을 세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바울은 어떠한 희생이라는 기꺼이 치르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 바울은 기꺼이 자신의 개인적 권리까지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영원한 상급을 위해서 썩어 없어질 것들을 희생했으며, 영원한 기쁨을 위해서 순간적인 즐거움을 포기했습니다.

순교자 짐 엘리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여러분들도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도 포기하는 지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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