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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은 왜 있는가? (고전 15: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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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부활은 장차 일어날 사건으로서 우리 개인의 삶에 긴밀한 함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래를 생각할 필요없이 우리 좋은 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가 죽는다 해도 그 분이 오실 때 우리는 부활해서 영광된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사실과 관련이 있는 성도의 삶의 네 가지 영역을 설명합니다.

1.복음전도(15:29)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이 성도가 죽은 친척을 위해 &985172;대시 받는 세례&985173;를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에 대한 그러한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주후 2세기 경에는 &65378;대행 세례&65379;를 주장하는 몇몇 이단 그룹들이 있었으나, 일반 교회는 그런 관행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은 각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또 구원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마 ‘죽은 자들 편에 서서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복음 전도에 열심을 내며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애쓰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해놓고 결국 죽은 자들 편에 서게 한다면(죽은 자들과 한통속이 되게 한다면) 굳이 세례를 받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저 죽음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그 길에서 벗어나 나오라!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에 따라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지옥에 들어간다(요5:28,29), 우리는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 울지만, 아직까지 구원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애통해 해야 합니다. 부활의 사실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드는 동기입니다.

2. 고난(15:30-32)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말은 로마서 6장에서처럼 “자아에 대헤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당명한 육체적 위험을 의미합니다(고후4:8-5 /11:23-28)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대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헙을 받았으며 죽을 뻔한 위기를 수없이 많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왜 쓸데없이 그러한 고난과 위험을 견디어 내겠습니까? “내일 죽으리리 먹고 마시자”(사22:13)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고후5:10).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주관하십니다. 육체도 구원받습니다(롬8:18-23)

육체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부활의 때에 영광을 받게 됩니다(고후4:7-18). 우리들의 육체에 기대할 만한 미래가 없다면, 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으며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3. 죄로부터의 분리(15:33-34)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하는 일은 장차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부도덕함은 고린도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은 헬라의 시인 메난(Menander)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 말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의 몸은 하나님의 전(殿)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와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고후6:14-7:1).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엡5:6-17)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일일 뿐입니다.

그때는 고린도의 성도들이 깨어 근신할 때였습니다(살전5:4-11) 죄와 타협하는 신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위의 죄인들에게 그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때에 성도가 죄 가운데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4. 사망(15:50-58)
천국은 혈과 육이 있는 우리의 현재의 몸을 위햇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그때, 살아있는 몸은 순식간에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요일3:1-3). 그리고 죽었던 신자들은 새롭게 영광을 입은 몸으로 부활될 것입니다. 부활한 우리의 몸은 노쇠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의 터를 닦은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종국(終局)에는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가 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망 안에서, 그리고 사망에 대해서 승리합니다. 왜인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죄 사망, 율법은 병행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셨고(벧전2:24) 또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갈3:13). 우리의 이 승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는 지금 이 승리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57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계속 이김을 주시느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 우리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빌3:10)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58절은 주님께 대한 바울의 찬양이며 교회를 향한 바울의 결론적 교훈이기도 합니다. 사망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결코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봉사하는 일에 흔들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더욱 힘써 일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말을 78차례나 했는데, 58절은 솔롬의 그 슬픔 외침에 대한 답변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1)고 솔로몬은 말하지만, 바울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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