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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교훈 따라서 (딤전 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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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디모데전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서는 소위 목회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바 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소아시아 일대에 중대한 복음적인 충격을 던졌습니다. 에베소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고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떠나면서 앞으로 자기가 떠나면 그가 복음의 씨를 뿌리고 양육했던 이 교회가 신앙적인 면에서나 사상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될는지 모르겠다는 예 견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바울의 그 예견이 적중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떠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에베소 교회에 대한 부탁을 하면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교회의 지도자의 책임은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의 양무리를 잘 양육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자기들로 끌어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 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 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떠난 다음 에베소 교회에 중대한 신앙적인 시련이 닥치리라는 예견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예견 그대로 바울이 떠난 후 에베 소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흔들게 만드는 이단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든든히 서 있는 성도들도 있었지만 일부 성도들 가운데는 신앙적인 시험에 빠져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고 더러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믿음의 제자요. 아들이 라고 불리는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적인 안정을 위해 돕도 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전서를 쓰게 한 중요한 배경입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기록한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지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첫번째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 쓴 것으로 주후 63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 에베소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에베소 교회를 위협했던 그릇된 신앙의 조류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입니다. 율법주의란 유대인들에게서 파생된 것으로 복음을 역행하고 있는 그릇된 사상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온전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 다. 가령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가죽옷을 해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 지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 서 그 때부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짐승 의 피를 흘렸는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의 집에서는 장자가 죽는 일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집 가정에는 이 화를 면하게 된 것도 미리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가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넘어가고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님의 피의 그림자였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데 유대인들 가운데는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라는 것은 소위 그노시스주의(Gnostecirm)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당시 강력한 헬라 사상의 발산지인 헬라를 중심으로 신앙의 형태를 띠고 등장했던 특별한 이단 사상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데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원론적 인 종교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성스러운 비밀인 지식이야 말로 인간의 기원자이고 운명이며 그것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초월적이고 알 수 없는 하나님과 소위 데미우르고스 로 표현되는 창조주 하나님을 구별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은 종종 생명의 불꽃 으로 표현되었고 그 지식이 인간 속에 주입되므로 구 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과 인간이 사는 물질의 세계 사이에는 상하 창조와 피조 관계로 불려지는 소 위 아이온 (aeons)의 서열이 있는데 데미우르고스는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에게서 나온 고위 아이온 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이같이 데미우르고스로 해석하므로 절대자 하나님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도 말하자면 이 지식을 전달하러 온 절대자 하나님의 특사라고 했습니다. 신적인 존재인 그리스도는 잠시 사람의 몸을 빌어 거했을 뿐 본질적으로 사람이 아니셨고 따라 서 죽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 처형 전에 이미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영지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도케티스트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이단 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독자적으로 혹은 연합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순결한 복음적인 신앙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등장해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에 보면 그들은 특별히 신화와 끝없는 족보라는 잘못된 수단을 통해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신화 란 말은 단순히 이야기들이라고 번역해도 되고 신기하게 조작된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특별히 그 당시 영지주의 자들은 성경이 아닌데도 그들 사이에서 은밀히 나누어진 조각 된 어떤 이야기들을 신령한 지식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임에서는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도저히 주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신앙이 뛰어난 것처럼 영적인 우월감을 과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이런 소위 영 적인 이야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미혹했던 또 하나의 수단은 끝없는 족보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유대인을 배경으로 해서 이러한 족보 사상이 만연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 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들이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더 중요한 관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런 사람들에게서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교훈을 경계하라는 것과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오늘 주 신 말씀에서 그릇된 교훈을 어떻게 경계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릇된 교훈을 분별할 수 잇는 세 가지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것이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러 변론을 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살찌게 하는 올바르고 건강한 교리는 언제나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 떤 교파의 가르침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것은 그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서 논리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하여도 그것 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도 될 것입니다.

그릇된 교리를 분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방법은 이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는가 그래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주는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받아 드리게 하는가 그것을 위해서 내게 자주하고 도전을 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우리를 삶의 변화와 덕을 세우는데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이나 가르침, 그러니까 이단 사상은 우리의 삶의 변화와 덕을 세우는데 인도하기 보다는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교리를 논리적으로 변론하도록 부축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말씀 앞에서 얼마나 달라졌는가 하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이단이 나 사이비는 먼저 싸우려고 덤빕니다. 다

시 말해서 변론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벌써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밑바탕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성경의 교리라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이고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 공부는 절대로 지식의 전수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지식으로만 인도하는 것이라면 엄격히 말해서 유익보다 손해입니다. 가장 훌륭한 성 경 공부는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인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느냐 하는데 목표를 두고 거기에 초점 을 맞추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앞에 놓고 변론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정 말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내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쪼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말씀 앞에서 씨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종종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이단 사상의 경우, 그들에게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가 과연 구원의 길로 인도되는 가? 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변론을 통해서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신앙의 자리에서 나를 떠나게 하는 것입 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변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영혼의 구원 문제나, 삶의 변화보다도 내게 어떤 교리적인 변론을 일 삼으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그들 의 동기를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여호와의 증인 같은 사람, 몰몬교 선교사들 그 밖에 이단 사상이나 사이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믿지 않은 사람보다 믿는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우리 성경에 대해서 한번 토의 해 보 실까요?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면 우리에게 경계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 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 고 했습니다. 여기에 중심 되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기반으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랑 이 사랑이야말로 모든 가르침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계명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가령 10계명을 보세요.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 하는 계명입니다 다섯째부터 열번째까지의 계명은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열 가지 계명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우상을 숭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날을 외면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계명과 교훈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 속에 요약이 됩니다. 어 떤 교훈이나 어느 사람이나 어느 단체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도록 그리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도록 인도한다면 일단 궁극적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형제를 사랑하는데서 우리를 떠나게 한다면 우리는 귀를 막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케 할 이런 다른 교훈 을 경계하라고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다른 교훈이 아닌 바른 교훈 의 자리에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율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율법주의자 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 보면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 인들이 그 당시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미혹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저들은 선생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율법주의자들은 배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가르치기만을 원했 지 배우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선생이라는 말을 별로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 습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을 하시지 전에 배우라 는 초청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사람은 평생 배우는 학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와서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제일 먼저 요구하시는 말씀을 배우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먼저 선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헛된 말을 즐겼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의미 없는 말, 신앙생활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 말을 위한 말, 토론 을 위한 토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에 보면 사람들이 이에 벗어나 헛된 말 에 빠져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참된 사랑의 자리에서 떠나 헛된 말에 빠졌다는 이 야기입니다. 헛된 말 이란 것은 전혀 의미 없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유익하지 못하고 비생산적 인 말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몰랐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은 가르치기는 하면서도 율법이 의도하는 진정한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7절 말씀 보세요.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신앙의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사실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율법 자체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율법으로 성도들은 잘못된 신앙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가령 율법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할례를 받게 되어 있는데 이 런 특별한 조항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처럼 강조해서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어떤 조항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보면, 바울이 그러한 잘못에 빠질 것이 염려되어 이렇게 말했 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자체만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라 는 것과 이 것은 하지 말라 의 두 가지 명령으로 요약됩니다. 율법을 계속 강조할 때 우리의 죄를 계속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 율법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심각한 죄책감 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절망의 구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만 강조하면 그리스도를 보 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랑하는 믿음의 중요한 것이 디모데에게 바른 사역을 강조하면 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른 교훈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10절의 마지막 부분에 강조된 바른 교훈을 강조하면서 이 바른 교훈이 바로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무시한 복음만의 강조는 우리를 피상적인 자리로 인도하고, 복음이 강조되지 않은 율법만의 강조는 우리를 절망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닫고 이 십자가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주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앞으로 계속 강조해야 할 사역의 기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할 일이 또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 위해 살고, 복음 위해 일하고, 이 복음을 바로 전해야겠습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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