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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자와 여자의 역할 (딤전 0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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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도의 책 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면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오 늘 주신 말씀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 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내 마음속에 분노가 없어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분노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고 다툼은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분노와 다툼은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교훈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교훈입니다.

마태 복음 5장 22, 23절을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 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 물을 제단에 드리러 가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잘못된 것이 기도 생활에 얼마나 심각한 장애가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 다. 이것은 산상보훈에서 아주 강조된 진리 중에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했습니다. 주기도 의 핵심 가운데 하나도 남을 용서하고 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죄 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다음에 나오는 마태복음 6장 1 4, 15절에 뭐랬어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말씀했습니 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기도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셨던 것은 올바른 인간관계입니다.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기도에 응답 받기를 원하십니까? 올바른 인간관계 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나 베드 로 사도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이 강조했던 기도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지도자로 세움을 받아 사역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간관계를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역은 근본적으로 신령한 사역 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역은 기도 없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와 다툼입니다. 내 속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다툼이 없습니까? 다툼까지는 없다해도 마음 속에 미움 같은 것은 없습니까? 그것은 기도에 합당한 자리가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죄를 자백 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웃을 용서하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 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는 참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진정한 기도가 가능한 것입 니다. 이것이 오늘 주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적극적인 면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 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이 말은 손을 깨끗이 씻고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할 때 늘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전통을 따르게 되면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했 던 기도의 자세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을 열망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표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손을 들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자세입니 까?

그러므로 손을 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한다고 할 때 그 손이 거룩 한 손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 10-17절까지의 말씀을 한번 찾아서 같이 읽어 보실까요?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 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 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 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 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 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 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은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 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심이 아니요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면 아무리 기 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담이 무엇입니까? 죄의 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시편 24편 3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손 이 깨끗하다는 말 다음에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인 청결을 의미합니다. 요단을 건너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도 너희 스스로를 성결케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 깨끗한 그릇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하는 일에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 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나올 때마다 주님 앞에 나의 소원을 아뢸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나 와 이웃과의 관계가 옳게 되어있나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나를 살펴야 합 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습 니다. 그러면 여기서 보는대로 남자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여자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 까? 그런 말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 5절을 보세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들이 기도한 것 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성의 기도를 금지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생각되는 말씀 8절은 여성은 기도를 안해도 좋다거나 기도는 남성만의 특권이라고 강조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해야 하지만 특별히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에게는 더 중요한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기도로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기도로서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성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을 뿐 아니라 한 가정의 머리로 세웠습니다. 그러 므로 가정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가장들의 중요한 책임 행사도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계신 남성 여러분, 거룩한 손을 들어 내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십 니까? 분노와 다툼을 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남성 지도자로서의 기도의 책임을 강조한 다음, 여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이 부분은 현대 교회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오고 있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가 자유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은 그 당시의 문화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오늘의 문화에 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소위 여성 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입니다. 사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처럼 여성의 순복을 강력한 어조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성경 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성들이 그렇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 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성을 먼저 세 우시고 그 남성을 돕기 위한 협조자로서 여성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도력을 남성에게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협상이 아니라 창조의 원리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율법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의 견해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을 마지 막 부분에 근거해서 여성은 일체 교회 사역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여 성들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까지 금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신 말씀을 바로 이해 하기 위해서 조금 전에 언급했던 고린도전서 11장 5절을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 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여기서 보면 초대 교회에서 여성들이 기도를 했고 예언도 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예언 을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말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언을 폭넓은 설교 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구약 성경의 아모스의 예언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앞으로 올 어떤 사건에 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의 부정을 고발한다든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바 른 뜻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 서도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했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기록한 것은 기도나 예언을 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대로 머리에 쓰는 수건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가령 오늘 카 톨릭 교회에서는 미사때 여자들이 수건을 씁니다. 개신교 가운데도 1830년 영국에서 일어난 교 단 가운데 하나인 Plumouth Brethren이라는 교파에서는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 립니다. 수건을 왜 씁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남성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에 대해서 제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겠습니다 라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고린도나 소아시아 지역의 여성들이 수건을 벗은 일이 생겨났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표현이 있다고 봅니다. 복음은 여성 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자마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음받은 자의 고귀한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여성들을 속박하고 있었던 그동안의 전통 적인 굴레를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복음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성이 자유를 얻게 되자 자유를 남용하기 시작했 습니다. 가령 여성들이 사치스러운 삶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그 당시 에 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무역도시였으며 경제적으로 풍요했었습니다. 여성들은 이 풍요의 특원을 이용해서 사치 스러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여성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외적인 단장이 아니라 내적인 인격의 단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에베소교회에서는 지도자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 리도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할 것 무어냐 하게 된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까지나 동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에게 다 른 역할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열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남자가 여성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단지 역할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한 가정을 세울 때 가정에서 지도 자격을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경륜이 고 가르침이고 계획입니다. 바울이 염려하고 경계한 것은 여성들의 사역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의 위치인 순종의 자리에 서 벗어난 사역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 는 일편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라 했습니다. 여기 종용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방해하거나 지배하려는 의도가 없이 집중하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된 점은 종용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 는데 있습니다. 좀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듣는 자세, 집중한다는 자세를 가지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당 시 여자들 중에는 배우려는 생각이 전혀 없이 자신들이 조금 아는 것만 가지고 남을 가르치는, 그래서 지도자의 역할을 무시하고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일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 은 그런 여자들을 향해서 배움의 자리에 다시 서서 집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 십시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사실 이 말씀은 11절과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을 뒤에 두곤 했습니 다. 여기서도 강조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주관하는 것에 대 해서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것으로 남자를 주관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 다. 이 말씀 역시 가르치는 사역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자가 왜 순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나 하는데 대해서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에 보세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자가 순복해야 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지으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8절에 보세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돕는 역할 이것이 여성이 서야 할 고유한 삶의 자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오늘까지 이렇게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사람으로는 제 아내 의 헌신적인 도움이었음을 간증합니다. 누가 나를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내 아내만큼 나를 도 와 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 도움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기대하셨고 하와에게는 돕는 역할을 기대하셨습니다. 그 래서 두 사람이 서로 보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멋진 한 쌍이 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 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와가 먼저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세기 3:6) 아담이 하와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와를 따라 먹었습니다. 부부가 사 랑하면 여자 말 듣지 않는 남편 있습니까? 아담의 경우도 그렇게 된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가 속임을 당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타락의 사건에서 주도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는 다소 이성적으로 지으신 반면 여자는 다소 감정적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나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해서 그릇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지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역할을 보완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지도자의 역 할을 남자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gahn & tott도 여성 목사 안수를 찬성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여자가 목사로 되었을 때 남자 목사를 돕는 역할을 한다면 제한할 필요가 무엇이 겠는가 했습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 본래의 정신 앞 에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그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 메시지는 하나님이 여자를 지으신 본래의 의도는 순종의 자리며 이 순종을 통해서만 여자가 참으로 여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 라 이 말씀은 오래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여기 나오는 구원 이란 말은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건강한 삶의 자리 또 는 진정한 인간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자가 언제 여자로서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삶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정절로서 믿 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할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여기 여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네 가지 덕목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정절, 믿음, 사랑 그리고 거룩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만일에 여자가 무엇을 가르치다가 교만해지고 인격적 으로 탈선하기 시작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를 세워 주신 순복의 자리, 돕는 역할의 자리를 스스 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주었습니다. 남성 지도자에게는 기도의 책임이 강조되었습니다. 분노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 습니다. 남성들은 흥분하기 쉽고 싸움하기 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영적인 사역 은 기도 없이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책 임을 맡았던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므로 그 사역을 바로 감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성은 하나님이 나를 세워 주신 그 본래의 자리, 순복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다 움을 잃어버리지 않고 향기를 발하면서 맡은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자나 여자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각자의 책임을 바로 잘 감당해서 가정에는 행복이, 교회에는 부흥이, 사회에는 유익을 끼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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