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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위해 삽시다. (딤후 0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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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뉴저지주의 상원의원인 드와이트 모로우씨가 뉴욕시를 떠나는 기차를 탔을 때 그는 기차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표를 꼭 찾아야 하는데!'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옆에서 기다리던 차장이 '모로우씨, 걱정하지 마세요. 표 사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겠습니다. 후에 찾으시게 되면 우편으로 보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모로우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가는 행선지를 알기 위해서 그 기차표를 찾아야만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없이 허송세월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어떤 곳인가, 자신의 현재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는 가? 이를 생각하여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먼저 꿈과 이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전이 없습니다. 뚜렷한 생의 목적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루 하루의 삶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되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막연히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며 그 날 그 날을 덧없이 살고 있습니다. 설혹 목적이 있다해도 대부분이 내 개인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는 무관심하고 자신만을 위해 곡간을 지으려고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눅12:16-21) 그러나 이러한 이기적인 목적을 가진 자가 많을수록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죄악은 날로 더해 갑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실 수 있는 소원입니까? 사람의 인격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그가 처한 처지나 지위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어떤 목적을 향하여 살고 있고, 그의 평생의 소원이 무엇인가에 달려있습니다. 가령 그의 평생 소원이 그저 잘입고, 잘먹고, 편안히 사는 정도라면 그 사람의 수준은 동물적 인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갈6;7-9)

만약 어떤 교인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는데 항상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계와 건강, 그리고 돈을 벌어 부자되거나 세상 살아갈 것만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이러한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롬8:5-8)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 입을 것, 살 것을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하자, 주님은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돈이 탐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금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돈 자체가 생의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명성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보람 있는 선한 업적을 남김이 없이 이름이 나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귀하고 보람 있는 일을 남겨 놓는 다면 자연히 그 이름이 천추에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생의 결실이 없이 이름을 남길 줄 생각하면 그것은 어리석거나 불행한 사람의 이름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정과 기분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쾌락의 단꿈을 싫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라지는 쾌락과 순간적인 기분을 위하여 사는 생이 얼마나 속절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약4:14, 전5:15)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보다도 참으로 그리운 것이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쾌락도 다 팔아서 그것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싶은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 지를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생명을 얻고, 온갖 것을 바쳐서 하나님을 찾고 싶습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을 순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생에 날개를 가져와 저 푸른 이상의 하늘과 꿈과 자유와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떠나서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선생도 돈도 명예와 권세도 예수님 없이 우리를 죽음의 길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미술 전문 잡지인 '일뤼지옹'(Illusion)지에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겉모습과는 달리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늙고,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거짓된 삶을 속일 수 없다는 엄숙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있을 죽음의 순간을 잊고 외형의 업적을 이루는 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요즘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진실을 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업적만을 좇아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목소리와 옷차림, 외모와 동작 하나 하나까지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예수를 위해 살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우리가 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교인들이 빈 항아리와 같이 내용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생의 무거운 짐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 속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참된 크리스천들의 삶의 목적과 사명은,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고(단12:3),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막8:35, 행20:24)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오늘 이 시간 나의 평생의 소원이 과연 무엇인가? 평상시 나의 주된 행동과 소원이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살고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찰스 프리데릭 와이글은 1871년에 미국 인디애나주의 독일계 이민가정에서 12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12세 때 감리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결혼한 후 노래하며 설교하는 순회전도자가 됩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이 집을 비우는 일이나 전도사역을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남편을 저주하고 딸을 데리고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는 실망과 좌절감에 빠져 번민하다가 바닷가 낭떠러지에 올라가 자살하려고 뛰어내리려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를 사랑하고 돌보아 왔는데 네 앞날을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때 그는 외쳤습니다. '그렇다. 주님께서 날 사랑하고 지켜주신다. 이제 나는 주님만을 위해 살리라' 그때 받은 감동으로 찬송 시를 썼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이 세상사는 동안에 주 이름 증거하면서 무한한 복락 주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359장)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돈이나 재능이나 권력이나 인기는 사는 것을 돕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위해 살다가는 수전노가 되기 쉽고 권력을 위해 살다가는 독재에 흐르기 쉽습니다. 인기를 위하여 살다가 마약중독이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학자들은 진리를 위하여 삽니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위하여 삽니다. 법관들은 진실과 정의를 위해 삽니다. 그런데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은 이 모든 것의 종합입니다.

건배할 때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칩니다. 우리가 위해야 할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너와 나의 아름다운 우정을 위하여, 그런데 '위하여!' 가운데 가장 차원이 높은 것은 '예수를 위하여'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바울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지금도 5천여 가정이 한국을 떠나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중국에서, 마피아가 판을 치는 러시아에서, 선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중앙 아시아에서. 선교사라는 신분이 탄로 나면 심한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회교권에서, 영적으로는 한없이 삭막한 일본에서, 선교사에 대한 배척이 점점 심해지는 인도네시아와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세계 여러 곳에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디모데 역시 신실하고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역경과 고난이 불어닥친다 해도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을 만큼 크고 확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시험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진실로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살려면,

첫째로 거짓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젊은 청년이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몇 가지 생활용품과 식품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물건을 담고 있는데 한 늙은 부인이 계속해서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이내 그녀를 무시하고 볼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젊은 청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미안해요. 만일 내가 당신을 자꾸만 쳐다보아서 혹시 당신에게 불편한 마음을 주었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을 보는 순간 얼마 전에 죽은 내 아들녀석이 생각났습니다. 젊은이는 내 아들과 꼭 닮아서 쳐다보았습니다.' 젊은이는 할머니의 아픈 마음을 읽고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참으로 안됐군요. 내가 할머니를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할머니는 매우 측은해 보이는 자세로 젊은이에게 부탁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떠날 때 '잘 가세요 어머니!'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제 마음은 매우 위로가 될 것이며, 기분이 좀 나아질 것입니다.' '염려 마세요. 제가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젊은이는 오히려 할머니의 간단한 요청에 기쁜 마음으로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할머니가 떠나가자 젊은이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그 할머니는 젊은이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슈퍼마켓 문을 통해 사라졌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기의 외침이 할머니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계산대의 직원이 내민 계산 용지에는 무려 127달러나 프린트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나왔습니까? 나는 겨우 몇 가지만 샀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 물었습니다. 그러나 계산대에 있는 직원은 안경너머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머니가 산 모든 물건값은 당신이 지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젊은 청년들에게 이런 거짓된 모습을 남긴다면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영국 속담에 부모들의 약점과 강점은 자녀들이 반드시 그 값을 지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과 온전한 인격의 사람들은 역시 신앙과 사랑과 온전한 인격의 자녀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매는 나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거짓 없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이 믿음을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물려받았습니다.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신앙의 사람들이었고 진실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디모데 역시 부모와 같은 훌륭한 인격과 청결한 양심, 그리고 거짓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거짓 없는 믿음이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짓 없는 믿음이란 형식적이거나 겉치레의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믿음입니다. 비록 조금 실수 한다해도, 조금 부족한데가 있어도 그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기쁘게 충성하는 사람이 거짓 없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엄히 책망하신 사람들은 거짓된 믿음의 소유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완벽했으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짓믿음입니다. 거짓 없는 믿음만이 예수를 위해 살게 만들어줍니다.

둘째로 소명에 대한 뜨거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말을 사려고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파는 상인에게 묻습니다. '이 말 타는 겁니까?' 말을 팔려는 사람이 '이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려면 뛰고 차고 난리를 쳐서 탈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수레를 끄는 말입니까?' '이 말한테 수레를 지우면 그냥 달아나 버립니다.' 말을 사려는 사람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팔려는 겁니까?' 말을 파는 사람이 하는 말이 '말 모양이 좋지 않습니까?' 스타일이 좋아서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이 말과 같은 신자는 없습니까? 안장도 올려놓지 못하게 하고. 짐도 지지 않고, 스타일만 갖추려는 성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부흥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자꾸 생깁니다. 스타일만 성도인체 하면 무엇합니까? 그런 사람은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모양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신앙은 소명적인 관계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소명적인 관계가 바로 될 때에 바른 믿음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사람을 보내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명감에 불타 자원하는 사람을 기다리시고 그런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위하여, 이 나라의 구원을 위하여 누가 갈꼬 하는 사명을 분명히 주시면서 자원하는 소명자를 찾고 계십니다. 디모데는 그의 생애를 복음의 사역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증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즉 소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요, 여러분의 인생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시고 예수를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본의 이주반도에 백여 개의 나무로 만든 실물과 똑같은 새들을 나무에 올려놓았습니다. 다른 새들을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모형 새들입니다. 이 나무 조각 새들을 놓는 목적은 전멸위기에 처한 앨버트로스라는 새들을 유인해서 새끼를 낳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참으로 바보스러운 앨버트로스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2년이 넘도록 앨버트로스 새는 이 나무 조각 새에게 구애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멋있는 둥우리를 곁에 만들어 놓고 구애를 하면서 다른 앨버트로스 수컷 새들이 경쟁을 벌리며 구애를 하면 싸워 물리치면서 생명이 없는 나무 새에게만 구애를 하였습니다. 그는 종일토록 나무 조각 새 옆에 신실하게 있으면서 구애를 하며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조류연구가인 일본의 후미오 사토씨는 이 앨버트로스 새가 나무 새에게 심취한 채 구애를 하는 바보 같은 짓을 지켜보면서 '이 새는 진짜 새들에게는 데이트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앨버트로스 새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비슷하거나 어렴풋이 희미한 모방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신앙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네, 나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경도 읽고 있습니다. 매일 밤 기도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되면 신앙의 자세에서 벗어나서 쉽게 좌절하고 실패감에 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어떻게 할거나?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한탄하며 몸부림치면서 원망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believing in God)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trusting in God)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의 건강, 당신의 경제, 당신의 가족, 당신의 미래에 대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디모데는 온갖 박해와 거짓교사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지금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있습니까? 말로만 예수를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정말 거짓 없는 순수한 믿음, 불타는 소명감의 믿음, 나의 모든 문제, 나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믿음으로 진정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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