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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복종 (딤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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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까지 몇 시간에 걸쳐서 생각한바 있는 디모데후서 1장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 귀한 구원의 복음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부끄러움 없이 자랑스럽게 전파 할 뿐 아니라 이 복음에 손상을 주는 모든 세력에서 복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세속주의에서 공산주의의 무신론시창에서 이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도둑질 하려는 데서 지켜야 합니다. 어느 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서울시내의 가정 가운데 지난 일년 동안에 4분의 1의 가정이 절도 당한 경험이 있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서울의 보안 관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집을 잘 지 켜야 손해보지 아니합니다.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 복음을 훔치고 손해를 끼 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른 것은 복음 을 지키라고 불렀습니다. 이 복음은 정말 비길 데 없이 귀한 것입니다. 사실 질그릇과 같은 우 리가 이 보배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를 잘 지켜야 합니다. 복음은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주 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달해야만 하고 의심 없이 부끄러움 없이 고난 받을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 우리가 받은 복음을 모든 부패시키려는 가능 성에서부터 지켜야 합니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복음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힘써 야 합니다. 충성되게 이 복음을 지킵시다. 활발하고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합시다. 용감하게 이 복음 위 해 고난을 받읍시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을 위한 3중 의무입니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니까 오네시보로와 그의 식구들을 제외하고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를 버리고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신 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 이 아닙니까.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 자들을 향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희도 가려느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을 무슨 영 화 구경이나 음악 감상이나 교양 강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멀리로 도망가고 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좀 다르게 살 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던지 너만은 좀 다르게 살라 고 하십니다.

로마서 12:2절에 우리더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고 말씀했습니다. 산 물고기는 세 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죽은 고기는 물결 따라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고기는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산 물고기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 니다. 왜요? 우리는 강하게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디모데는 인 간적으로 도약했습니다. 육신만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부르 심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이때로 말하면 바울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 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야, 들으라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 이 어떻게 생각하던 개의치 말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던 관계할 것 없어. 너 만을 강해라 네 가 수줍다고 염려하지 말라 네가 몸이 약하다고 걱정하지 말라. 너는 강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 하라 고 한 권면은 단순히 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그저 약한 사람이 빠른 말처럼 강하고, 수줍은 사람이 용감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부른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강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의 은혜 가운데서 강해지라는 말인데 무슨 말인고하니 그리스도인의 힘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 4 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말한 것입니다. 능력 주 시는 자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디모데더러 왜 강하라고 합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그 직무를 위해서 강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바울은 두 번째로 감 옥에 들어가 있는 중이고 언젠가는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것까지 각오하고 있는 처지였 습니다. 이와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로서는 다음 세대에 복음 진리를 전승하는 것이 그의 소 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디모데후서 2:2절에 보면 복음 전달의 네 가지 단계를 암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바울 자신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이 복음을 이제 디모데에게 맡깁니다.
셋째는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또한 복음을 위탁합니다. 넷째는 이렇게 복음을 위탁 박은 충성된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에 의해서 충성스럽게 그리고 정직하게 사람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바울, 바울로부터 디모데, 디모데로부터 충성된 사람들, 충성된 사람 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복음은 이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또 다른 세대에서 그 이후로 마치 올림픽의 성화를 손에 손을 거쳐서 전 달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몇가지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청지기에 비유했습니다.
주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말은 본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흔히 쓰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청지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깊은 의미에서 인간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 동안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다 하나님의 것이요 나는 임시로 맡 아 사용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7절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요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 실상 그것은 내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 그 대가를 기대하 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청지기는 모든 일에 주인의 뜻을 살펴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기억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맡은 자란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청지기에게 구할 것은 충성 입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려면 우선 부지런해야 합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졸면 안됩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유명한 달란트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어떤 주인이 먼 여행을 가면서 종들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한 사 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떠났습니다. 맡았으니 장사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해서 갑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계산 할 때 남긴 사람에게는 칭찬을 하고 땅에 맡은 것을 묻어 두었던 사 람은 책망했습니다. 맡은 사람은 부지런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비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선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악한 청지기는 될 수 도 있습니다. 의로운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불의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게으른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미련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청지기를 축복하십니다. 많은 것으로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2. 군사에 비유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네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했습니다. 군인 생활의 특색은 전적인 헌신 생활입니다. 군인은 자기의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수가 없습 니다. 온전히 그 몸을 나라에 바친 생활이 군인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4절에 군 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을 온전히 하나님 께 드린 생활입니다. 이 말은 믿는 사람은 다른 사업을 하지 말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무슨 사업을 하든지 그 최고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요 주를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인 헌신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의 생활은 전적인 순종의 생활입니다. 상관의 명령에는 무 조건 순종하는 것이 군인의 생활입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군인은 사령관이 어디로 가 라고 하면 무슨 이유로 가라고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군인은 오직 무조건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실 때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면 언제나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군인은 이유를 묻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인의 생활은 용감해야 합니다. 용기는 군인의 최고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실 때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거듭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담대해야 모든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도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라 고 했습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그 일신을 온전히 희생할 각오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으 면 참된 군인의 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군인 정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주님을 위해서 나의 욕심과 안일과 재물과 나아가서는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것이 그리스도 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은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

따라서 그 서약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받을 때 주님께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적은 일에도 충성해 야 합니다.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역경 중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군인 생활에는 전우의 사랑이 있습니다. 소위 전우애가 있습니다. 전우애는 생명을 걸고 싸울 때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도 힘든 봉사를 할 때 서로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 노릇을 잘 하고 있습니까? 군인 가운데 제일 부끄러운 군인은 도망병입 니다. 도망병은 책임을 피하는 군인입니다. 군인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라마다 군인이 있는데 왜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국토를 지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 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삼으셨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을 지켜 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이면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 교회 안에는 언제나 건전한 보수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이 많 으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는 원수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악한 사상 악한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상을 격멸해야 합니다. 독재주의 사상,무신론 사상, 인본주의 사상, 물질만능주의 사상, 세속주의 사상, 향락주의 사상 같은 사회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된 우리 의 사명입니다.

3. 경기자에 비유했습니다.
경기하는 사람에게 몇 가지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경기자는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법을 따르지 아니할 때 상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축 구를 하면 축구공을 상대방의 골문 안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거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축구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을 차지만 법대로 차야 합니다. 모든 경기에는 경기의 법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법을 잘 지키는 훈련부터 받아야 합 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법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가 섭니다. 성경은 하나 님이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자유 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법의 테두리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법을 떠난 자유는 방종이고 혼란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경기하는 사람은 절제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자고 싶다고 마음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놀고 싶다고 마음대로 놀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 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도 1:19절이하에 사람마다 듣 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했고 3:2절이하에 보면 우리가 다 실 수가 많으니 만일에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니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 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 에서 나느니라 했습니다. 경기자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초기하고 싶은 충동까지 일 때가 있다고 합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그럽니다.

여러분, 세상에 쉬운 것은 없습 니다 강철이 강철이 되고 금이 금이 되는데는 그렇게 뜨거운 용광로를 거쳐야 합니다. 훈련을 받는 만큼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강하게 훈련시키기를 원합니다. 그의 자녀가 약하게 자라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강하게 자라려면 강하게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복이 된다 고 했습니다. 경기자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력투구의 정신으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무사안일 속에 권태와 하품의 지겨운 인생을 사는 이도 있고 분투 노력으로 긴 장과 향상과 보람된 인생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인생은 업적이나 실적도 중요하지만 태도와 과 정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어 놓았느냐 하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어떤 태도와 정신 으로 인생을 살았느냐 하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자기가 맡은 일에 열과 정성을 경주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자세를 자기의 맡은 일을 감당한다고 하면 10년도 안 가서 우리 나라는 아시아의 모범 사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누구나 자기 일에 정성을 다 한다 면 우리는 얼마 안가서 세계에서 존경받는 최고의 민족이 될 것입니다. 경기자는 사력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쉽게 살려는 안이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피땀을 흘려야만 성공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정열과 수고 없이 쌓아올린 행복의 탑은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하 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십니다. 각 사 람에게 주어진 능력은 다릅니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있습니다.

4. 농부에 비유했습니다.
농부는 근면합니다. 부지런합니다. 쌀 한 알이 우리 밥상에 오르려면 농부의 손길이 적어도 1 00번은 가야 한다고 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부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농약을 뿌리고 잡초 를 뽑고 추수하고 방아를 찧고 푸대에 넣어 도시로 운반합니다. 쌀 한 알 한 알이 모두 피땀의 산물이요 정성의 결과요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쌀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땅에서 혼자 솟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의 땅과 피의 소산입니 다. 사상사 루소는 철학자 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라 고 했습니다.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 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으면 집안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항상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근면은 성공의 어머니요 나태는 실패의 근본입니다. 농부는 정직합니다.

농사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납니다. 콩을 심었는데 오이가 나고 오이를 심었는데 콩이 나는 일이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 이 나고 적게 심으면 적게 납니다.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지 아니합니다. 사람은 자 기가 심은 것을 거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가 없습니다. 농사는 자연을 상대로 합니다. 자연 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속이지 않습니다. 자연은 정직합니다. 거짓이 없 는 자연을 상대로 일하다보니 농부는 정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행위에는 거짓이 있습 니다. 우리는 농부의 정직함을 배워야 합니다. 농부는 순리대로 삽니다. 밭에 씨앗을 심는다고 금방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라기를 기다리고 익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어린 묘목이 하루아침에 정정한 거목이 될 수는 없 습니다. 성장과 성숙에는 반드시 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농부처럼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 니다. 생명은 순리대로 자랍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해야 합니다. 역리로 하면 안됩니 다. 농부는 결코 조급하지 아니합니다. 농부는 기다릴 줄을 압니다. 우리 국민은 매사에 너무 조 급합니다. 순리와 인내로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만리장성을 하룻밤에 쌓을 수는 없습니다. 로 마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가 갑자기 중진국이 되고 선진국이 되고 복지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점진적 발전의 길을 걷습니다.

농부는 하나님과 함께 일합니다. 밭가는 일 씨뿌리는 일, 김매는 일은 농부가 합니다. 그러나 씨에서 움이 트고,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되고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최선을 다 한 다음에는 조용히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농부처럼 행하면 세상에 안되는 일 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농부처럼 근면하고, 농부처럼 정직하고 농부처럼 순리대로 살 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청지기처럼, 군인처럼, 경기자처럼, 농부처럼 살아 그리스도 인의 산 모습을 이 사회에 들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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