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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에 시련을 이기는 법 (마 14: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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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세상한 가운데 홀로 있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속박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거기서 40년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그렇게 시련 가운데 지내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시험하고자 함이며, 사람이 사는 것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진리도 그들 앞에 새로운 고난이 오거나 어느 정도 안정된 현실이 올 때는 곧 잊어버리고 다시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있다는 철저한 불신앙의 백성으로 돌아서곤 했습니다.

떡으로만 살 수 없다.
우리는 안정된 생활이나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우리 앞에 전개된 현실적 사건 자체에 집착하게 됩니다. 생활의 안정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이라는 우상을 모셔들이게 함으로써 우리를 타락시키고, 고난은 생에 대한 가상적인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철저한 불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두 상황의 현실에 처해 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그 상황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눈이 어둡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심한 풍랑 가운데에서 그 풍랑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이 그들에게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것처럼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 도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제적 안정으로 풍요를 누리며 인간 삶의 정도를 벗어나서 타락한 생활을 하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은 심판의 불을 들고 그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천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단지 외부에서 들어온 단순한 이방인으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노아시대, 현실의 생활에 집착해 있던 그 시대 사람들은 그들 앞에 다가오는 심판시간을 보지 못하고 홍수로 심판하는 그 시간까지 시집가고 장가가며 심판의 비를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비를 심판의 비가 아닌 단순한 장마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의 궁핍이나 경제적 불황만이 우리가 당하는 생의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풍요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궁핍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이며 고난입니다.경제적 풍요 가운데서 끝까지 물질 즉 맘몬이라는 우상을 거부하고 오직 마음과 뜻, 정성을 다해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기에 대부분 맘몬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교회안에서조차 하나님 대신에 맘몬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 심판의 채찍을 들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때 맞이하게 되는 어려운 일들은 단지 경제적 불황이거나 정치적 이유이지 하나님의 경고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요할 때나 궁핍할 때나 안정된 상황에서나 역경의 처지에서나 언제나 우리의 심령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설수 있다면 그 이상 큰 축복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때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깨어 있는 삶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을 잃자 바다속에 빠진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당하는 신앙의 위기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말씀에 대한 분석을 가하게 하고 회의를 품게 합니다.그리고 겨자씨만한 보잘것 없는 믿음의 근거까지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입으로 아무리 주문처럼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를 중언부언한다고 해도 우리의 실존은 자리를 잃어버리고 계속 방황하고 떨게 됩니다.

그렇게 될때 분열되고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켜 보려고 여러가지 인간적인 방법, 즉 초월적 명상이니 요가니 氣법 같은 것을 끌어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어느덧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군림합니다.그러한 상태에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그의 속사람은 전적으로 이교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말씀하시기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세가지 중 어느 한가지라도 빼놓을 때 이미 그 자리에는 다른 것이 들어 앉게 됩니다. 언제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우리 주님을 사랑할 때 어떤 생의 풍랑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침몰하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여유와 안정된 희망 가운데에서 그 풍랑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사업의 계획, 우리 자신의 의욕에 따른 성급한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지는 못합니다. 주님 없는 인간적인 명예나 욕심 경쟁심에 의한 사업계획,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분주히 뛰어다닐 때가 있습니다.

'왜 의심을 품느냐'
그때에는 이미 우리의 사고는 철저히 세상적인 사고, 세상적인 의식에 물들어 있게 됩니다. 주님 말씀대로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아무 것도 안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렇게 될때 우리는 이원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그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거부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나중에 결국 그러한 방법으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게 될때 깊은 허탈감과 좌절 가운데 빠져 있게 됩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오직 한마디 뿐입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우리는 주님 발앞에 엎드려 [주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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